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포기하겠다고?
마찻길은 복구가 되는 데 한참이 걸렸다. 그나마 몇몇 귀족들 말고는 사용하지 않는 길, 애초에 붐비지 않았던 길은 다행히 복구가 되었지만 다른 길들은 달랐다. 귀족들뿐만 아니라 평민들도 많이 사용하는 마찻길은 길이 잠긴 걸 포함해서 사고 현장을 수습하느라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그래도 웬만하면 에스티아는 대공을 집에서 내보내고 싶었다. 다른 귀족의 집으로 보내건 아니면 그가 머물 수 있는 곳을 찾아서라도.
그런데 대공은 그런 언급 없이 입 꾹 닫고 글레멘드 저택에 머물렀다. 손님인 데다가 대공에게 다른 데로 가는 건 어떻겠냐 권유할 수는 없어서 에스티아는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다행히 스퀘일러 상단으로 가는 길은 수습이 된 상황이었다. 에스티아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간단히 식사를 하고 상단으로 출근했다. 대공이 몇 시에 일어나든 그녀가 알 바는 아니었지만 혹시라도 마주칠까 봐 겁…… 아니, 그냥 싫었다.
그날도 에스티아는 간단히 빵과 커피를 마시고 방을 나서고 있었다. 그러다 옆방에서 나오는 누군가와 마주쳤다.
“윽.”
처음에는 누구인지 직감적으로 알 거 같아서 탄식을 내뱉었다가 나중에는 감탄스러워서 탄사의 의미로 내뱉었다.
방에서 나온 인물은 예상대로 대공이었다. 근데 처음 보는 복장이었다. 평상시의 정장 차림이 아니라 멀끔한 제복 차림이었다. 검정색 제복에 노란색 넓은 띠가 상체를 비스듬히 가로지르고 있었다. 백은발 머리는 평소처럼 깔끔하게 뒤로 넘긴 채였다.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헤벌레 하고 벌렸다. 살아생전 이런 비주얼을 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아가씨.”
메리가 에스티아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어서 정신 차리라는 의미였다. 에스티아는 그제야 민망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상단으로 가십니까?”
대공은 인사 없이 제복을 매만지며 에스티아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이런 그녀의 반응이 익숙한 모양이었다. 에스티아는 더욱 무안해졌다.
“네, 그럼 대공 전하는……?”
에스티아는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던졌다.
“기사단이요. 훈련을 진행하기 전에 뵐 분이 있어서요.”
“아, 네. 제복은 어떻게 가져오셨어요?”
“다행히 황궁으로 가는 길은 복구가 금방 되어서 궁에 마련해 둔 여분의 제복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에스티아가 인사를 하고 지나치려는데 대공의 말이 그녀를 붙잡았다.
“마침 가는 길이 같군요.”
“네?”
에스티아는 펄쩍 뛰어올랐다.
“어디 가시는데요?!”
“스퀘일러 단주님과 논의할 게 있습니다. 같이 가시죠.”
“…….”
에스티아가 벽 쪽으로 바짝 붙으며 경계의 눈빛을 띄었다. 그걸 본 대공이 피식 웃었다.
“마음이 없는 걸 증명하시겠다더니 저와 함께 있는 게 긴장되십니까?”
“아니요!”
에스티아는 자기도 모르게 울컥하여 소리 지르듯 대답했다. 대공은 여유롭게 웃으며 앞으로 손을 뻗었다.
“제 마차로 함께 가시죠. 그 편이 같이 가기 편할 겁니다.”
“네.”
에스티아는 한숨 쉬듯 대답하며 대공의 뒤를 따랐다. 눈앞에 대공의 뒷모습이 보였다.
cm로 따지자면 거의 190cm는 될 거 같은 큰 키였다. 어깨도 넓어서 큰 복도가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에스티아는 멍하니 등을 바라보며 걷다가 어느새 현관 앞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여전히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사용인들이 우산을 씌워줬지만 비가 너무 많이 오는 탓에 벌써 옷이 절반이 젖어 버렸다. 에스티아는 메리의 팔을 꼭 붙잡고 마차로 향했다. 비가 내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곧 검은색의 큰 마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차는 거의 집 한 채 수준이었다. 신데렐라에 나오는 마차도 이것보다 크고 화려하진 않으리라. 에스티아는 마차의 크기에 놀라 다시 한번 경악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대공이 손을 내밀었다.
에스티아는 그 손앞에서 다시 주저했다. 그러다 용기를 내 큰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대공의 손은 부드럽게 그녀를 리드했다. 에스티아는 마차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마차 안은 정말 여러 사람이 여유롭게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지만 대공이 들어오는 순간 좁게 느껴졌다. 에스티아는 창문에 바싹 붙어 앉았다. 대공이 자리에 앉아 신호를 보내자 마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추우십니까?”
대공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에스티아는 고개를 저었지만 살짝 몸이 떨리긴 했다.
여름이니 아무리 바람이 많이 분데도 춥기보다는 습한 편이었지만, 여름치고는 쌀쌀한 편이었다. 갑작스럽게 내린 비는 초봄의 선선한 날씨를 데리고 왔다. 검은색 로브를 걸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몸이 떨렸다. 아무래도 에스티아는 추위에 약한 모양이었다.
그때 대공이 의자 밑 손잡이를 당기더니 그 안에서 보라색 담요를 꺼냈다. 왠지 모를 익숙함에 담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스티아는 그 색깔이 메르헨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걸 알아차렸다.
“덮으세요.”
대공이 담요를 에스티아에게 건넸다. 그 모습에 왠지 심통이 난 에스티아는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춥지 않아요.”
“애써 바르신 입술인데…….”
흠칫. 에스티아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지워졌나 봅니다. 그사이에 하얗게 질리셨네요.”
에스티아는 다시 한번 이 사회가 신분제 사회라는 게 한탄스러웠다. 그냥 덮으라는 말을 꼭 저렇게 시비 걸듯이 해야 하는 걸까?
에스티아의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결국 열리지 않았다. 에스티아는 한숨을 내쉬며 담요를 받았다.
“전하께서는 괜찮으신지요?”
“이것보다 더한 날씨에서 전쟁을 한 적도 있습니다. 전 아무렇지 않아요.”
그렇게 말한 대공은 에스티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저렇게 쳐다보나 의아해하던 에스티아는 곧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 어깨에 담요를 둘렀다. 그제야 대공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담요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무척이나 커서 에스티아의 온몸을 덮고도 남았다.
몸은 노곤해졌지만 에스티아의 머릿속은 어떤 단어 때문에 사이렌을 울리고 있었다.
전쟁. 책을 끝까지 읽지는 않았지만 왕국들의 반란으로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다는 건 기억하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한다면 불안한 전시 상황 속에서 살기는 싫었다.
“전하.”
에스티아는 담요 끝을 한 손으로 잡은 채로 대공을 불렀다. 대공이 고개를 돌렸다.
“약초에 대해 논의를 하려고 상단에 가시는 것이지요?”
“예, 수량에 대해서는 대충 영애한테서 들었으니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유통시킬지 자세히 얘기를 해 보아야지요. 그렇다면 영애는?”
“집에만 있기 불안해서요.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며 불안해하는 것보다는 제가 하고 싶은 거 하려고요.”
“그게 상단에서 일하는 겁니까?”
대공의 눈빛이 반짝였다. 왠지 또 그 눈빛이 등장할 기세라 에스티아는 벽에 더 바짝 붙었다.
“네. 가식적인 사교계 생활보다는 이쪽이 훨씬 좋아요.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거 같아 보람도 느끼고요. 더는 절 불행하게 만드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대공의 눈빛이 조용히 번뜩였다.
“귀족 영애로서의 삶을 전부 포기하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저는.”
에스티아는 대공 쪽으로 고개를 탁 틀었다.
“따뜻한 곳에서, 맛있는 빵 먹으면서 살면 오케…… 아니, 좋습니다. 여기저기 눈치 보면서 사는 건 이제 지긋지긋해서 안 할 거예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소설이고 뭐고 다 떠나서 순수한 바람만이 에스티아의 마음속에 가득했다. 전생에서는 춥고 외로운 곳에서 딱딱한 빵을 먹으면서 지냈으니, 이곳에서는 사랑받으면서 맛있는 빵을 잔뜩 먹으며 살고 싶다.
그 인생에서,
‘당신은 필요 없어.’
“글레멘드 영애.”
갑자기 또 이름은 왜 부른대?
“네, 전하.”
“이제 시작입니다.”
“뭐가요?”
에스티아는 그의 눈빛에 움츠러들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증명 말입니다.”
대공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이제 막 시작하셨다고요.”
여전히 그냥 언뜻 들으면 자상한 목소리였다.
“네, 뭐. 앞으로 제대로 증명해 보겠습니다.”
열 받으니 원래 말투가 나왔다. 에스티아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탁 쳐들었다.
두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 * *
“어서 오세…… 어? 전하?”
카운터에서 뭘 들여다보고 있던 에팅이 에스티아가 대공과 함께 들어오자 화들짝 놀랐다.
“어…… 전하와 같이…… 오시네요? 어서 오십시오.”
에스티아만 들어오는 줄 알았던 에팅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그게 그냥 우연히 마주쳤어.”
차마 같은 집에 있다고 할 순 없어서 에스티아는 대충 둘러댔다. 대공의 눈빛이 짙어졌다.
“상단주님은?”
“아, 지금 잠깐 약초 창고로 가셨어요. 아가씨도 아시다시피 지금 온 나라가 뒤집어져서…….”
에팅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에스티아는 에팅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잘될 거야, 에팅. 같이 잘 이겨 내자.”
“네, 아가씨. 상단주님 사무실로 먼저 올라가 계시면 제가 차를 갖다 드리겠습니다. 그니까 저…….”
에팅이 대공을 힐끔 바라보았다.
“두 분이 같이…… 올라가시는 거죠?”
“응, 그런 셈이지…….”
에스티아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가실까요?”
에스티아가 대공의 시선을 피하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냥 자리를 비켜 주길 바랐는데 대공은 천천히 에스티아의 뒤를 따라왔다.
스퀘일러 상단주의 사무실은 점점 더 서류와 약초들이 쌓여 갔다. 에스티아는 한숨을 내쉬며 서류들을 들여다보았다. 갖가지 용병단과 기사단, 귀족 가문에서 온 의뢰서들이었다.
에스티아가 들고 온 작은 수첩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거기에는 갖가지 정보들이 적혀 있었다.
‘하, 어디서부터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이 세상에서는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까.’
“영애…….”
에스티아의 귓가에 대공의 목소리가 닿았다.
“네?”
“역시 알고 계셨던 거지요?”
“……!”
“비가 올 것이라는 것을.”
대공의 눈빛은 은은했지만 강렬했다. 에스티아는 그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창고에서 처음 봤을 때 보았던 그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