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20화 (21/141)

20화 - 보이지 않는 질투 (3)

궁인의 등이 딱딱하게 긴장되어 있는 게 보였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두 남녀가 살벌하게 싸우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기 쉬웠으리라.

사실 아직도 마음이 울렁거렸다. 말은 무서웠고 아팠다. 에스티아는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뒤에서 대공이 느린 걸음으로 따라오는 게 들렸다. 에스티아는 긴 복도를 걸으면서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걷고 걷다 보니 어느새 황금과 은이 섞인 큰 문 앞에 도착했다. 궁인이 큰 소리로 아뢰었다.

“폐하, 바일 대공 전하와 에스티아 영애가 도착하였습니다.”

“들라 하라.”

미성의 목소리가 문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러자 문 양옆에 있던 두 기사가 문을 열었다. 화려한 알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대공 덕분에(?) 침착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우아하고 화려한 알현실에 들어오니 다시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어서 오세요, 바일 대공, 에스티아 영애.”

부드러운 음성이 귀에 닿자 에스티아는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와…….’

소설에서 묘사한 대로 수려한 인물이었다.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황제가 젊고 잘생겼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일지는 몰랐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황금과 비슷한 색을 가진 금발과 눈동자,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얼굴은 아름답고 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제야 왜 그렇게 귀족 영애들이 황후 자리를 탐내는지 진심으로 이해가 됐다. 좀 잘생긴 게 아니라 엄청 잘생겼다고 얘기 좀 해 주지. 물론 작가도.

“제국의 하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대공이 먼저 황제에게 인사를 드리자 에스티아도 바로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제……국의 하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에스티아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억눌렀다. 사실 황제가 어느 정도, 아니 꽤 잘생겼다는 건 대충 알고 있긴 했다. 왜냐하면…….

“대공, 간만에 얼굴을 보는군요. 영애는,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영애의 데뷔탕트 이후로 처음이군요.”

왜냐하면, 그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폐하.”

그는, 이 소설의 서브 남주였으니까.

에스티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게 보면 에버하르트 바일보다도 잘 보여야 하는 인물일 수도 있었다.

“대공이야 그렇다 쳐도, 영애를 오랜만에 보니 정말 반갑습니다. 진작 궁에 초대를 해 드릴 것을요.”

에스티아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말투도 어쩜 저리 사근사근할까. 벌써부터 에버하르트 바일이 누구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이다.

“폐하, 셰린포드 영애도 폐하를 뵈러 함께 입궁을 하였으나 몸이 좋지 않아 응접실에 있으라고 제가 말했습니다.”

대공이 방해하듯이 불쑥 황제에게 말을 건넸다. 말을 꺼내려던 에스티아는 대공을 째려보려다가 말았다.

‘분명 서브 남주의 이름이…….’

레이븐. 그래, 레이븐 리자인.

‘이름도 멋있네.’

도저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확실히 그가 지닌 외모나 눈빛은 시선을 빼앗는 면이 있었다. TV 같은 데에 나와서 널리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렇군요. 셰린포드 영애께서 빨리 회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모쪼록 대신 안부 좀 전해 주세요.”

황제는 황제가 맞나 싶을 정도로 겸손하고 공손했다. 다만 메르헨을 사랑한 서브 남주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단조로운 목소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황제라서 감정을 숨기는 걸 수도 있었다. 사실 에스티아는 자기의 목숨만 아니라면 메르헨과 황제를 응원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이 로판 소설을 읽다 만 이유가 거기에 있었으니까.

“글레멘드 영애께서는 요즘 괜찮으십니까?”

“네?”

생각에 잠겨 있던 에스티아는 어벙하게 대답했다. 그러다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그새 또 뭔 안 좋은 소문이 났나 싶었다. 황제는 그걸 눈치챘는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 다른 건 아니고요, 몇 주 전에 몸이 잠깐 안 좋으셨다고 들었거든요.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아, 대공의 저택에서 끌려 나와 쓰러졌던 날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다음 날 빙의한 에스티아로서는 그의 말에 기분이 묘해지는 걸 느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히 그 다음날 ‘바로’ 회복했습니다. ‘그렇게’ 힘들어할 일도 아니었고요.”

에스티아는 누구 들으라는 듯이 말에 강세를 넣으며 말했다.

“오히려 필요 없는 것들을 정리하고 나니 더 건강해졌습니다.”

“오, 영애께 큰 전환점이 된 일이 있었나 봅니다.”

분명 황제도 그 일을 알고 말하는 걸 테지만 누구와는 달리 딱히 비꼬는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아는 건 확실한지 그 말을 하며 대공을 힐끔 쳐다보았다.

“폐하,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떨까 하온데…….”

분명 저 삐딱한 성격상 저 정도도 그나마 곱게 순화해서 말한 거일 터였다. 황제만 아니었으면 ‘닥치고 본론부터 말하자’ 했을 정도의 어감이었으니까. 그나마 소설대로라면 둘은 어렸을 적부터 아는 사이였기에 황제도 딱히 안 좋게 받아들이지는 않는 거 같았다.

“그러지요. 대공은 꽤 바빠 보이는데다가 기다리시는 분도 있으시니.”

다만 황제도 고분고분 넘어가진 않았다. 말에 칼이 있었다.

‘맘에 들어.’

에스티아는 홀로 뿌듯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이 그런 에스티아를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럼 이제부터 약초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요. 어떤 분부터 먼저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약초 수급의 실질적인 관리자인 영애부터 말씀하시지요.”

이 순간만큼은 대공도 공손하게 말했다. 물론 뭔가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건 물씬 느껴졌다.

“그러시죠, 영애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습니까?”

황제가 장난기를 지우고 진지한 투로 말했다. 에스티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셋은 알현실에 마련된 크고 화려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황제가 상석에 앉고 황제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대공이, 왼쪽으로는 에스티아가 앉았다.

덕분에 에스티아는 대공과 마주 보고 앉아야 했다. 전에는 살짝 기가 죽어서 그랬다면, 지금은 말 그대로 얼굴을 보기 싫어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반면에 대공은 황제가 뭔 말을 건넬 때 빼고는 주야장천 에스티아만 바라보았다.

당최 속내를 알 수 없는 남자였다. 분명 그녀를 싫어하면서 왜 저렇게 빤히 보는 것일까?

“대공?”

황제가 시선을 돌려 대공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에 빠져 계시는 거 같습니다.”

“아…… 아닙니다.”

확실히 저택에서 나오기 전과 비교해 보면 대공은 왠지 얼빠져 보이긴 했다. 설마 아까 일 때문은 아닐 거고, 서브 남주를 경계하는 걸까? 직감적으로.

그럼 자신은 바로 빠져 주리라. 사랑은 당신들끼리 하기를.

“그러니까 영애의 말씀은, 이번 약초 수급의 책임자인 영애와 긴밀한 협의하에 공정하게 유통이 진행되게끔 관리하겠노라, 대대적으로 공표를 하라는 것이군요.”

황제가 깔끔하게 정리하며 말했다. 에스티아의 눈이 반짝거렸다. 당최 누구 자식인지 예쁘기만 하다.

“네. 스퀘일러 상단은 출중한 인재를 갖춘 상단이지만 아직 규모가 작습니다. 그러니 약초와 관련하여 무분별한 압박이 들어올지도 모르고요. 그러니 황실이 보장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황실의 입장에서도, 무작정 약초를 황실과 기사단에 배급하라 명하는 것보다는 저와 긴밀히 협의했다고 하는 게 여론에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꽤 긴장했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더듬거리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에스티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아무리 황제가 나라의 절대 권력이라고 해도 여론 앞에서는 바람 앞의 촛불입니다. 이리 먼저 찾아와 주셨으니 저야말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 하늘이시여. 드디어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에스티아의 입가에 절로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그런데 그러자마자 대공이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이제는 마음에 안 드는 걸 숨길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황제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저도 무작정 황실 기사단에 대량 배급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일정량을 황실과 의논하여 기사단에 먼저 일부를 배포하기로 했노라 공표하기로 하죠. 그 이후부터는 상단이 공정하게 거래할 수 있도록 황실에서 보증하겠습니다.”

됐다! 에스티아는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행히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자세한 사항은 재무 대신과 함께 얘기하는 건 어떻습니까, 영애? 영애를 생각하면 좀 더 이후에 얘기를 하고 싶지만 한시가 급한 사항이라서요.”

황제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투로 에스티아에게 말했다. 에스티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괜찮습니다, 폐하.”

드디어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랑 만났는데 계속 얘기하는 게 뭐가 대수겠는가.

“자, 그럼.”

황제가 대공 쪽으로 획 고개를 돌렸다.

“대공은 업무를 보러 가시죠.”

“……?”

대공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아직 재무 대신이 오지 않았는데요, 폐하.”

“영애와 단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두 분이서요?”

대공의 안색이 파리해진 거 같다면 착각일까? 에스티아는 이제 대공의 속내를 파악하기를 포기했다.

“두 분이서…….”

대공이 작게 중얼거리다 홱 고개를 돌려 에스티아를 쳐다보았다.

아, 또 그 눈빛이다.

왠지 모르게 형형한 눈빛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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