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 악몽
에스티아는 꿈이 싫었다. 특히 과거에 기반한 꿈은 다시금 그때 느꼈던 감정을 현재에 새기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에스티아는 작은 하늘색 파자마를 입은 채 어딘가로 급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복도를 분주하게 오가는 사용인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것이 에스티아의 불안감을 더 부추겼다.
에스티아는 문 앞에 섰다. 어른 키만 한 문이 그녀한테는 너무 거대했다. 에스티아는 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애써 달려왔건만 막상 문 앞에 도착하니 두드릴 힘이 나지 않았다. 방의 주인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에스티아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이를 본 사용인들은 그녀 곁에 서서 안절부절못했다. 예민하고 연약한 아가씨가 혹시나 쓰러질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아무도 함부로 그녀를 위로하지 못하던 그때, 작지만 강한 손이 에스티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티아.
미성의 맑은 목소리.
에스티아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아버지조차 부르지 않는 그녀의 애칭을, 다정히 부르는 사람을.
어리고 어렸던 팔. 그때는 무엇보다도 든든했었다.
그런데 누구지? 누구…….
-악마.
에스티아는 몸을 덜덜 떨었다. 다정했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싫어, 당신이 너무 싫어.
-…….
-끔찍해.
헉.
에스티아는 눈을 번쩍 떴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에스티아의 손이 잘게 떨렸다. 공부하기 위해 펴 놓은 약초 책에는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악몽을 꾼 모양이었다. 전생의 기억은 아니니 아마 에스티아의 기억이리라.
착각이 아니라면 방금 그 목소리는…….
에스티아는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비가 쏟아져 내리고 천둥이 치고 있었다. 흠칫흠칫 놀랄 만큼 큰소리였다.
에스티아는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찰싹 때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꿈같지가 않았다. 방금 겪었다고 믿을 정도로 생생한 느낌이었다.
“당신이 끔찍해…….”
기억이 맞다면 그는 대충 이런 식으로 말했다. 비수를 꽂는 차가운 목소리. 오래 생각할 필요 없이 바로 그 사람의 목소리였다.
에스티아는 이마를 짚었다. 트레이에 놓인 유리컵에 물을 따라 마시니, 차가운 기운이 몸속에서 퍼져 나갔다. 에스티아는 개운하다는 듯 허공으로 숨을 뱉어 냈다. 시원한 물을 마시니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에스티아는 눈을 비비고는 다시 책에 집중했다.
시계의 시침은 9시를 지나 어느 덧 12시를 향해 갔다. 중간중간 메리가 왔다 가긴 했으나 에스티아는 거의 요지부동으로 공부에 열중했다. 약초 말고도 여전히 공부할 게 많았다.
에스티아는 기지개를 켜며 크게 하품을 하다가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피곤하기도 했지만 역시……
‘배고파.’
역시 한국인의 피가 남아 있나. 저녁 한 번 안 먹었다고 배에서 아주 요동을 쳤다. 하지만 이제 거의 자정이었고 사용인들도 한참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사용인들을 깨워 간단한 요깃거리를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차마 미안했다. 갑작스러운 비로 안 그래도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냥 내가 알아서 먹으면 되지 않나?’
어차피 거하게 먹을 생각도 없었다. 그냥 따뜻한 커피와 빵 한 조각이 먹고 싶었다. 이제 집 내부도 빠삭하게 외웠겠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에스티아는 책에 책갈피를 꽂아 넣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 방의 빛이 복도로 쏟아졌다. 작은 촛불은 어두운 복도에서는 태양같이 빛을 쏟아 냈다. 에스티아는 촛대를 의지하며 어두운 복도를 걸어갔다.
‘이럴 때 전기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아, 21세기여…….’
에디슨처럼 천재였다면 뭐라도 발명해 냈을 텐데. 괜히 아쉬웠다. 물론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조금 어두워서…… 어두워서 그렇지.
에스티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레 걸었다. 갓 지은 저택처럼 깔끔한 저택이었지만 비에 천둥소리까지 겹치니 괜히 을씨년스러웠다.
번쩍.
에스티아는 창밖에서 불빛이 번쩍이자 몸을 움찔했다. 비는 그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야흐로 긴 우기의 시작이었다.
에스티아는 걷는 속도를 높였다. 한가로이 자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약초에 대해, 이 세계에 대해 공부해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러려면 속을 든든히 채워 넣어야 했다.
5분 정도를 더 걸었을까. 부엌으로 통하는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에스티아는 총총 문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그리고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철컥.
응?
철컥철컥.
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에스티아는 자신의 이마를 찰싹 쳤다. 부엌의 문이 잠겨 있을 거라는 당연한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바보인가?’
하……. 괜히 불편하다고 피했다가 밤새 쫄쫄 굶게 생겼다. 그렇다고 사용인들을 깨워 열쇠를 달라고 하기에도 미안했다. 에스티아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번쩍.
“악!”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는 자기 목소리에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들은 사람은 없는 듯했다.
에스티아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이번에는 제대로 소리를 질렀다.
에스티아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앞에 형체에 저도 모르게 놀라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
아?
덜덜 떨던 에스티아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눈이 어둠에 점점 더 익숙해지자 상대의 얼굴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아! 진짜!”
에스티아는 서 있는 상대를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놀랬잖아요! 왜 거기에 계시는 거예요!”
천둥이 다시 내리쳤다.
에스티아는 멀거니 서 있는 대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대공인 건 알아볼 수 있었으나 대공의 표정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에스티아는 씩씩거리며 대공을 노려보았다.
그런 에스티아를 향해 대공이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에스티아는 순간 저 손을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여기서 처내는 것도 아닌 거 같아 그의 손을 잡았다.
차갑지만 부드러운 손이었다. 긴 손가락이 에스티아의 손을 부드럽게 감싼 채 끌어당겼다.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던 에스티아는 순간 무게 중심을 잃고 앞으로 넘어졌다. 그러자 넓은 가슴이 머리에 닿았다. 에스티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차례대로 하얀 턱, 매끄러운 뺨, 오뚝한 코, 그리고…….
눈이 보였다. 그 안에 에스티아가 가득 담겼다.
에스티아는 차마 밀어낼 생각도 못 하고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문득 꿈속에서 그녀를 악마라고 부르던 남자가 생각났다. 어쩌면 같은 눈동자일지도 모른다고, 에스티아는 생각했다.
* * *
결국 에스티아는 근처 방에 있던 부엌 담당 하녀의 도움을 받아 부엌 열쇠를 얻었다.
그렇게 대충 빵 같은 걸로 때우려고 했는데 하녀는 대공 전하의 명을 받아 에스티아가 나중에 먹을 음식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고 말했다.
‘대공은 내가 야식 먹을 거라는 걸 예상이라도 한 걸까?’
찝찝했지만 하녀를 깨운 게 미안해서라도 에스티아는 눈앞에 놓인 음식을 열심히 먹었다.
“맛있습니까?”
물론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는 여전히 반갑지 않았지만.
“네, 맛있네요. 아까는 왜 속이 안 좋았는지 모르겠어요.”
에스티아는 부드러운 고기를 입에 넣으며 대답했다.
“불편한 일이 있어서 그랬나 봐요.”
에스티아는 싱긋 웃었다. 대공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나른한 표정이었다. 왜 당신이 굳이 지금 여기에 앉아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야밤에 입씨름하고 싶진 않았다.
“영애야 언제나 그러시죠.”
언뜻 들으면 다정하게 들렸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제 주변에 하녀 한 명만 서 있어도 기함을 하셨으니까요.”
“앞으로 그럴 일 없을 거라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요.”
에스티아가 이를 악문 채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거야 앞으로 증명해 주셔야 할 부분이고요.”
“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대로 해낼 테니까.”
에스티아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로 말했다. 당당해 보이려고 그런 거였는데 오히려 대공이 더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글쎄요. 그렇다 보기에는 별로 안 변하신 거 같아서요. 전에도 밥을 거르면 꼭 야식을 드시러 나오셨죠.”
“습관이랑 마음은 별개죠.”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에스티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관리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요?”
에스티아는 평온한 표정을 가장하며 대화 주제를 바꿨다. 내심 대공이 에스티아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있었죠. 전에 무작정 제 집에 찾아오신 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도 저한테 소리치신 뒤, 저녁을 드시지 않더니…….”
대공이 찻잔에 든 차를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밤에 혼자 빵을 드시고 계시더군요. 저희 저택 식당에서요.”
대공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에스티아는 입을 다물었다. 대공은 에스티아를 잘 아는 게 아니었다.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뿐이지.
“그랬군요……. 그래서 일부러 사용인들을 시켜 식당에 음식을 두게 하신 건가요? 제가 또 내려올 거라고 생각하시고?”
그래서 에스티아도 딱딱하게 물었다. 대공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때도 울고 계셨거든요. 배가 많이 고프셨는지.”
대공의 입가에 삐뚠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에스티아는 바로 알아차렸다. 그가 에스티아의 사랑을 비웃고 있다는 것을.
“왜 그랬을까요, 제가. 바보같이.”
에스티아는 쓰게 웃었다. 대공의 표정에 다시 미세하게 금이 갔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그게 무엇 때문이든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다시는 사적인 감정으로 바일 가문의 저택을 방문하는 일도, 전하 앞에서…… 우는 일도 없을 거예요. 다시는.”
에스티아는 마지막 말에 강세를 두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은 시간에 같이 시간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더는 이렇게 저를 배려해 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안 그러면…….”
에스티아의 검청색 눈동자가 옅은 녹색 눈동자에 닿았다.
“제가 또 착각할지도 모르니까요.”
에스티아는 그 말을 끝으로 가볍게 인사를 하고 식당을 나갔다.
식사하는 소리가 사라지자 식당은 지독한 정적이 자리 잡았다. 에버하르트는 차를 마셨다. 에스티아가 좋아하는 차였다.
“또…….”
찻잔 바닥에 가루가 둥실 떠다녔다. 자신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차였다.
“또…….”
에버하르트는 말끝을 흘렸다. 그리고 에스티아가 앉았던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또, 거짓말하네.”
찻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쩌적. 잔에 미세한 금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