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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4화 (15/141)

14화 - 갑작스러운 방문 (3)

에스티아는 딱딱하게 굳은 자세를 한 채 카린을 바라보았다. 카린은 도통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은 듯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결국 기사 에이커가 나서려고 할 때 메리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아가씨, 대공 전하와 에이커 경께서 입으실 여분의 옷을 찾았습니다.”

메리는 카린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에스티아와 대공을 곁눈질했다.

“그럼 저와 에이커는 옷을 갈아입으러 가겠습니다.”

대공이 왠지 모르게 여유로운 투로 에스티아에게 말했다. 에스티아는 그저 이 상황이 충격적이어서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대공 전하, 에이커 경,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메리가 능숙한 톤으로 두 남자를 안내했다. 응접실을 나가기 전 대공의 눈빛이 에스티아에게 머물렀지만 에스티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니 대공의 눈빛이 어땠는지는 당연히 보지 못했다.

* * *

에스티아는 여전히 얼이 빠진 채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 곁으로 카린이 총총 다가왔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카린이 허리를 숙이며 에스티아의 안색을 살폈다.

“응, 괜찮아…….”

그냥 느낌이 싸해서 그렇지.

약초를 구한 뒤, 메르헨과 에버하르트에게 잘 보이면서 적당히 거리를 유지할 방법을 열심히 고민했다. 그건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상인으로서의 자신의 가치를 높이되, 귀족 영애로서의 가치를 낮추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로셸이 저택을 비운 참이니 시기도 딱 좋았다. 물론 로셸이 어떤 업무 때문에 타국으로 갔는지는 몰랐지만.

그렇게 귀족 영애로서는 글렀다 소문이 돌면 로셸도 더는 자신을 그의 약혼녀로 미루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메르헨에게 ‘헌신’하면 에버하르트도 그녀를 조금이라도 인간적으로 대해 줄지도 모르고.

‘그런데 이게 웬걸? 남주가 우리 집에 있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왜 하필 에버하르트 바일은 글레멘드 영지 근처에 있었을까?

“카린.”

“네, 아가씨.”

“지금 모든 마찻길이 통제 불능이야? 정말 하나도…… 좀 정리된 길이 없어?”

에스티아가 허공으로 손을 휘저어가며 카린에게 물었다. 카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모든 소식이 들어온 건 아니지만 정말 카오스라고 해요……. 잠시 마을로 심부름을 나간 잭도 지금 못 오고 있어요.”

잭이라면 이 저택에서 일하는 남자아이였다.

“그럼 오늘은 어떻게 해? 잭은 괜찮은 거야?”

이곳 사용인들을 몇 주밖에 보진 못했지만 다들 따뜻하고 친절해서 벌써부터 정이 들던 참이었다. 에스티아는 어린 잭이 걱정되었다.

“다행히 심부름을 가는 김에 이모네를 간다고 했으니 거기서 묵을 수 있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다행이다.”

잭을 보면 전생에 두고 온 어린 동생이 생각나서 볼 때마다 왠지 모를 애틋함이 들었다.

“혹시라도 잭한테서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알려 줘.”

“네, 아가씨.”

카린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언제나 아가씨의 이런 성품이 좋았다.

“그리고 카린…….”

에스티아가 주저주저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럼 언제쯤 마찻길이 정리될까……?”

정리하자면 ‘저 싹수없는 대공 전하가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였다.

에스티아의 말뜻은 그랬는데 아무래도 카린은 다른 방향으로 이해한 것처럼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분간은 이 저택에서 꼼짝도 못 하실 거예요! 바일 저택으로 가는 마찻길이 완전 아수라장이거든요!”

“…….”

“아가씨……?”

해맑게 웃던 카린의 표정이 점점 당혹감으로 젖어갔다. 에스티아가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

에스티아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집인데도 마음 편히 지내지 못하게 생겼다. 어쨌든 같은 집에 있으니 저 혼자 또 어떤 오해를 할지 몰랐다.

“상단으로 가는 길은?”

“다행히 상단으로 가는 길은 며칠 내로 복구가 될 듯해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해서 대공 전하가 돌아갈 수 있는 길도 있겠네?”

에스티아가 반색하며 벌떡 일어났다. 카린이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그게…… 길 하나가 있긴 한데 마을 외곽에 있는 길이라 많이 돌아가야 해서 에이커 기사님께서 반대하셨다고 해요. 감히 대공 전하를 그런 길로 모실 수 없다고…….”

“전하께서는 그 의견을 받아들이셨고?”

“네…….”

에스티아는 몸을 떨었다. 아무리 큰 저택이라고 해서 대공과 하루 종일, 그것도 며칠 내내 같은 집에 있을 순 없었다.

‘피해야 해…….’

“지금 대공 전하는?”

“씻고 계실 겁니다. 비가 와서 목욕물을 받아 놓았거든요.”

“그래? 잘했어.”

에스티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바로 화들짝 놀랐다.

“저녁은 당연히 대공 전하와 함께하시죠?”

“뭐라고?”

에스티아가 펄쩍 뛰었다. 그 맛있는 밥을 대공과 같이 먹어야 한다고?

“카린…… 어쨌든 내가 이 가문의 영애인데, 저녁때 그분을 대접하지 않으면 굉장히 무례한 걸까?”

“네?”

안 그래도 컸던 카린의 눈이 더 커졌다.

“그야 그렇긴 한데…… 혹시 속이 안 좋으시…….”

“응! 속이 안 좋아!”

에스티아는 카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답했다.

“어…… 그니까 열이 아주 펄펄 끓는다고 해! 이 무례는 언젠가 꼭 갚겠다고!”

사실 마음 한편에서는 오히려 대공도 그쪽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토록 싫어하던 에스티아의 집에 머무는 것도 싫을 텐데 그녀와 밥이라니.

차라리 자리를 피하는 게 대공한테 더 잘 보이는 걸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합리화한 에스티아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카린, 그렇게 대공 전하께 전해 줘. 난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을 테니까.”

“네? 그럼 저녁은요, 아가씨?”

카린이 깜짝 놀라며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괜찮아, 지금은 밥을 먹을 때가 아닌 거 같아.”

안 그래도 그 남자와 같이 밥 먹을 생각하니 밥맛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에스티아는 카린이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응접실을 나섰다. 다행히 이제 저택 내부의 길은 꽤 익숙해진 상태였다.

에스티아는 인사를 하는 사용인들에게 열심히 인사를 건네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러자 곧 익숙한 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에스티아는 깊은 안도감을 느끼며 방으로 들어갔다.

덕분에 대공이 어느 방에 머무는지는 알지 못했다.

* * *

대공은 눈앞에 차려진 음식들을 무감정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곳 사용인들이 얼마나 힘을 주고 만든 음식들인지는 알지만 한평생을 대공작의 후계자이자, 대공작으로서 살아온 그로서는 그저 일상적인 음식들이었다. 물론 에이커의 눈은 휘둥그레졌지만 말이다.

대공이 수프를 한 스푼 떠먹자 그제야 에이커도 애피타이저를 먹기 시작했다. 주군 앞이라서 애써 천천히 먹으려는 게 보였지만 잘 안 되는 듯했다. 에이커의 그릇은 벌써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반면 대공은 몇 숟갈 뜨지 않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사용인들이 기민하게 눈치채고 애피타이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에이커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전하?”

글레멘드 최고 주방장이 그의 옆으로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대공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맛있었어. 단지 입맛이 없어서 그런 거니 신경 쓰지 말게.”

대공의 어투는 딱딱했지만 말 자체는 다정했다. 주방장은 고개를 숙이며 사라졌고, 그 뒤로 사용인들이 메인 디시를 가져왔다. 에이커의 눈이 다시 초롱초롱해졌다.

에이커는 사실 자신의 주군이 기분이 언짢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식당에 들어오고 나서부터였던 거 같다. 설마 에스티아가 없어서 그런 걸까? 하지만 오히려 에스티아가 없으니 더 잘 드셔야 하는 건 아닌가? 정말 입맛이 없으신 건가. 에이커는 열심히 메인 디시를 먹으며 주군의 취향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대공은 메인 디시는 물론 그 뒤에 나온 디저트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글레멘드의 사용인들은 연신 대공의 눈치를 살폈지만 에이커는 그저 오늘 주군의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런 거겠거니 생각했다. 그는 큰 걱정거리가 있으면 밥을 잘 넘기지 못했으니까.

반면에 자신은 너무 싹싹 비운 게 민망했던 에이커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용인과 함께 그의 뒤를 따랐다.

“에이커.”

“네! 전하!”

그저 그의 뒤를 따라 걷던 에이커는 갑자기 대공이 자신을 부르자 화들짝 놀랐다.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갈 테니, 자네는 자네 볼일을 보도록 해.”

“네? 하지만…….”

“혼자 생각할 거리가 있어서 그러니까.”

가는 길은 이미 외워 두었어. 그는 이 저택의 사용인에게 말을 건네고는 걸음을 옮겼다.

에이커와 사용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실제로 대공의 머릿속은 여러 생각들로 복잡했다.

방으로 돌아간 대공은 한동안 책상 앞에 앉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아까 혼자 걸으면서 우연히 들었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사용인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였다.

-아가씨, 신관 하셔도 되겠어.

-그러니까. 계속 비가 올 거 같다고 하셨다면서?

-아냐, 아예 제인한테는 비가 올 거라고 확신까지 하셨대.

대공은 결국 침대로 가지 못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시간은 어느새 오전 12시로 향해 가고 있었다.

글레멘드 저택은 여전히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흘렀다. 어렸을 적에는 이 저택에 오는 걸 참 좋아했었다. 물론 그때 이후로 한 번도 온 적이 없었지만.

그렇게 다시는 올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대공은 쓰게 웃었다. 그놈의 비가 원수지. 그는 그저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저 비 때문. 그렇게 생각하던 대공은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복도 너머로 누군가 걷고 있었다.

하늘하늘한 하얀색 파자마가 모퉁이 너머로 끝을 흔들며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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