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 중요한 사람
재무 대신이 오자 이야기는 더 깊이 들어갔다. 대신은 황제가 작은 상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게 못마땅한 듯했지만 감히 거기에다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황제는 온화했지만 수틀리면 절대 봐주는 법이 없었다.
“약초 하나당 추출물 1~3g 정도가 나오니 1g당 26 아이온으로 가격을 책정하고, 기사단에게는 먼저 1kg을 보급하도록 하죠. 그 이후 상단이 검증된 곳과 거래를 할 수 있도록 황실에서 보증한다고 공표하죠. 당장 내일이라도.”
“예, 폐하…….”
대신은 분명 황실 기사단에 더 보급하고 싶은 게 분명했지만 황제가 워낙 단호해서 더 말을 꺼내진 못했다.
그래서 대신은 그저 세부적인 계획만 얘기하다가 발길을 돌렸다. 에스티아는 그 걸음이 못내 불안했지만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정말 초기 보급량으로 1kg만 할당하셔도 괜찮으시겠어요?”
“1g으로도 백 명의 마력이 한동안 유지될 수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부족해지면 그때 다시 저와 얘기 나누시죠.”
그러면서 에스티아는 황제와 계속 대화를 이어 갔다.
대화하면 할수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생에서는 TV에서나 볼 수 있던 얼굴을 계속 눈앞에서 보니 심장이 잠잠할 틈이 없었다. 물론 그 떨림은 이성적인 감정이라기보다는 팬심에 가까웠다. 영화가 바로 앞에서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영애, 시간을 할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먼 길 오느라 피곤하셨을 텐데요.”
황제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기색을 띠었다. 에스티아는 두 손을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폐하. 오히려 제가 감사한걸요.”
황제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황제는 컵을 옆으로 치우고는 그 위에 팔을 올렸다.
“그나저나 아무리 기우였다고 해도 영애의 혜안이 대단하십니다. 전 감히 따라가지도 못하겠는걸요.”
“아, 아닙니다.”
에스티아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사실 약초를 구하러 다닌 뒤, 사용인들 외에는 그녀를 진심으로 칭찬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하물며 저 대공마저도. 그 생각을 하니 가슴 한편이 쓰렸다.
“덕분에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비할 수 있게 되었으니 황실이 영애에게 큰 빚을 진 셈이군요.”
그래도 오랜만에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대공으로 인해 착 가라앉았던 기분이 황제의 칭찬으로 인해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대공도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을 겁니다.”
“네?”
갑작스러운 대공 언급에 에스티아는 화들짝 놀랐다. 황제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대공은 평상시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알기 힘들지만, 때때로 너무 티가 날 때가 있습니다.”
에스티아는 영문을 알 수 없어 그저 가만히 그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대공이 그동안 영애와 무슨 일이 있었든 이번 일로 영애한테 큰 빚을 졌다는 건 확실히 알고 있을 겁니다. 영애는 공적으로도 그 사람한테 중요한 사람이 되겠죠.”
음? 에스티아는 그의 말에서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을 발견했지만, 그가 곧 이야기를 다시 시작함으로써 생각을 뒤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저한테도 영애는 중요한 분이십니다. 앞으로 많은 것이 달라질 겁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겠죠.”
뭔가 의미심장한 말이었지만 에스티아는 딱히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스퀘일러 상단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 영애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네!”
에스티아는 힘차게 대답했다. 같은 편이 제국의 황제라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황제를 제 편으로 두면 설령 대공이 그녀의 처형을 청원한다고 해도 황제가 승인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사실 영애에게 부탁이 있어서요.”
“저에게요?”
에스티아가 손으로 저를 가리켰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영애라면 들어줄 수 있는 부탁 같아서요.”
“그냥 명령을 하시면 될 텐데…….”
에스티아가 속삭이듯 내뱉자 황제는 그저 싱긋 웃었다.
“영애에게 곤란한 명령은 하고 싶지 않아서요. 그래서 대신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속으로는 그 부탁이 무엇일지 궁금했지만 에스티아는 황제의 부드러움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어떤 부탁이십니까, 폐하?”
에스티아의 눈이 보기 드물게 반짝거렸다. 황제가 입가에 밝은 미소를 걸었다.
* * *
알현실을 나온 에스티아는 한결 당당하게 복도로 나섰다. 물론 궁인 뒤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걸 보기 전까지.
에스티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오늘은 더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복도에 기댄 채 서 있었다. 에스티아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상대도 인기척을 눈치챈 듯 벽에서 등을 떼었다.
“대공 전하.”
오늘은 정말 부르기 싫은 호칭이었다. 아니, 앞으로도 부르기 싫은 호칭이었다.
“제라르.”
대공이 익숙한 듯 궁인의 이름을 불렀다. 궁인이 익숙한 듯 무료한 표정으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자리 좀 비켜 주게. 궁 지리는 나도 잘 아니까.”
“하지만…….”
“제라르.”
대공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다시 궁인의 이름을 불렀다. 궁인이 익숙한 듯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에스티아와 대공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비켰다.
“왜 여기에 계시나요? 바쁘신 거 아니셨습니까?”
에스티아가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린 채 말했다.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갔으면 하고 바랐다. 안 그래도 보기 싫은 얼굴 더더욱 보기 싫어졌다.
“다 하고 오는 길입니다. 천막 설치하여 외부에서 훈련할 장소 마련하고요.”
대공이 에스티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에스티아는 대공을 보지 않았다.
“그럼 영애하고 들어가시지 왜 여기에 계세요? 폐하하고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폐하하고는,”
대공의 시선이 문에서 에스티아에게로 떨어졌다.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럼 왜 여기에…….”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올렸다. 그러자 대공과 딱 눈이 마주쳤다.
“두 분이서 얘기를 꽤 길게 하시는군요. 일을 다 끝내고 왔는데도 아직 얘기를 하고 계셔서 놀랐습니다.”
대공의 목소리는 나긋했지만 묘하게 가시가 돋쳐 있었다.
“저는 할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제가 상단 대표로 온 거라서요.”
에스티아는 다시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아까 했던 얘기의 영향이 컸던 거 같다. 그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싫진 않았다. 하지만 황제를 만나기 직전 나눴던 대화가, 전혀 그녀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았던 매서운 말이 그녀의 눈을 가렸다. 에스티아는 그들 사이에 새로 세워진 벽을 부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설령 그가 그걸 깨부순다고 하더라도.
“상단 대표. 앞으로 궁에 올 일이 많으시겠네요.”
“……?”
에스티아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에 들어온 대공의 눈빛이 깊었다.
“앞으로 길이 겹칠 일이 많겠습니다.”
뭐지. 이 싸한 느낌은.
“걱…… 걱정하지 마세요. 오해할 만한 상황이 생기지 않게 잘 대처할 테니까요.”
“저랑 오해할 만한 상황 안 만드시고, 다른 분과 오해할 상황 만드시려고요?”
하. 에스티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증명할지는 제 마음 아닌가요? 제가 누구랑 오해를 받든 전하와 오해를 받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에스티아는 그대로 대공의 옆으로 지나치려고 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사람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마차 없이 가시려고요?”
이건 또 뭔 개소리야. 에스티아는 고개를 돌려 대공을 노려보았다. 대공의 표정이 불길하게 여유로웠다.
“에팅이 기다립니다. 하실 말씀 없으면…….”
“마차 없이 가겠다고요?”
빠직. 에스티아의 남은 이성의 끈이 끊겼다.
“그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시냐고요.”
에스티아의 목소리가 더욱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대공이 천천히 다가왔다.
“에팅은 셰린포드 영애와 제 마차를 타고 돌아갔습니다. 영애의 안색이 좋지 않아 먼저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예?!”
애써 다시 표정 관리를 하려던 에스티아가 펄쩍 뛰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에스티아가 황당하다는 듯 대공을 올려보자 대공이 피식 웃었다. ‘네가 그래 봤자 내 손바닥 안이지’라는 표정에 에스티아는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먼 길을 혼자 걸어가면서 마음이 없음을 증명하시겠습니까? 차라리 저와 마차에서 ‘단둘이’ 있는 걸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게 더 제대로 된 증명 같은데요.”
“…….”
그냥 여기서 한 대치고 죽을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얻은 이 삶을 놓치기 싫었다. 에스티아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네…….”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얘기했건만 대공은 바로 듣고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에스티아는 죽을상을 하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 인간은 왜 여기서 죽치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뒤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궁인이 우산을 들고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궁인이 우산을 펼쳐 옆에 서려는데 불쑥 그녀의 앞으로 누군가의 손이 끼어들었다.
“내가 하지.”
“?”
에스티아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움찔했다. 대공이 궁인으로부터 우산을 건네받고 있었다.
“전하? 전하가 왜…….”
“그냥요.”
너무 성의 없는 대답에 에스티아는 맥이 팍 빠졌다. 그 덕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대공과 우산을 쓰고 마차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비고 나발이고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보는 눈들이 너무 많았다. 겨우 입지를 다지고 있는데 괜히 또 소문을 더해서 좋을 건 없었다. 그것이 자신이 이용할 수 없는 소문이라면.
게다가 비가 내려도 너무 많이 내리고 있었다. 벌써 어깨가 다 젖어갔다. 에스티아가 자신의 어깨를 내려다보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집에 가서 폭신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싶었으나 상단주님과 할 얘기가 많았다.
“글레멘드 영애.”
“왜…….”
‘왜 또’라고 말할 뻔한 걸 에스티아는 겨우 삼켜냈다. 에스티아는 입을 꾹 다물고 날아올 매서울 말을 기다렸다.
“영애.”
왜요, 왜.
“딱 붙으세요.”
“네?”
“제 옆에 딱 붙으시라고요. 어깨가 다 젖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대공이 에스티아의 뒤쪽으로 한쪽 팔을 뻗었다. 에스티아는 설마 어깨를 감싸나 싶어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대공은 끝까지 어깨를 감싸지 않고 살짝 자기 곁으로 당기고는 손을 거뒀다. 에스티아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자 대공이 피식 웃었다.
“착각하지 마세요. 어디까지나 ‘배려’이니까.”
지가 지 입으로 배려라네. 에스티아는 대공이 들리지 않게 흥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마차 앞에 다다랐다. 대공이 우산을 궁인에게 넘기고는 에스티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차는 천막 아래에 서 있어서 비를 맞고 있지 않았다. 물론 천막 옆으로 쉼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소리가 에스티아의 귓가에 닿았지만, 에스티아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니, 들을 수 없었다.
에스티아는 대공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어깨가 온통 젖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