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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9화 (20/141)

19화 - 보이지 않는 질투 (2)

그간 이 세계에 대해 열을 올리며 공부하고, 여기저기 쏘다니며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궁을 보자마자 에스티아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웠다. 비가 많이 오고 안개가 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음에도 우아한 느낌과 화려한 느낌이 공존하는 궁궐이 충분히 아름답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동화 속에서만 보던 궁전 같네.’

궁전을 닮은 모 놀이공원에 가고 싶어서 해외 여행을 계획할 정도였는데. 그때 당시에는 당장 원룸 월세 내기도 바빠 꿈도 꾸지 못했다. 오히려 빚을 진 채로 자취를 감춘 부모님 덕에 더 뼈 빠지게 일해야만 했다. 놀이공원은 정말 꿈도 못 꿀 일이었는데.

‘이렇게나마 보는 느낌이네.’

복잡한 감정이 들어 에스티아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궁에는 처음 와 보세요, 아가씨?”

에팅이 그런 에스티아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에스티아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렸을 때 와 본 적이 있다고 내 수행원이 이야기하더라. 물론 나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어렸을 때면 기억이 안 나실 수도 있죠.”

에팅이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만 궁이 낯선 게 아니어서 다행이야. 우린 동지네.”

에스티아가 싱긋 웃었다. 에팅의 얼굴이 다시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시선을 돌린 에스티아는 보지 못했다. 그만큼 에스티아는 궁궐의 풍경에 푹 빠져 있었다.

게다가 바일 가문의 마차가 앞장선 덕에 쉽게 입궁하면서, 내부 모습까지 빠르게 볼 수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었지만 에스티아는 왠지 황홀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다만 씁쓸한 기분이 살짝 섞인 감정이었다.

마차가 서자 깔끔하게 차려 입은 궁인들과 함께 시종장으로 보이는 중년이 우산을 든 채 서 있었다. 황궁 문을 들어서자마자 소식을 전달받은 모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작 전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종장은 메르헨과 에스티아에게도 인사하며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 뒤로 에팅이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에스티아는 당황하지 않고 시종장에게 에팅을 상단을 대표하여 온 상인이라고 소개했다.

시종장은 몇 번이나 에팅의 소지품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를 풀어 주었다. 에팅은 그 위압감에 잔뜩 풀이 죽었다.

“괜찮아, 에팅. 내가 옆에 있잖아.”

에스티아는 장난스럽게 에팅의 팔을 툭툭 쳤다. 그제야 에팅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황궁 내부야 온통 금빛에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갓 청소한 것처럼 반짝거리고 깨끗했다. 에스티아는 촌스러워 보이지 않도록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시종장은 널찍한 응접실로 안내했다. 잠깐 기다려 달라고 말한 시종장들 뒤로 궁인들이 갖가지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 에팅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런 만찬은 처음 본다는 표정이었다.

“다 젖었어, 에팅.”

궁인들이 우산 대충 씌워 줬나. 에팅의 상의가 온통 젖어 있었다.

“괜찮아요, 아가씨.”

다행히 에팅은 별로 상처받은 기색은 없었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왠지 자신의 과거의 모습을 보는 거 같아 마음이 안 좋았다.

에스티아는 조심스러운 말투로 궁인을 불렀다.

“혹시 수건이 있다면 좀 가져다주겠어요?”

“예, 아가씨.”

궁인들의 몸짓은 흐트러짐은 없었다. 그 흐트러짐 없는 몸짓으로 우산 좀 잘 씌워 주지.

“영애는 춥지 않으십니까?”

옆에서 대공이 걱정스러운 투로 메르헨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전하.”

“그래도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이보게, 영애한테 따뜻한 담요를 가져다주게.”

“예, 알겠습니다.”

참나. 누가 좋은 커플 아니랄까 봐.

에스티아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렇게 따뜻한 차를 홀짝이고 있는데 금세 궁인들이 수건과 담요를 갖고 왔다.

대공은 궁인이 담요를 건네주기가 무섭게 손수 메르헨에게 담요를 둘러주었다. 메르헨의 얼굴이 부끄러운지 빨갛게 상기되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열이 나는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폐하는 나중에 뵈러 오시죠. 여기까지 오신 게 아깝긴 하지만 메르헨의 건강이 먼저니까요. 얼마 전에 쓰러졌었는데 조심하셔야 합니다.”

왠지 누군가를 겨냥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에스티아는 무시했다. 대신 수건을 손에 쥐고 에팅의 머리를 털어 주었다.

“앗, 괜찮습니다. 아가씨! 제가 하겠습니다.”

“아냐, 내가 해 줄게.”

에스티아는 어렸을 때 동생들한테 해 준 것처럼 수건으로 에팅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털었다.

“그리고 궁에서 나갈 때는 나랑 우산 같이 써.”

“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에팅이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들었다.

“궁인이랑 같이 우산 쓰는 게 어색하니까 더 젖은 거 아니야. 그러니까 나랑 같이 써. 그럼 딱 붙어 있으면 되잖아.”

“……네.”

에팅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에스티아는 그 모습이 귀여워 풋 웃었다. 근데 에팅도 감기에 걸렸나? 볼이 빨개.

거기에다 에팅의 얼굴 말고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왠지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달까. 그런데 괜히 잘못된 느낌으로 남주와 여주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에스티아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에팅과 함께 한참 떨어진 곳에 앉은 참이었다.

게다가 뒤에서 도란도란 대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절대 궁인이 오기 전 뒤를 돌아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래서 에팅의 얼굴만 주구장창 들여다보고 있었다. 덕분에 에팅만 죽을 맛이었다.

결국 에팅의 얼굴이 터지려는 그때, 때에 맞춰 궁인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대공 전하, 셰린포드 아가씨, 글레멘드 아가씨, 폐하께서 알현실로 부르셨습니다.”

“셰린포드 영애는 몸이 좋지 않아 다음에 뵈러 가겠습니다. 폐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전하.”

궁인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에팅, 다녀올게.”

에스티아가 에팅의 손을 한 손으로 잡은 채로 밝게 웃었다. 에팅이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가씨.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차랑 쿠키 먹으면서 기다려. 눈치 보지 말고 먹어. 알았지?”

에스티아는 자기가 가고 나면 에팅이 더 눈치 볼까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

에팅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에스티아는 그저 에팅의 눈이 원래 초롱초롱하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메르헨, 아니…… 영애, 다녀올게요.”

대공도 메르헨에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네, 다녀오세요, 전하. 기다리고 있을게요.”

메르헨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청량했다. 아주 풋풋하고 귀여운 커플이었다. 에스티아는 간단한 눈인사로 메르헨에게 인사를 한 뒤, 궁인을 따라 대공과 함께 응접실을 나섰다.

알현실로 갈수록 궁인의 수는 적어졌다. 에스티아는 괜히 긴장이 되어 침을 꼴깍 삼켰다.

“글레멘드 영애.”

깜짝이야.

황제에 대해 생각하던 에스티아가 갑작스러운 대공 목소리에 놀라 몸을 움찔했다.

“네?”

그런 탓에 대공이 무슨 말을 할지 대비하지 못했다. 딱딱한 대공의 표정을 보았을 때는 이미 늦어 버린 뒤였다.

“혹시 다른 누군가와 긴밀하게 교제하는 것도 증명의 일환입니까?”

이건 또 뭔 소리야. 에스티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지요?”

“제 말은,”

대공이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

“평민과 가까이 지내어 품위를 실축시키는 것이 목적이시냐고 묻는 겁니다.”

에스티아는 뚝 멈춰 섰다. 알현실로 안내하던 궁인은 물론 대공도 걸음을 멈췄다. 대공은 살짝 손을 들어 궁인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에스티아는 기가 막혔다. 그러니까 그는 즉, 대공의 약혼녀 후보에서 탈피하기 위해 일부러 평민과 친하게 지내는 거냐고 묻는 것이었다.

에스티아는 헛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전하께 좋은 거 아닌가요? 저에 대한 소문이 안 좋아지는 거?”

에스티아가 그를 올려다보며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영애에 대한 소문이 원래는 좋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푹. 마음에 비수가 꽂혔다.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걸 본 대공은 그녀의 침묵을 긍정이라고 생각했는지 말을 이었다.

“애초에 평민인 상인을 궁에 출입시키는 것부터가 문제였지만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궁인들이 다 보는 앞에서 사이가 가깝다는 걸 보여 주다니요. 동행한 저와 셰린포드 영애의 위신은 뭐가 됩니까?”

“그렇군요.”

에스티아가 싸늘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뭐가 그렇다는 거죠?”

대공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전하께는 전하와 저를 보필하려고 따라온 에팅이 큰 수치셨군요.”

“……고위 귀족이 평민과 함께 다닐 때 일어날 수 있는 품위 손상을 걱정하는 것뿐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다음에는 함께 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에스티아의 눈동자에 냉혹한 기운이 서렸다.

“물론 대공 전하와요.”

“뭐……?”

속삭임과 같은 목소리가 대공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전 절 아껴 주고 위해 주는 친구를 홀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한테 소중하지도 않은 사람의 마음을 신경 써 줄 만큼 제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것도 신분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사람을.”

“…….”

만난 이래로 가장 민낯의 대공을 보는 거 같았다. 상처받은 기색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거 같았지만 에스티아는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저도 제 약혼자가 될 ‘뻔’한 분이 아니라, 철저히 높디높으신 대공 전하로 대하겠습니다. 그게 바로 제 증명입니다.”

에스티아는 그렇게 말을 끝맺을까 하다가 까치발을 들어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갖다 댔다.

“아, 물론, 저 궁인이 저희가 이렇게 다툰 걸 소문으로 내준다면 더없이 좋겠네요.”

에스티아가 다시 발을 내렸다. 궁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보고 있었다. 대공의 뺨이 딱딱하게 굳은 게 눈에 보였지만 에스티아는 외면하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태연한 척했지만 대공의 차별이 담긴 말을 들으니 괴로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중학교 시절, 애들이 어디서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물어보니 자기 엄마가 수준이 떨어지는 애랑 놀지 말라고 했단다. 비슷하게 사는 애들이랑 놀라고 했다고.

그때를 떠올린 에스티아는 그래서 대공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무리 저게 귀족 사회에서는 당연한 상식이라고 해도. ‘수준’ 따위를 운운하며 배척하고 배척당하는 건 이제 지긋지긋했다. 에스티아는 그래서 둘 중 누군가를 버려야 한다면 에팅이 아닌 대공을 버리고 싶었다.

에스티아는 확신했다.

에스티아 글레멘드의 인생에,

저 남자는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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