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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0화 (11/141)

10화

창가로 쏟아져 오는 빛을 마주한 남자의 등 뒤로 그림자가 졌다. 나른한 오후였다. 기분 좋은 오후였고.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맞이하기 좋은, 햇빛이 그의 오후를 반겼다.

그는 이런 느낌을 좋아했다. 폭풍이 오기 전 평화로운 분위기를. 남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일상을 자신만은 특별하게 여기는 듯한 느낌이 기분 좋았다. 남들은 무능력하게 흘려보내는 시간을 자신은 마음껏 음미하는 것.

사람도 그런 사람이 있다. 남들은 함부로 여기지만 자신의 눈에는 빛나 보이는 그런 사람. 손을 대지 않아도 자신만의 것이 된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라 빅터는 창밖으로 넓게 펼쳐진 꽃밭을 바라보았다. 파란 장미가 틈도 없이 다닥다닥 붙여 있는 꽃밭은 볼 때마다 장관이었다. 귀족들은 이 꽃밭을 보겠다고 그에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저택으로 초청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편지 따위 필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글자는 오직 네 글자뿐이었다.

-후작님

그의 귓가에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소녀의 목소리였다.

-정말 그러면 저를 도와주실 거예요?

-그럼. 당연하지, 에스티아.

후작이 에스티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키가 그의 갈비뼈 정도까지밖에 오지 않는 작디작은 소녀였다.

-그러니 너는…….

빅터는 회상에서 깨어났다. 그의 집사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빅터가 뒤를 돌아 들어오는 집사를 바라보았다. 연보랏빛 눈동자가 집사에게 어떤 이름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걸 기민하게 알아챈 집사가 바로 빅터에게 고했다.

“글레멘드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응접실로 모셨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전해.”

빅터는 그렇게 집사에게 말하고는 다시 등을 돌렸다. 집사가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방에서 나갔다.

집사가 완전히 문을 닫고 나가자 빅터가 큰 거울 앞에 섰다. 하얀 얼굴에 라일락을 연상시키는 눈과 머리색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때때로 젊음을 갈망하고 혐오했으며, 혹시라도 놓칠까 불안해하기도 하고 놓치지 못할까 염려하기도 했다.

오랜 세월 자신의 마음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결국 자신의 손에 진정한 젊음이 들어올 수 없다는 걸 인정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질투가 나는 젊음들을 망치는 것뿐.

그의 눈에는 하늘이 비쳤다. 맑디맑은 하늘이었다.

‘곧 비가 오겠군.’

이리 맑은 하늘을 두고 그렇게 생각한 건 아마 그밖에 없을 것이다.

* * *

에스티아는 현관 앞에서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셰린포드 저택이 청아한 느낌이었다면 이 저택은 뭔가 음산했다. 깔끔했고 어떻게 보면 셰린포드 저택보다도 화려한데도 전체적으로 어둠이 깔려 있는 느낌이었다.

에스티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길 양옆으로 펼쳐진 파란 장미 밭은 가히 장관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멋진 풍경을 자랑했다. 메리도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꽃밭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세상에! 제 평생 이렇게 아름다운 꽃밭은 처음 봐요, 아가씨.”

“그러게. 저택 주인이 꽃에 관심이 많은가 봐.”

에스티아는 손끝으로 살짝 꽃을 쓸어 보았다.

“하기야 오스카 저택은 워낙 유명했죠. 멋진 정원을 보고 싶어 많은 귀족분들이 편지를 보낸다고 해요. 사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가씨의 편지에 그렇게 빨리 답장하실 줄도 몰랐어요.”

에스티아는 아무 말 없이 꽃에 시선을 던졌다. 메리는 오스카 후작이 에스티아에게 청혼한 걸 모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메리가 들어온 시기는 그 이후여서 그런 듯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쉬쉬한 건가.’

이 사회는 흔히 말하는 ‘자유연애’라는 게 없으니 누군가의 청혼을 거절한다는 것 자체가 큰 사건이었던 거 같다.

‘나 참 별…….’

새삼 이곳 에스티아가 얼마나 갑갑하게 살았을지 상상이 갔다. 그래서 ‘지금’ 에스티아는 불쌍한 그녀를 생각해서라도 눈치 안 보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메리가 노크를 하고 30초가 지났을까. 내부에서 누군가 문을 열었다.

집사로 보이는 남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에스티아와 메리를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집사 안셀입니다.”

에스티아에게 인사하는 모습은 마치 기계 같아서 왠지 오싹했다.

메리는 ‘오랜만’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인사드린다?’

전에도 와 보신 적이 있으신 걸까? 궁금했지만 ‘뭐 연이 있으셨었나 보다’하고 생각했다.

에스티아는 애써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하기야 그의 주인한테 청혼도 받았었으니 알 만도 했다.

“그래요, 오랜만이에요, 안셀. 어…… 꽃밭이 아름답네요.”

어색함을 못 이긴 에스티아가 더듬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아가씨가 좋아하시는 꽃이니까요.”

높낮이가 없는 집사의 음성이 에스티아의 귀에 닿았다.

“네?”

“들어오시죠.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안셀은 에스티아의 반문에는 답하지 않고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에스티아는 메리와 함께 머뭇머뭇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안은 짙은 보라색 벽지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무리 밝은 빛을 쏟아붓는다고 해도 밝아질 거 같지 않았다. 에스티아는 속으로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위험할 거 같으면 무조건 튄다.’

겁에 질리기는 메리도 마찬가지인지 에스티아 곁으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소문만 들었을 때는 몰랐는데, 무척 조용한 저택이네요. 사람이 아예 안 사는 거 같아요.”

그도 그럴 것이 목소리를 좀만 높여도 메아리가 울릴 거 같을 정도였다.

‘그러게. 이 정도면 셰린포드 가에 다시 사과하러 가는 게 낫겠어.’

에스티아는 벽에 걸린 그림들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꽃 그림이었는데 아름다웠음에도 오래 보고 싶진 않았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귀신 체험이야? 뭐 이리 음산해?’

글레멘드 저택은 놀이공원 수준이었다는 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들어가시죠, 아가씨.”

안셀이 응접실 문을 열었다.

셰린포드 가의 응접실은 하나의 개나리 꽃 같았다면 이곳 응접실은 방금 본 파란 장미 같았다. 처음 문이 열렸을 때는 옅은 파란색 벽이 눈에 들어왔고, 그 다음은 꽃밭으로 터놓은 테라스가 눈에 보였다.

“주인님을 불러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집사는 에스티아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고는 곧 응접실을 나갔다. 응접실에는 달콤한 차향이 떠다니고 있었다.

“어머! 아가씨가 좋아하는 차를 준비하셨네요.”

메리가 테이블로 다가가며 호들갑을 떨었다. 테이블 위에는 주전자와 찻잔, 그리고 쿠키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반면, 에스티아는 테이블을 지긋이 바라볼 뿐 가까이 다가가진 않았다.

“응? 왜 그러세요, 아가씨?”

“어? 으응, 아니야. 아무것도.”

에스티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스카 후작가로 지금 가시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왜 그 말이 생각나는 걸까. 사실 왜 그렇게 예민한 반응이었는지도 이해가 안 갔다. 다만 짝사랑은 이제 그만하겠다는 말을 조금이나마 믿게 할 수 있다면 그거로라도 만족이었다. 일단 그 까탈스러운 대공의 의심에서 벗어나는 게 먼저였으니까.

에스티아를 경멸했다고 했으니 질투하는 건 아닐 테고, 그렇다고 그녀를 질투하는 건…….

‘응, 더 말이 안 되지.’

그럼 장르가 달라지니까. 에스티아는 혼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오늘 정말 날이 좋네요! 피크닉 가고 싶은 날씨에요!”

메리가 활짝 웃으며 창가로 다가갔다. 메리의 표정은 밝은 반면 에스티아의 표정에는 염려가 가득했다. 곧 긴 우기가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신관들은 갑작스러운 우기에 대비하지 못했고 약초는 심한 공급 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나라를 보호해 줄 마법사들의 마력이 약해지고 왕국들은 그를 틈 타 반란을 노린다. 주요 귀족 가문들은 황제에 충성을 다하는 걸 증명하기 위해 전쟁에 참전한다.

그리고…… 패배한다.

‘펜던트만 돌려주고 빨리 돌아가야겠어.’

지금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가 아니다. 평화로운 나라에서 계속 살아가려면 빨리 약초를 구해야 한다.

“아가씨.”

안셀이 응접실 문을 두드렸다.

“주인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공손하지만 감정이 없는 목소리.

그의 주인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에스티아는 응접실 문이 열리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 * *

에버하르트 바일을 약초 창고에서 처음 보았을 때, 푸른 잔디처럼 마음과 시선을 끌어당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낡았지만 포근했던 약초 창고와 어울리는, 눈동자를 지녔다고.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왜 에스티아가 그에게 사랑에 빠졌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에스티아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하필 이 순간에, 그가 떠오른 이유는 눈앞에 있는 남자가 그와는 전혀 상반된 분위기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가시덩굴이 생각났다. 누구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날카로운 가시가 에스티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글레멘드 영애. 저택에 잘 오셨습니다.”

연보라색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남자는 스쳐 지나가도 알아볼 법한 매우 수려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 그를 증명하듯 메리는 거의 홀린 사람처럼 후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그녀도 장소만 달랐다면 그에게서 다른 인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후작님.”

에스티아는 그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일단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건넸다. 후작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낮에 뜨는 달처럼 기묘한 느낌을 주는 미소였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앉으시죠.”

동작 하나하나가 군더더기가 없이 유려했다. 빙의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건 아니었지만 그가 기품이 흐르는 귀족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저 물건만 전해 드리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물건을 전해 주시기 위해 먼 길을 와 주셨는데 당연하죠.”

후작은 에스티아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손동작에 어색함은 없었다.

“물건이 없어지셔서 많이 당황스러우셨을 거 같아요.”

다짜고짜 산에 왔었냐고 캐묻는 건 그런 거 같아 에스티아는 돌려 말했다.

“그랬죠. 귀중한 물건이니까요. 도대체 그걸 어디서 흘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에스티아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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