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오스카 (2)
에스티아는 가방에서 펜던트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메리가 집사에게 건네자 집사는 그걸 다시 후작에게 건넸다.
“산에서 주웠습니다. 요즘 스퀘일러 상단과 같이 일하고 있는데 초입에서 주웠어요. 짐작가시는 부분이 없으신가요?”
에스티아는 두 손으로 찻잔을 동그랗게 말아 쥐었다. 손에 닿는 온기가 뜨거웠다.
“글쎄요……. 요즘 계속 집에만 있었거든요. 가끔 산책을 나가긴 했지만 금방 돌아왔던지라.”
긴 손가락이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제가 칠칠맞지 못한 탓이죠. 영애 덕분에 물건을 다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영애가 찾아 주시지 않았더라면 사람을 시켜서라도 찾았을 겁니다.”
짙은 보라색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에스티아는 살짝 몸을 떨었다.
“그저 흘린 걸 주운 것뿐인걸요.”
에스티아가 아무렇지 않은 척 차를 마시며 후작을 힐끔 쳐다보았다.
“산 초입에 남자가 서 있었어요. 귀족분이셨던 거 같은데, 그 길은 지나가다 어쩌다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어요. 일부러 찾지 않는 이상.”
차는 달았다. 혀를 부드럽게 감싸는 느낌이 좋은 걸 보니 확실히 에스티아가 좋아한 차가 맞는 거 같았다.
“글쎄요, 전혀 모르겠네요. 저는 산 근처에도 간 적이 없는지라.”
후작은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 이상 할 말이 없어진 에스티아는 눈을 도륵 굴렸다. 귀족 영애 3주차라 아직 이야기를 끌어가는 게 어색했다.
“분명 누가 주웠다가 다시 흘린 거겠죠.”
후작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살짝 덧붙였다.
“그걸 영애께서 주우셨다니 천만다행입니다.”
“네, 왜인가요?”
에스티아가 차를 마시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소중히 하신 채 가져오셨으니까요.”
귓가가 간질거리는 목소리였다. 에스티아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제 수행원인 웬트워스가 후작님의 가문 문양을 알아보았어요. 펜던트가 후작님 거라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면 누구라도 가져다주었을 거예요. 바일 대공 전하도…….”
그도 당연히 귀족인지라 그 문양을 알아보았다고 말하려던 에스티아는 말을 멈췄다. 왠지 후작에게 그에 대해 말하면 안 될 거 같았다.
“바일 대공 전하가 이 펜던트를 보셨습니까?”
나긋나긋한 음성인데도 왠지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글쎄요……. 물론 누구든 보상을 바란다면 가져다주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이 펜던트를…….”
후작은 찻잔을 들여다보며 말끝을 늘렸다. 그러다 에스티아와 딱 눈이 마주쳤다.
“부셔 버렸을 수도 있었을 거 같군요.”
“네?”
에스티아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움찔거린 그때, 누군가가 응접실 문을 노크했다.
“들어와.”
큰 목소리가 아니었는데도 노크한 사용인은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주인님, 길드에서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가 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사용인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채로 후작에게 말했다. 오기 직전에 웬트워스가 후작이 마법사 길드에 속해 있다고 하더니 아무래도 거기서 연락이 온 듯했다.
에스티아는 멀끔한 얼굴의 사용인을 바라보았다. 후작처럼 서늘한 인상의 사용인이었다.
후작은 그런 에스티아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스티아도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영애. 먼 길까지 오셨는데 아무래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거 같습니다. 나중에 제대로 답례를 하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전 별로 한 것도 없는데요.”
“그래도, 저한테는 매우 귀중한 물건입니다. 그걸 영애가 가져다주셨고요.”
후작은 살짝 허리를 숙여 에스티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중에 반드시 답례를 하겠습니다.”
에스티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평온한 후작의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 * *
오스카 후작가에 다녀온 뒤 에스티아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약초를 구하러 다녔다. 물론 날씨가 흐렸음에도 신전으로부터 비가 온다는 소식이 없어 상단에서 에스티아를 의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에스티아의 제안이 밑지는 제안은 아닌지라 상단의 상인들은 산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약초를 캐러 다녔다. 거기에다 상단 쪽으로 마법사들이 속해 있는 용병단이나 협회 쪽에서 연락이 오자 상인들은 더욱 일에 열을 올렸다.
원작을 알고 있는 에스티아는 사람들의 불안이 피어오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하늘이 흐리다 말면 분위기가 달랐겠지만, 몇 주 내내 하늘은 곧 비를 쏟아부을 것처럼 짙게 흐린 상태였다.
“그런데 왜 신전에서 아무런 말이 없을까?”
에스티아는 자신의 방에서 코코아를 홀짝이며 메리에게 물었다.
“제대로 예고를 해 줘야 약초를 재배하는 지방에서 미리 대비를 할 텐데?”
“신관들은 확률이 높지 않으면 비가 온다고 공포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거보면 좀 흐리다 말지 않을까요?”
21세기 일기예보를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에스티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물며 21세기 일기예보도 틀릴 때가 많은데?
마치 폭풍이 오기 전날 같았다. 에스티아 직감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에스티아 보다 겨우 몇 년을 더 살았을 뿐이지만 험한 사회생활을 경험하며 쌓은 감이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날씨뿐만이 아니었다. 대공 쪽도 조용했다. 에스티아는 고민이 되었다. 이쪽에서 먼저 액션을 취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괜히 섣불리 행동했다가 책잡히긴 싫었다. 다만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조금씩 계획을 세우고 있긴 했다.
아쉬운 건 정확히 우기가 시작되는 날짜를 모른다는 것이다.
“어머!”
천둥이 쳤다. 메리가 몸을 떨었다. 에스티아도 깜짝 놀라 창가로 다가갔다. 여태껏 날씨가 흐리기만 했지 천둥이 친 적은 없었다.
“메리, 우리 가문 소속 마법사들은 어때?”
“아…… 다행히 다들 여전히 잘 지내고 계셨어요. 아무런 문제도 없었어요, 아가씨.”
“대공 쪽에서 뭐 온 건 없고?”
“네? 네…… 아가씨.”
메리가 에스티아의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괜찮아, 메리. 딴 게 아니라 빨리 끝내고 싶어서 그래.”
“아가씨…… 혹시…….”
“응?”
메리가 언제 눈치 봤냐는 듯이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며 에스티아에게 다가갔다.
“혹시…… 다른 분한테 마음이 생기신 거예요?”
두 손을 꼭 맞잡고 묻는 것이 꽤 궁금한 모양이었다.
“메리, 혹시 누굴 떠올리는 거 아니지?”
에스티아가 게슴츠레 눈을 뜨며 메리를 장난스럽게 노려보았다. 메리가 부끄러운 듯 얼굴이 벌게졌다.
“아니…… 그게 제가 다른 가문에서 일하는 하녀들한테 들어 보니 오스카 후작님 진짜 유명하신 분이더라고요. 되게 인물이 좋으시고 신비로우시다고…….”
좋아하는 모습이 딱 연예인을 좋아하는 팬 같았다. 에스티아는 메리가 동생처럼 보여 귀여웠다.
“들어 보니 다른 분들과는 다르게 여자나 도박, 술과 관련된 안 좋은 소문도 없더라고요. 얼마 전에 만나 뵈었을 때는 정말 친절하셨고요. 그래서 혹시 아가씨가 마음이 바뀌셨나 해서…….”
메리의 눈빛을 보아 하건대 제발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소문이 없는 게 정상 아닌가? 그런 소문이 없다고 일등 신랑감이라니.
에스티아는 고개를 저었다. 메리한테는 솔직히 말해도 되겠다 싶었다.
“메리, 주변 사람들이 얘기하지 않았나 본데, 오스카 후작이 나에게 청혼했었대…… 아니, 했었어.”
“네!??”
깜짝이야. 메리도 이렇게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알고 에스티아는 깜짝 놀랐다.
“청혼이요? 오스카 후작이 아가씨한테요? 어머나, 세상에!”
기대하지 말라고 얘기한 건데 오히려 메리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에스티아가 황급히 덧붙였다.
“아니, 근데, 내가 청혼을 거절했어. 그때는…… 대공 전하를 좋아했으니까.”
뻔할 뻔자이지 뭐. 근데 남주가 그걸 봤다는 건 얘기하지 않아도 되겠지?
“거절하셨었구나……. 하기야 아가씨는 일편단심이셨으니까요.”
메리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아니, 왜 너가 입맛을 다셔?
“그러니 내가 그 사람과 잘될 일은 없어.”
그 말을 하는데 코코아가 썼다. 문득 오스카 후작의 얼굴이 떠올라서 그렇게 느낀 걸지도 모른다. 날카로운 가시덩굴을 연상케 한 기묘한 분위기.
굳이 오스카 후작이나 바일 대공이 아니더라도 에스티아의 짝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님 돈 많은 독신이 되는 거고.
에스티아는 남은 코코아를 쭉 들이마셨다. 원래 점심 먹고 바로 상단에 나가려고 했지만 며칠 동안 머리와 몸을 동시에 많이 썼더니 무척 피곤했다.
“메리, 나 1시간만 낮잠 좀 잘게. 그다음에 바로 상단으로 가자.”
“정말 그 정도면 되시겠어요, 아가씨? 더 쉬셔야 하는 건 아니고요?”
“응, 응. 괜찮아. 내가 너와 달리 강철 체력이거든.”
에스티아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메리는 그마저도 즐거운지 까르르 웃었다.
“네, 아가씨. 그럼 1시간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메리는 방에서 나갔고 에스티아는 침실로 들어가 푹신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잠에 들자, 그 생각들은 어느새 꿈으로 변했다. 그 꿈속에서 에스티아는 청혼을 받고 있었다.
방금까지 오스카 후작을 생각해서 그런 걸까? 아무튼 그 사람이 맞다면 거절해야 하는데. 에스티아는 진땀을 흘렸다. 에스티아는 자신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햇빛이 너무 강하게 내리쬐어서 남자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씨.”
좀만, 조금만 더. 점점 햇빛이 약해졌지만 남자의 코까지만 보일 뿐이었다. 에스티아는 결국 허리를 숙여 남자와의 거리를 좁혔다.
“……가씨!”
이 사람은…….
“아가씨!”
번쩍. 에스티아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방이 어두웠다.
“뭐야, 벌써 밤이……!”
에스티아는 말을 하다 멈췄다. 그리고 창밖 너머 흐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메리가 침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비가 오고 있었다.
‘오늘, 오늘이었어!’
“아가씨!”
메리가 허겁지겁 침실로 들어왔다.
“메리, 비가……!”
“비도 비인데, 손님이…… 손님이 오셨어요, 아가씨.”
“손님?”
에스티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메리의 얼굴이 창백했다.
“에이커 기사와…….”
“에이커 기사? 이번에 무슨 시비를 걸려고…….”
에스티아가 고개를 젓는데 메리가 에스티아 바로 앞으로 다가오더니 발을 동동 굴렸다.
“왜? 에이커 기사가 뭐라 그래? 또 무슨 사과 같은 거 하래?”
으휴, 그래. 까짓것 해 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차.
“그게 아니라…….”
메리가 에스티아의 두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바일 대공 전하께서 오셨어요.”
“뭐?”
누가 와? 에스티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대공 전하, 대공 전하가 오셨다고요, 아가씨!”
에스티아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의 폭포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는 날씨.
그 날씨를 뚫고 남주가 서브 여주의 집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