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추궁
비가 올 때면 키 큰 소년이 어린 소녀에게 우산을 씌워 준 장면이 떠오른다. 다정한 미소, 따뜻한 눈빛. 어린 나이에도 그것만 있다면 전부를 가진 기분이 들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인생이 더없이 찬란하게 빛날 거라는 걸 그녀는 확신했다.
메르헨은 자신의 앞에 놓인 편지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30분 동안 무슨 내용을 쓸지 고민했지만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어떤 말을 써야 할지 고민이 됐다.
메르헨은 항상 그랬다. 그의 앞에서는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루 만에 만나도, 몇 시간 만에 만나도 메르헨은 그의 앞에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고는 했다. 그러면 그는 언제나 웃는 얼굴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곤 했다.
메르헨은 가슴에 두 손을 모았다. 단지 편지지를 앞에 두었을 뿐인데 실제로 그를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떨렸다. 어떤 달콤한 말부터 먼저 쓰지, 그런 행복한 고민이 들었다.
“에버하르트…….”
하지만 곧 그녀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고개를 내밀었다. 며칠 동안 에버하르트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바쁘더라도 간단하게나마 편지를 써서 보내던 사람이었는데, 며칠 동안 편지 하나 없었다. 아무리 갑자기 폭우가 와 웬만한 길이 다 막혔다고 해도 이상했다.
저택의 하녀를 그의 저택으로 보내 소식을 알아오게끔 했지만 애간장이 타서 결국 편지를 보내기로 결심하던 차였다. 메르헨은 예쁜 보라색 편지지를 꺼내 앞에 놓았지만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차라리 그냥 내가 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녀의 에버하르트라면 그녀가 갑자기 찾아간다고 해도 화내지 않을 게 분명했다. 오히려 왜 먼 길을 왔냐며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 주겠지.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어.’
복구된 길을 골라서 그의 저택으로 가면 될 일이었다. 괜히 체면을 차리려다가 시간만 지체된 거 같아 메르헨은 자기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결국 줄을 당겨 하녀를 부르려던 그때, 누군가 메르헨의 방문에 노크를 했다.
“아가씨.”
“들어와.”
어차피 나갈 준비를 하려던 참이라 메르헨은 바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하녀가 방으로 들어와 메르헨에게 허리를 숙였다.
“아가씨, 러트가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러트라면 메르헨이 어제 바일 가문으로 보낸 하녀였다. 메르헨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전하께서 뭐라고 하시든? 편지는 얼마나 써 주셨어?”
“아, 그게…….”
그런데 하녀의 표정이 안 좋았다. 불길함을 느낀 메르헨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 갔다.
“그게, 아가씨. 대공 전하께서는 저택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뭐?”
메르헨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러트가 어제저녁쯤에 바일 저택에 도착해서 새벽쯤 저택에서 출발하였는데, 그때까지도 전하께서 오시지 않았다고 해요.”
“훈련 때문에 바쁘신 거야?”
“러트도 그렇다고 생각하고 사용인에게 그런 거냐고 물었는데, 오히려 훈련은 갑작스러운 폭우 때문에 잠시 쉬고 있다고 해요. 훈련을 할 건물과 천막을 마련하느라고요.”
하녀가 메르헨의 표정을 보고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래서 지금 전하는 어디 계시는데?”
메르헨이 가시가 돋친 목소리로 물었다. 하녀의 표정이 점점 울상이 되었다.
“러트가 백방으로 수소문한 결과 그…… 스퀘일러 상단에 가셨다고 해요. 아무래도 버지니아 약초 건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메르헨은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래, 마력에 필요한 버지니아 약초는 비에 아주 치명적이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약초를 구하기가 힘들어졌으니 기사단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많았을 것이다.
‘아니면 아예 꿍꿍이가 있거나.’
메르헨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마차 준비해. 바로 스퀘일러 상단에 갈 거야.”
“아, 근데…….”
“근데, 왜.”
메르헨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하녀의 표정이 더욱 울상이 되었다.
“지금…… 혼자 계시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동행하시는 분이 있으시다고…….”
“동행?”
메르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네, 그…… 글레멘드 아가씨와 함께 계신다고 해요.”
모르겠다. 이미 뱉어 버렸다. 하녀는 자신에게 떨어질 매서운 화풀이를 각오했다. 주인은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던지기 쉬운 물건부터 집어 들곤 했으니까.
메르헨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역시 편지나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메르헨은 하녀를 바라보았다.
하녀는 자신의 주인이 화를 내지 않고 도리어 천사 같은 표정을 짓자 더욱 긴장했다.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러스, 마차 준비해.”
“네?”
“방금 말했잖아.”
메르헨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퀘일러 상단에 가야겠다고. 못 들었어?”
* * *
미움을 동반한 관심은 결국 조롱과 경멸로 이어졌다. 29년 동안 살면서 뼈저리게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철저히 외롭더라도 미움을 받을 바에는 차라리 관심을 주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더더욱 대공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 같다. 단순히 원래 에스티아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앞으로의 그녀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대공의 태도가 이상했다. 뭐라 딱 설명하긴 어렵지만 대공이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벌써부터 사망 플래그가 선 건가?
에스티아는 바싹 긴장했다. 어떻게 약의 비축분을 미리 마련해 놓을 수 있었는지, 그게 궁금하고 의문이 들 수는 있었다.
그런데 저 형사 같은 태도는 뭐람? 에스티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긴장이 사라지고 대신 경계심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
“또 그런 말씀을 하시네요. 제가 신관도 아닌데 어떻게 그걸 알았겠어요.”
왠지 모르게 앙칼진 말투에 대공도 얼굴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보려고 한 건 아니지만 적어 놓으셨네요. ‘대략 6월 말부터 긴 우기가 올 예정.’”
대공이 고갯짓으로 에스티아의 수첩을 가리켰다. 에스티아가 화들짝 놀라며 수첩을 덮었다. 일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다 보니 방심하고 말았다.
“이건 그냥 이것저것 적어 놓은 것뿐이에요.”
이렇게 작은 글씨를 어떻게 보았을까. 에스티아의 이마에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저택 하녀에게는 왜 비가 올 거라고 확신하듯이 말씀하셨습니까?”
아. 에스티아는 속으로 탄식을 흘렸다. 하녀에게 장난식으로 가볍게 털어놓은 것이 이 대공에게 흘러들어갈지는 몰랐다.
“그런 말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했다면 그저 장난식이었겠죠.”
“과연 장난이었을까요.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철두철미하게 준비하셨던데요. 약초뿐만 아니라 저택 관리도.”
“…….”
“마치 비가 올 걸 미리 안 것처럼 작물은 쓰러지지 않게 조치를 해 두었고, 허름한 창고는 미리 비가 새지 않도록 고쳐 놓았더군요. 이래도 모르셨다고 할 겁니까?”
에스티아는 할 말을 잃었다. 잠시 머무는 새에 그런 것까지 살펴봤다는 게 놀라웠다.
아마 어정쩡한 변명만 하면 이야기만 길어질 거 같았다. 에스티아는 결국 모호하게 대답하는 걸 택했다.
“전하께서 이해가 가지 않으시는 것도 당연하지만 섣부른 추측으로 저를 몰아붙이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도 아직은 글레멘드 공작 영애거든요.”
“아직은?”
“전하! 아가씨!”
대공이 본격적으로 그녀를 추궁하려는데, 스퀘일러 상단주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에스티아는 그를 보고는 방긋 웃었다. 아주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상단주님!”
에스티아가 그에게로 달려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오늘은 몸 괜찮으세요? 어제는 몸이 아프셔서 못 뵈어서 아쉬웠어요.”
“예, 아가씨 덕분에 하루 만에 나았지 뭡니까. 이제는 정말 괜찮습니다.”
“정정하시지만 그래도 항상 조심하셔야 해요. 몸이 조금이라도 안 좋으시면 저와 에팅한테 맡기세요. 사고는 안 칠게요.”
에스티아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스퀘일러 상단주는 마치 손녀가 애교 부리는 걸 보는 것처럼 껄껄 웃었다.
이 모습을 본 대공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자신 앞에서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스퀘일러 상단주와 에스티아는 마치 할아버지와 손녀처럼 사이가 좋아 보였다. 자기가 알기로는 원래 둘은 이 정도 사이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에스티아는 차를 가져온 에팅과도 친해 보였다. 둘은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친구처럼 무척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고마워, 에팅. 내가 이 차 좋아하는 거 또 어떻게 알았어?”
에스티아가 손뼉을 치며 칭찬하자 에팅의 얼굴이 벌게졌다.
“아가씨께서 이 차를 드실 때면 항상 다 드시는 거 같아서요. 얼마 전에 시장을 가서 찻잎을 넉넉하게 사 놓았습니다.”
꿈틀. 대공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에팅을 보며 웃고 있던 에스티아는 대공의 심기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진짜 상황만 된다면 계속 여기에 있고 싶다.”
에스티아가 에팅을 향해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글레멘드 영애.”
그때 싸늘한 목소리가 옆에서 날아왔다. 에스티아의 고개가 삐걱삐걱 공작을 향해 움직였다.
대공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뭐야, 왜 또 화났어?’
“네, 전하.”
누가 기죽을쏘냐. 에스티아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에팅이 뒤에서 두 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하죠.”
대공이 에스티아한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에스티아는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뭐야, 결국 잠깐 안부 주고받은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저러는 거야?’
사춘기여? 에스티아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녀의 눈에 있던 대공의 시선이 입술에 닿았다.
“자,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죠. 에팅?”
스퀘일러가 능숙하게 이야기를 돌리며 에팅에게 신호를 건넸다. 에팅은 능수능란하게 테이블 위를 세팅했다. 향기로운 차향이 아래에서 올라왔다.
에스티아가 황홀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자 에팅이 그런 그녀를 보며 웃으며 의자를 빼주었다. 에스티아는 에팅과 마주 보며 웃고는 의자에 앉았다.
반면에 대공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계속 속이 타는 듯 연신 차를 들이켜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잠시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런 상태인 건 비단 그뿐만은 아닌지, 한 마차가 급하게 상단으로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