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 갑작스러운 방문 (2)
원작대로라면 약초가 다 비에 손상되어서 마법사들이 마력을 충당시키지 못해 왕국이 반란을 일으킨다. 남주와 여주는 물리적 상황에 가로막혀 자주 만나지 못하고 그런 상황에서 메르헨의 아버지 칼 셰린포드가 전쟁에 출전하게 된다. 즉 스토리 진행상 전개에서 위기로 치닫는 단계였다.
남여주가 크게 힘들어하는 구간이니 이번 기회로 그들에게 잘 보이고, 에스티아 글레멘드도 더 이상 악녀가 아닌 선한 인물로 살 수 있는 기회였다.
에스티아는 숨을 가다듬었다. 어떻게든 이 사람 앞에서는 항상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만 재수 없다고 자신까지 계속 재수 없게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는 인물 관계도고 나발이고 그냥 처형이니.
“요 며칠 날씨가 계속 흐려서 걱정이 되었어요. 그러니 저희 가문 소속의 마법사들이 걱정이 되더라고요.”
에스티아는 담담하게 말했다. 어차피 이상하게 볼 거 차라리 최대한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어차피 실연도 당했겠다 생각을 돌릴 거리도 필요했어요.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사교계에 나설 수도 없죠. 말했다시피 저도 더는 철면피처럼 굴기 싫어서요.”
에스티아로 산 지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녀의 마음에 동화라도 된 거 같았다. 지금도 진짜 에스티아가 이 상황이라면 얼마나 힘들지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지금 자신이 빙의하지 않았더라면 조금의 변화도 없이 이야기가 진행되었겠지. 에스티아는 계속해서 남주인공 에버하르트에게 집착하고, 그는 또 그녀를 외면하고. 결국 여주인공 메르헨을 죽이려고 하고.
오로지 남주인공과 여주인공만 행복해지는 결말이었다. 에스티아는 표정을 굳혔다.
에이커는 완전히 달라진 에스티아의 모습에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찻잔에 손만 갖다 댄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공작가의 영애가 되시는 분이 약초꾼처럼 이 산 저 산 돌아다니신 겁니까?”
다만 이건 확실했다. 성질머리는 에스티아와 비슷한 거 같다는 거.
차라리 바로 약초가 필요하니 달라고 했으면 주었을 것이다. 물론 값은 제대로 쳐서.
그런데 말을 해도 꼭 저렇게 밉게 할까?
‘어차피 인생 한 번인데 한 대 치고 뛰어!?’
“글레멘드 공작께서는 아십니까?”
에스티아는 그가 서늘한 목소리로 예상치 못한 이름을 언급하자 움찔했다.
‘뭐야, 나 지금 혼나는 거야?’
에스티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이 순간은 확실히 예상에는 없던 상황이었다.
자신이 했던 예상은 그가 에스티아의 마음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약초를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약초를 달라고 말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녀를 혼내고 있었다.
에스티아가 에이커 쪽을 힐끔 보니, 에이커도 당황한 듯 연신 대공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비가 올 거 같아 걱정이 되어 약초를 구하러 다녔다면 더더욱 전문가에게 맡기셨어야죠. 약초를 구하던 중에 비가 왔으면 어떡할 뻔했습니까?”
에스티아는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이 사람의 생각을 쫓아가기는 어려웠다.
“걱정은 감사드리지만, 제 안위가 전하한테 중요한지요?”
대공의 표정이 한층 더 싸늘해졌다. 에스티아는 지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도 영애를 걱정하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스퀘일러 상단은 바일 가문하고도 거래를 자주하는 상단입니다. 정확히는 영애가 아니라 상단을 걱정한 것이죠.”
마주 잡고 있는 대공의 손이 하얗다. 많은 상처가 손을 뒤엎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길고 하얀 손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든 전하에게서 벗어나려고 이 일을 시작한 거니까요.”
에이커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었다. 현재에 적응이 되지 않는 건 에이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물론 약혼자 ‘후보’로서요.”
에스티아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가문 대 가문으로서는, 대공 전하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대공의 표정은 묘했다. 화가 난 거 같기도 했고 재미있는 일을 발견한 사람처럼 흥미로워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먼 길까지 저택에 오신 연유를 알려 주실 수 있으실지요? 저희…… 아버지께서도 안 계신 상황에서.”
전생에서도 그랬지만, 여기서는 더더욱 ‘아버지’라는 말이 입에 붙지 않았다. 대공은 머뭇머뭇 움직이는 에스티아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래는 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없었겠지. 에스티아는 속으로 흥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업무 때문에 근처 마을에 들렀는데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더군요. 신전으로부터 비가 온다는 소식이 없었으니 잠시 오다 그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곧 폭우가 쏟아지더군요.”
긴 손가락이 찻잔 손잡이를 쥐었다. 곧 붉은 입술에 컵이 닿았다 떨어졌다.
“그때부터 큰 파란이 벌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장 빨리 해결책을 마련할 방법을 에이커와 상의한 결과…….”
옅은 녹색 눈동자가 에스티아에게 닿았다.
“영애가 떠오르더군요.”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에스티아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차를 마셨다. 저 말을 들으니 도저히 쿠키 쪽으로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마법사들에게 버지니아 약초는 물처럼 필요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갑자기 비가 왔고, 약초 수급에 어려움이 생겼죠. 언제까지 비가 올지도 알 수 없습니다.”
방금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날카롭지 않고 잔잔했다. 타닥타닥 타는 모닥불과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반면에 다른 왕국들의 날씨는 화창하죠.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지요?”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순수한 물음이었다. 에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란.
몬터레이 제국은 몇 백 년 동안 ‘칭제’를 해 오며 수십 개의 왕국을 다스리고 있었다. 몬터레이 제국은 여전한 권위를 누렸지만 다른 왕국이라고 해서 성장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들은 호시탐탐 자신들을 제국이라고 선포하여 칭제를 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니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마을에 있는데 최선책을 생각해 보니 글레멘드 영지가 제일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달려왔습니다.”
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아니, 이 사람은 갑자기 왔다는 말을 뭘 저렇게 고백처럼 해?’
이러니 에스티아가 좋아했나…….
그런 생각이 들자 에스티아는 갑작스러운 고민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혹시 ‘금사빠’였는지에 대하여.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몸이 에스티아인데 다시 좋아하기 시작하면 전처럼 집착할지 몰랐다.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수량은…… 저도 자세히 확인을 해 봐야 해요. 상단주님과 논의도 해야 하고요. 확인이 끝나면 대공 전하께 바로 먼저 알려 드릴게요.”
“예, 그럼 그때는 바일 대공작, 당신의 약혼자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대공의 말에 에스티아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황실 기사단장 에버하르트 바일로 찾아뵙겠습니다.”
옷은 축축한 데다 머리도 젖어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기품이 흘렀다. 에스티아는 시선을 피해 모닥불 쪽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시비를 걸 때가 나았다.
“물론 그때가 되면 혼자 착각하진 마시고요.”
……그렇다고 바로 이렇게 시비 걸라는 소리는 아니었는데.
“제가 왜 착각을 하나요?”
“다른 때보다 공손하게 대하면 ‘항상’ 착각을 하시더라고요. 제가 영애한테 마음이 있다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래도 방금보다는 확실히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다.
“혹시 더 하실 말씀은……?”
에스티아는 빨리 그와 헤어지고 싶은 마음에 마무리 멘트를 꺼냈다.
“더 드리고 싶은 말씀은…….”
대공의 눈빛이 진득하게 에스티아의 시선을 쫓았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메르…… 아니, 셰린포드 영애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여주님을 잠시 잊고 있었다.
마음이 왠지 모르게 씁쓸했지만 어떻게 보면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네, 그럼요. 제가 어떻게 셰린포드 영애를 도와드리면 될까요?”
에스티아는 일부러 더 밝은 톤으로 물었다. 대공의 눈이 그녀의 의중을 떠보는 듯 집요하게 그녀를 쫓았다.
“황실 기사단 다음으로 셰린포드 가문과 거래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황실 정예 병사나 기사는 아니지만, 전쟁에 자주 출전하는 셰린포드의 마법사들에게는 약초가 필요합니다. 또…….”
그가 답지 않게 주저주저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셰린포드 양이 몸이 많이 약한 건 아실 겁니다. 마나가 많이 약해져서 마법사도 그만두었지요. 영애께서 셰린포드 양을 잘 살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정말 저한테 더는 마음이 없다면요.”
마지막 말에는 평소의 비꼬는 말투가 그대로 실려 있었다.
“헌신하겠다,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면 그저 매혹적인 목소리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네, 약속했죠. 한번 제대로 지켜보세요.”
에스티아는 기죽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럼 제가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제 가라, 하는 투로 에스티아가 말했다.
그런데 대공의 표정이 묘했다.
“혹시 못 들으셨습니까?”
“네? 뭐를요?”
순간 불길한 느낌이 심장을 스쳤다. 그때 카린이 노크를 하고 응접실로 들어왔다.
“아가씨!”
“왜? 무슨 일이야?”
제발! 그냥 별일 없다고 해 줘!
“그게…….”
하지만 에스티아의 간절한 바람과는 다르게 카린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마찻길이 다 잠겼다고 합니다! 마차들이 거의 꼼짝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티아는 카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시선을 돌려 대공 쪽으로 눈을 돌리자 왠지 모르게 여유로운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대공 전하께서 저택에서 밤을 보내시고 가야 할 듯한데…….”
카린은 창백한 표정으로 에스티아와 대공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