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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21화 (22/141)

21화 - 보이지 않는 질투 (4)

날카로운 눈빛이 매섭게 에스티아의 마음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저 눈빛이 끊임없이 자신을 옭아매는 거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왜 과거의 에스티아가 그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어렸을 때는 단순히 잘생기거나 다정하다는 이유로 좋아할 순 있지만 그녀가 그를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는 다른 거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의 내용을 곰곰이 떠올라도 추측이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작에서는 그저 에스티아와 에버하르트가 어렸을 때부터 봐 왔던 사이고, 에스티아는 당연히 그가 자신과 결혼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고만 나와 있다.

‘그냥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이 다른 여자를 사랑해서 그랬던 걸까.’

만약 단순히 그랬다면 에스티아는 에버하르트에게 매달리기는커녕 무기력해졌을 것이다. 그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진 않았을 것이다.

질투도 사랑이 있어야 한다. 에스티아는 그 사랑의 근원지가 궁금했다.

대공도 외모라면 결코 황제에 뒤지지 않았으니 만약 엑스트라로서 그를 보았다면 마음이 울렁거리는 게 이상한 게 아니다……. 하지만 이 케이스는 달랐다. 무려 남주인공에게 죽임을 당하는 서브 여주의 이야기니까. 아무런 노력 없이 가만히 있다가는 죽음에 이를지도 모르는, 그런 결과를 만들 수 있는 사람.

사랑도 조롱하는 남자.

그래서 에스티아는 대공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스치듯이 봐도 할 말이 수백 개는 되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겠는가. 보나마나 아까 이야기의 연장선일 터였다.

“대공?”

황제가 의아하다는 듯 대공을 쳐다보았다. 대공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네, 폐하.”

“입궁하는 김에 잠깐 날 보러 온 거 아닙니까? 이제 용무를 보러 가셔도 됩니다.”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에스티아는 대공을 보고 있진 않았지만 그가 보기 드물게 당황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영애와 단둘이 있다는 게 소문이 퍼지면 두 분 다 곤란하실 텐데요.”

‘응? 소문?’

그러고 보니 황제는 20대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음에도 아직 국혼을 올리지 않았다. 그래서 영애나 하물며 황궁 시녀장과 단둘이 있어도 소문이 나곤 했다. 아마 그게 염려스러웠을 것이다.

‘생각보다 충신인 건가?’

에스티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메르헨을 두고 다투긴 했지만 예상보다 사이가 꽤 괜찮은 모양이었다.

황제는 호탕하게 웃었다. 대공의 딱딱한 표정과는 대조적이었다.

“전 괜찮습니다. 오히려 영애가 불편하실 수 있죠.”

두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에스티아에게로 향했다. 에스티아는 순간 당황하여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아……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에스티아는 잠시 고민했지만 곧 침착하게 대답했다.

“전 괜찮습니다, 폐하. 저야말로 오히려 폐하가 피해를 입으실까 걱정입니다.”

이미 악녀라고 소문이 정평하게 나 있는데 스캔들이 뭐 대수겠는가. 물론 황제와 스캔들이 난다면 부담스럽기야 하겠지만 황제가 직접 나서서 해명하면 될 일이다. 오히려 에스티아는 자신과의 이상한 소문으로 인해 황제가 피해 입을 게 걱정이었다.

에스티아의 진심을 알아보았는지 황제의 표정이 한결 더 부드러워졌다.

“정말 배려 깊으십니다. 영애가 가진 혜안만큼이나 깊은 마음씨를 지니셨군요.”

황제의 눈매가 보기 좋게 휘어졌다. 화사한 눈웃음에 에스티아는 다시 홀린 듯이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미 소문이 여러 개 나 있는데…….”

대공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거기에 하나 더 얹어서 좋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겨우 햇빛을 보는 기분이었는데 옆에서 느껴지는 폭풍의 기운에 에스티아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에스티아는 삐걱삐걱 고개를 돌려 대공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싸늘한 기운이 눈빛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왜 저렇게 매번 화가 나 있는 걸까?

‘분조장이야, 뭐야.’

에스티아는 질세라 대공을 똑같이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요즘 밤마다 이 남자 때문에 힘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공이 글레멘드 저택에 온 이후로 에스티아는 매일매일 악몽을 꾸고 있었다. 패턴은 대공이 온 첫날과 비슷했다. 그녀를 애칭으로 부르다가 곧 저주를 퍼붓는 것.

“저기 두 분……?”

중간에서 뻘쭘하게 둘을 보고 있던 황제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계속 그렇게 서로를 보고 계시면 제가 자리를 비켜 줘야 할 거 같지 않습니까.”

“아.”

“아.”

에스티아와 대공은 그제야 민망한 듯 서로 시선을 거두었다. 황제는 그 광경이 재밌는 듯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럼 대공?”

황제가 웃음을 멈추고 대공을 향해 싱긋 웃었다. 이제 작작하고 나가라는 눈빛이었다. 속이 다 시원했다.

반면에 대공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황제의 축객령에 불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공은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폐하.”

“살펴 가십시오, 대공.”

어쩜, 우리 서브 남주, 목소리도 부드럽다. 에스티아는 황제를 바라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글레멘드 영애.”

대공이 딱딱한 음성으로 에스티아를 불렀다.

‘아, 왜 또!’

에스티아는 결국 표정 관리를 포기하고 대공을 째려보았다.

“친구 분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응? 친구?’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던 에스티아는 곧 누군가를 떠올렸다.

“아, 에팅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영애.”

대공이 그녀를 삼켜 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왠지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친구 분께서 무료하실까 걱정이군요.”

“……?”

“그럼.”

대공은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뒤로 물러섰다. 물론 그러면서 에스티아를 한 번 보고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스티아는 이제 완전 백기를 들었다. 자신이 점쟁이가 된다고 해도 저 남자의 심리는 꿰뚫지 못하리라.

‘왠지 작작하고 빨리 오라는 소리 같은데 착각이겠지?’

에스티아를 처형시킨 장본인인데. 하기야 그렇게 따지면 처형을 승인을 한 이 황제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에스티아는 씁쓸했지만 곧 다짐했다. 너무 방심하는 건 역시 금물이다.

* * *

에팅은 여전히 어색하게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메르헨이 종종 말을 먼저 건네긴 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메르헨은 차를 마시며 때때로 응접실 문 쪽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에다 대고 이러니저러니 말 붙이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에팅은 티스푼으로 홍차를 휘저으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의 대상은 당연히 에스티아였다.

에스티아가 그렇게 성품이 좋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왜 아무도 얘기를 안 해 줬을까? 물론 외관상으로도 그녀는 아름다웠지만, 그것보다는 그녀의 맑은 성품이 그녀를 더 빛나게 만들었다.

하물며 자주 마주치는 웬만한 상인들보다도 그에게 정중했고 부드러웠다. 말만 편하게 놓았을 뿐이지 웬만한 귀족 영식 대하듯 예의 발랐다.

소문으로는 바일 대공에게 집착해서 매번 다른 여자와 있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른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신경도 안 쓰던데.’

에팅은 메르헨과 대공 쪽으로는 시선도 안 주던 에스티아를 떠올렸다. 일부러 표정 관리를 했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평온한 표정이었다. 도리어 둘이 편하게 대화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하는 거 같기도 했다.

대공에게도 공손했고, 메르헨에게도 다정했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돼.’

에팅은 괜히 혼자 뿌듯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주님이 종종 에스티아의 안부를 사람들에게 묻던 이유가 있었다. 역시 상단주님이 사람 보는 눈 하나는 확실했다.

‘물론 그 대공 전하는 잘 모르겠어.’

에팅은 대공의 아우라를 떠올리고는 몸을 떨었다. 그렇게 무뚝뚝하고 냉정한 분과 상단주님이 친밀한 관계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신분은 둘째치더라도 성격이 전혀 잘 맞을 거 같진 않은데.

‘하기야 셰린포드 아가씨와 있을 때는 다정하시긴 했어.’

하지만…….

에팅은 뒷목을 긁적였다.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하지만 딱 뭐라고 말하기에는 어려웠다. 에팅은 메르헨을 힐끔 바라보았다.

에스티아와는 또 다른 느낌의 우아함이 흘렀다. 에스티아가 진한 은방울꽃 같다면 에스티아는 청초한 장미 같았다. 짙은 보라색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흘러내렸는데, 뛰어가면서 봐도 귀족 영애란 걸 알아볼 거 같았다.

‘그에 반해 난 잡초지, 잡초.’

에팅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꽃으로 묘사하기 어려운 건 대공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귀족 영식들 보면 꽃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이들이 종종 있었는데, 대공은 확실히 그쪽과는 아니었다.

‘대공을 식물로 묘사해야 한다면 가시를 빼놓을 순 없을 거야.’

그러니 에스티아하고는 더욱 어울리지 않지!

에팅은 그렇게 생각하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다가 곧 얼굴이 벌게졌다. 아까 에스티아가 자신의 머리를 털어 주던 게 생각난 탓이었다.

그러다 메르헨을 쳐다보는데 그도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는지 은은한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제대로 빠진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메르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공 전하!”

메르헨이 총총 걸음으로 대공에게 다가갔다.

“메르헨, 몸은 좀 어때요?”

“덕분에요. 전 괜찮아요. 기사단으로 가시죠? 저도 같이 가도 되나요?”

“비가 많이 옵니다. 금방 다녀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실 수 있습니까?”

대공이 메르헨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리며 말했다. 메르헨은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얼마든지요.”

“고마워요, 메르헨. 당신 보러 금방 올게요.”

달달하다. 에팅은 괜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곧 누군가를 떠올리고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한참 생각에 빠져 있는 에팅은 누군가 자기를 탐탁지 않아 한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빨개진 그의 얼굴이 그 누군가의 심기를 지독하게 거스르고 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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