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 보이지 않는 질투 (1)
나라에서 잘못한 것은 겨우 갑작스러운 비를 대비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먼 미래나 다른 세계였다면 그저 우산을 안 가져와서 조금 짜증 나고 끝날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 이 세계는 달랐다. 마차들은 서로 뒤엉켰고 말들은 서로를 향해 발을 들어댔다. 마차가 서로 부딪쳐 사고가 났고 크고 작은 인명 피해가 일어났다. 겨우 비 하나 때문에, 작은 마을부터 시작해서 중소 도시는 물론 대도시까지 엉망이 되어 버렸다.
하수도가 그렇게 발전한 시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길이 강처럼 물이 흘러넘쳤고 덕분에 사고가 일어나면 수습이 쉽지 않았다.
“마차들이 물에 잠겨 움직이지도 못한다고 하더군요. 세상이 완전히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스퀘일러가 잠시 요즘 상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몇몇 길은 빠르게 복구가 되고 있지만요. 그…… 바일 저택에서 상단으로 오는 길도 아직 복구가 안 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두 분이 어떻게 같이……?”
스퀘일러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그건!”
이러다 같은 집에 머문다는 걸 들킬 거 같다고 느낀 에스티아가 대공의 말을 가로막았다. 상단주와 대공의 시선이 에스티아에게 모였다. 그런데 막상 막고 보니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어……어…… 그니까…….”
뭐라고 말하지? 사실 이렇게까지 해서 막을 일은 아니긴 했다. 한 방에서 같이 머무는 것도 아니고 그 넓디넓은 저택에 같이 있는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에스티아는 더는 쓸데없는 오해를 받기 싫었다. 이제 자신은 대공을 사랑하는 여인이 아니었다.
“여기…… 바로 앞에서 마주쳤습니다! 어…… 며칠 전에 근처 마을에 볼일이 있어서 오셨다가 비가 왔다고 하더라고요. 하하…….”
“그런가요? 근데 아가씨께서 타고 오신 마차는 없던데요?”
앗.
식은땀이 흘렀다. 역시 오랜 연륜을 이기기가 어렵다. 에스티아의 시선이 잘게 흔들리는 걸 본 대공이 고개를 저으며 끼어들었다.
“건물 앞 말고 근처 길에서 마주쳤습니다. 영애의 마차 바퀴가 길에 박혀서 안 빠졌거든요.”
오, 그거 좋다좋다.
에스티아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걸 본 대공이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오, 그랬군요. 하기야 비가 많이 와서 그냥 지나치실 수 없었겠습니다.”
“마음 같아서야 그냥 가고 싶었지만 보통 비가 아니었으니까요. 박애주의적 태도였죠.”
마음에 안 드는 포인트가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먹이고 재워 준 게 누구였더라.
에스티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대공을 노려보았다. 대공은 아무렇지 않게 그 시선을 무시했다. 스퀘일러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은 여전히 사이가 좋으시군요.”
“네?”
“뭐라고요?”
대공과 에스티아가 동시에 대답했다.
“도대체 어디가요?”
전혀 납득하지 못한 에스티아가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다 흠칫하며 대공을 힐끔 보았다. 역시 안 좋은 걸 씹은 표정이었다.
“두 분 다 틱틱거리시면서도 막상 서로가 곤경에 처하면 도와주시지 않습니까. 그게 사이가 좋은 게 아니면 뭐겠습니까.”
‘응? 그랬어?’
“설마…….”
인정하지 못한 에스티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대공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홀짝. 에스티아가 아무렇지 않은 척 차를 마셨다.
“자, 어느 분부터 말씀하시겠습니까?”
스퀘일러가 묻자마자 에스티아가 대공을 가리켰다. 물론 손바닥을 위로 한 채로, 두 손으로 공손하게.
대공은 그런 그녀를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에스티아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빙긋 웃었다. 대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에스티아는 머쓱해져 두 손을 내렸다. 저런 표정 지을 건 뭐람.
“그럼 저부터 말하겠습니다.”
대공이 애써 안 좋은 눈빛을 거둬들이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나라가 어지러운 건 상단주님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현재 약초 부족으로 황실 기사단의 사기가 많이 죽었습니다. 기사단은 가장 최전방에서 나라를 보호해 주는 존재이니, 가장 우선적으로 황실 기사단과 거래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려면 에스티아 아가씨의 동의가 필요한 건 아시겠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글레멘드 마차가 웅덩이에 빠진 걸 그냥 지나치지 않고’ 온 것이죠.”
대공은 유독 특정 부분을 강조했다. 에스티아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다만 투자자인 아가씨가 동의하신다고 해도 큰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아가씨가 이번 약초 수급에 가장 많이 투자한 투자자라고 해도 모든 걸 결정할 권리는 없으시니까요.”
“그렇죠.”
에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버지니아 약초는 마법사들에게 꼭 필요한 약초이다. 마법사들은 황실 기사단 말고도 여러 단체에 속해 있었다. 아무리 황실 기사단이라고 해도 폭우가 시작된 이 시기에 무작정 대량으로 사들이면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스퀘일러가 테이블 위로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그러니 누구의 동의를 얻고 누군가의 결재를 받고 이런 것보다는 제일 높은 책임자와 거래를 원하는 최고 담당자가 빠르게 의논해서 공표하는 게 좋겠죠.”
“……그 말은.”
대공이 스퀘일러의 말에 뭔가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네, 이번 버지니아 약초 모든 결정 권한은 아가씨께 위임하고 싶습니다.”
스퀘일러 옆에서 열심히 메모를 하던 에팅이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었다. 에스티아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가씨께서 이번 약초 수급 건의 총책임자가 되셨으면 합니다. 아가씨께서는 어찌 되었든 저명한 공작가의 영애시고, 최고 투자자시죠. 총책임자까지 되신다면 동의를 받는 절차가 훨씬 간략해질 겁니다.”
스퀘일러의 결정은 에스티아조차 예상하지 못한 거였다. 당혹스럽긴 했지만 그건 결코 기분 나쁜 감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정받은 듯한 쾌감이 느껴졌다.
“그 제안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럼, 그 이후의 거래들은 제가 폐하와 얘기를 나누고 오면 다시 얘기하도록 해요, 상단주님.”
“그렇게 하죠, 아가씨.”
스퀘일러는 온화한 표정으로 에스티아를 바라보았다. 에스티아는 그 표정조차 신뢰의 표시인 거 같아 그에게 고마웠다.
에스티아는 힐끔 대공을 바라보았다. 대공은 이번에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의 말이 마음에 안 든다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불안한 표정이었다.
‘저 속을 누가 알겠어.’
이제 대공의 태도에 익숙해진 에스티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가씨가 다녀올 동안 저는 그 사실을 거래처들에게 알리고 있겠습니다.”
“네, 감사해요, 상단주님.”
에스티아가 해사하게 웃었다. 그걸 물끄러미 보던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와 함께 가시죠. 어차피 저도 황궁으로 가야 합니다.”
“아, 괜찮은데요…….”
에스티아가 일어나려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단의 마차를 타고 가면 돼요.”
“역시 같이 있기는 긴장되시는…….”
“같이 타죠!”
에스티아가 벌떡 일어나 문가로 갔다. 에라이.
그렇게 스퀘일러의 배웅을 뒤로하고 대공, 에팅이 에스티아의 뒤를 따랐다.
비는 여전히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원작대로라면 1년 동안 이어질 기나긴 우기였다.
에스티아가 현관 앞에서 왠지 착잡한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그 앞으로 하얀색의 화려한 마차가 멈춰 섰다.
응? 뭐지? 익숙한 느낌의 마차였으나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셰린포드 영애……?”
대공이 놀란 투로 중얼거렸다.
잠깐만 누구라고?
* * *
셰린포드 영애? 메르헨 셰린포드?
다소 쌀쌀한 날씨임에도 에스티아는 식은땀을 흘렸다. 괜히 오해하면 어떡하지? 이건 진짜 그녀의 의도가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람이 날 괴롭혔다고, 메르헨.’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에스티아는 애써 메르헨이 마차에서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
시종이 씌워 준 우산을 쓴 채로 메르헨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안색은 여전히 안 좋았지만 아름답고 청초했다.
“메르헨.”
대공이 예의를 갖추는 것도 잊고 메르헨에게 다가갔다. 메르헨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대공 전하.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그저 전하와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하던 차에 이곳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죄송해요. 전 너무 걱정이 되어서…….”
메르헨의 눈가가 붉어졌다. 에스티아는 메르헨의 옆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참 예쁘다.
“무슨 소리입니까. 먼저 연락하지 않은 제 잘못이지요. 그래도 몸도 안 좋으신데 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황궁만 들렸다가 바로 연락드리려고 했는데요.”
대공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메르헨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꼴 시려.’
태도가 달라도 저렇게 다르니 에스티아가 상처받는 것도 당연했다.
“보고 싶어서요.”
헉. 저렇게 고백을 한다고?
에스티아는 민망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메르헨이 때마침 에스티아를 발견하고 인사했다.
“아! 영애도 계셨군요. 죄송해요. 제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인사하는 게 늦었어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영애.”
에스티아가 고개를 저으며 두 손을 휘저었다. 메르헨이 고맙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황궁에 가신다고 하셨지요? 저도 가도 될까요?”
“황궁이요? 지금 말입니까?”
대공이 에스티아를 힐끔 바라보았다가 다시 메르헨에게 시선을 돌렸다.
“몸이 좋지 않으시니 쉬셔야 합니다, 영애.”
대공이 한쪽 손을 메르헨의 어깨에 살짝 올린 채로 말했다. 메르헨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같이 가고 싶어요. 오랜만에 폐하한테 인사도 드리고요.”
저렇게 부드럽게 말하는데 어떻게 거절을 할까. 에스티아는 속으로 역시 여주라며 감탄했다.
“그럼 저는 에팅과 상단 마차로 가겠습니다. 두 분이서 같이 가세요.”
메르헨과 대공의 시선이 동시에 에스티아에게 꽂혔다. 에팅도 꽤나 놀란 눈치였다.
원래대로라면 메르헨과 절대 갈 수 없다고 대공에게 바득바득 소리를 질렀어야 할 에스티아였다. 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오니 이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고마워요, 글레멘드 영애.”
메르헨도 얼떨떨한 눈치였다. 에스티아는 싱긋 웃고는 에팅의 손을 잡았다.
“가자, 에팅! 시간이 없어.”
그러고는 우산을 든 에팅과 씩씩하게 상단 마차로 걸어갔다. 이로써 제대로 마음이 없다는 걸 증명한 거 같아 에스티아는 뿌듯했다. 에팅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럼 저희도 가죠, 메르헨.”
대공이 다정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메르헨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미소 짓는 것에 황홀해졌다.
근데 곧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메르헨은 대공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의 시선 끝에는 에팅의 손을 잡아끌고 사라지고 있는 에스티아의 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