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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2화 (13/141)

12화 - 갑작스러운 방문 (1)

에스티아는 잠시 멍하니 메리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거의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시끄러운데 어떻게 그렇게 잠을 잘 수 있었는지 스스로가 신기할 정도였다. 에스티아는 자신의 예측이 맞았다는 거에 놀라면서도 두려워졌다. 아마 지금 여기저기서 난리가 났을 터였다.

“대공 전하와 기사는?”

“지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흠뻑 젖으셔서 급하게 난로를 떼었습니다.”

메리가 초조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잘했어, 메리. 가능하면 남자가 입을 만한 옷도 구해다 줄래? 담요도 갖다 드리고.”

“네, 아가씨.”

메리가 다시 빠른 걸음으로 침심을 나섰다. 메리가 자리를 비워 다른 하녀인 카린이 에스티아와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카린의 얼굴도 긴장일색이었다. 자기 주인을 그토록 경멸하던 대공 전하께서 이 집을 찾아왔다는 건 사용인들에게 갑자기 비가 온 것만큼이나 쇼킹한 뉴스였다.

카린과 에스티아가 응접실 문 앞에 멈추었다. 카린이 에스티아에게 신호를 보내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에스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 전하, 에스티아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카린이 한 3초 정도를 심호흡하고는 문을 열었다. 넓은 응접실, 기사 에이커가 문가에 서있었고, 대공은 난로 근처에서 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대공 전하.”

에스티아는 그를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런 다음 기사 에이커에게도 가볍게 목례를 했다. 지난번과 달리 에이커는 왠지 모르게 긴장한 듯 보였다.

대공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모습에 카린도, 에스티아도 숨을 흡 들이마시었다. 거장의 명화처럼 잘 다듬어진 얼굴에는 아직 빗줄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매혹적이어서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메리가 곧 담요와 옷을 갖다 드릴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오히려 말끔하게 차려입을 때가 더 상대하기 쉬웠다는 걸 에스티아는 깨달았다. 이상하게도 묘하게 흐트러진 지금 모습이 더 보기 힘들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셨을 텐데 이리 신경 써 주시니 면목이 없습니다.”

에이커가 부랴부랴 에스티아에게 말을 건넸다. 아마도 지난번에 실수한 걸 만회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에스티아는 어색하게 웃었다.

“잠시 낮잠을 자고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정이 없는 무미건조한 대공의 목소리가 에스티아의 귀를 찔렀다.

“네…… 피곤해서 잠시 낮잠을 자고 상단에 갈 예정이었어요.”

“영애께서 잠깐 주무신 덕에 길이 엇갈리지 않았군요.”

‘마치 네가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농땡이를 부리고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말처럼 들렸다. 다시 내쫓아 버릴까. 에스티아는 잠시 고민했지만 애써 그런 충동을 억눌렀다.

“그러게요. 갑자기 이리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에스티아가 새침하게 대답하며 소파를 가리켰다.

“앉으시죠, 전하.”

“소파가 더러워질 텐데요.”

녹색 눈동자가 에스티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영원히 쓸 물건도 아닌데요.”

에스티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맞은편으로 향했다. 대공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움직임은 절도 있으면서도 우아했다. 이런 관계로 만나지만 않았어도 연예인 보듯이 좋아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

노크 소리와 함께 메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담요와 수건을 먼저 가져왔습니다. 옷은 가주님께서 예전에 입으셨던 옷을 찾고 있는 중이에요.”

메리가 대공 쪽을 힐끔거리며 수건과 담요를 에이커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에이커가 수줍어하며 메리에게서 담요와 수건을 건네받았다.

“그럼 먼저 다과를 준비시키겠습니다.”

카린이 허리를 숙이고는 메리와 함께 응접실에서 나갔다.

에이커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반면 대공은 여유롭게 담요를 걸치고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옅은 색의 은발이 흐트러졌다.

에스티아는 그 모습이 못마땅하면서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걸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가 네 집이냐’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동시에 마음이 간질거려서 이 응접실을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아직 심장은 과거의 에스티아에 머물러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에스티아는 직감적으로 과거의 마음이 그녀의 몸속에 잠재하는 걸 느꼈다. 그를 놓지 못하는 진짜 에스티아의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아직 이 속에 존재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제대로 쳐내야지.’

에스티아는 속으로 다짐했다. 만약 꿈속에 진짜 에스티아가 나타나서 화를 낸다고 해도 그녀는 살기 위해서라도 대공을 버려야 했다.

“글레멘드 영애?”

에스티아의 표정이 안 좋자 대공이 그녀를 불렀다. 에스티아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지만 대답을 하진 않았다.

어쨌든 원작에서 자신의 목숨을 좌지우지했던 남자이니 잘 보여야 했다. 그리고 동시에 사적인 연은 끊어져야 했다. 즉 공적으로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되 사적으로는 딱히 특별한 일이 없어야 했다. 그렇게 하려면 상단의 상인으로서 성공을 하되, 마음이 없음을 제대로 표현해야만 했다. 그렇게 입이 닳도록 얘기하는 ‘증명’이라는 걸 기꺼이 해 주겠다, 이 뜻이었다.

“불편하십니까?”

아까보다는 감정이 살짝 실린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무뚝뚝한 음성이었다. 에스티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

“불편합니다.”

“아가씨…….”

에이커가 안절부절못하며 대공과 에스티아를 번갈아 보았다. 에스티아는 뭐가 문제냐는 듯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커의 눈빛이 거의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가주님도 안 계신 상황에서 집을 찾아오셨으니 제가 놀랄 만하지 않겠습니까? 혹시 이런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도 증명의 일환인가요?”

대공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에스티아에게 시선을 둘 뿐이었다.

“아직…….”

그러다 대공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시작도 안 했습니다.”

대공이 꼬던 다리를 풀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며칠 조용하시다고 제가 방심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참나.

“그래서 찾아오신 건가요? 이 날씨를 뚫고?”

에스티아도 지지 않고 날카롭게 말했다. 대공이 그런 그녀를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래서’였으면 제 저택으로 부르지, 제 발로 찾아오진 않았을 겁니다.”

하! 에스티아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헛웃음 흘렸다.

분위기가 얼어붙으려던 때 카린이 트레이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트레이 위에는 갖가지 쿠키와 차가 올려져 있었는데, 그동안 에스티아가 저택에서 먹지 않던 것들이었다.

에스티아가 고개를 갸우뚱하던 찰나 대공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왜 그러시죠?”

에스티아가 고개를 홱 돌리며 대공을 째려보았다.

“저한테 더는 마음 쏟기 싫다는 분이 제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준비를 해 주셨군요.”

아.

에스티아는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대공이 방문하면 사용인들이 대공의 취향대로 다과를 준비할 거라는 것을.

사용인들은 아직 에스티아가 그를 완전히 포기했다는 걸 모르고 있을 것이다. 설령 듣는다 할지라도 믿지 않을 것이고. 자그마치 11년을 좋아했으니까.

하기야 아무리 판타지 소설 속이라도 이 얼굴이 흔할 리가 없었다.

에스티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카린. 나가 봐.”

“네, 아가씨…….”

아무것도 모르는 카린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응접실을 나갔다. 에스티아는 쿠키를 그쪽으로 밀며 말했다.

“그래도 11년을 좋아했잖아요, 전하를.”

“……!”

그렇게 스타트를 끊을지 몰랐는지 대공의 눈빛이 흥미롭다는 듯 빛났다.

“사용인들이 저를 생각해 준 것뿐이에요. 또, 설령 전하가 아니더라도 손님의 기호에 맞게 준비를 해야 하는 건 기본적 소양이고요.”

이건 대한민국에서도 그렇단다, 이 자식아. 에스티아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그리고 설령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제가 전하를 포기하겠다고 벽보를 붙이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하지만 정 믿음이 안 가시거든 그렇게라도 할게요.”

차라리 그렇게 해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꽤 진심처럼 보이긴 하는군요.”

대공이 부드러운 동작으로 찻잔을 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진심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라고!

에스티아는 맘 같아서는 가슴을 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벽보는 되었습니다.”

뭐야, 설마 진담으로 받아들인 건가?

“대신 다른 걸 묻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그걸 묻기 위해 온 거고요.”

에스티아는 곧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눈치챘다. 지난 몇 주 동안 계획을 세우면서 잊지 않으려 했던 사실이 있다. 바로 그가 나라의 유일한 대공 전하이자 황실의 기사단장이라는 것.

그리고 기사단에는 기사이자 마법사들이 속해 있고 그도 마법을 다루는 기사였다. 그렇기에 주기적으로 비가 오기 전에 상단들은 약초를 구해 기사단에 유통시켜야 했다. 그 기사단장이 무려 에버하르트 바일 대공이었으니 상단들 입장에서는 더더욱 VVIP 고객인 셈이었다.

하지만 약초의 비축분이 충분히 마련되기 전에 비가 와 버렸다. 그것도 다른 왕국은 맑은 날씨인 와중에.

그런즉 그에게도 그것이 필요할 것이다.

바로,

“최근에 스퀘일러 상단과 약초를 구하러 다니셨다고 들었습니다.”

오케이, 예상대로다.

물론 스퀘일러 상단이 글레멘드 가문의 소속은 아니었기에 대공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약초를 구하면서 글레멘드 가문, 정확히는 에스티아가 스퀘일러 상단에게 투자를 했기에 상단이 약초 판매를 할 때는 에스티아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어떻게 이 우기를 예상한 겁니까? 신관도 예상하지 못한 것을?”

그렇기에 이렇게 바로 약초를 달라고……!

응? 잠깐만 그 말이 아니네?

묻더라도 약초를 달라는 말부터 할 줄 알았는데 대공은 다짜고짜 그것부터 묻고 보았다. 다행히 별로 당황하지 않고 답하려던 에스티아는 대공의 눈빛에 꺼내려던 말을 삼켰다.

뭐야. 저 눈빛, 저거 펜던트 눈빛인데.

“글레멘드 영애, 제가 묻잖습니까. 어떻게 알았냐고.”

그러니까 왜 또 그런 눈빛이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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