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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23화 (24/141)

23화 - 떨림

비슷한 상황이라도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서 다른가 보다. 아니, 사실은 장소 탓도 큰가?

에스티아는 혹시라도 대공과 눈이 마주칠까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러면 대공이 덜 신경 쓰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그와 같이 타야 하는 마차가 대공의 마차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야 했다. 그걸 안다고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겠지만 적어도 비루한 각오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상단 마차는 대공의 마차보다 훨씬 작았다. 냉정하게 말하면 비교하기도 미안한 수준이었다. 대공과 함께 그의 마차를 탔을 때는 넓은 거실에 떨어져 있는 느낌이 들어 크게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상단의 마차는 달랐다. 애초에 이 마차는 스퀘일러 상단주가 주로 이용하는 마차였다. 즉 엄밀히 말해 안이 널찍한 마차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마차가 덜컹거리면 대공과 몸이 맞닿았다.

맞은편에 앉아서 그나마 나았다고 해도 무릎이 자꾸 부딪혔다. 최대한 몸을 웅크려 봐도 마차가 보통 덜컹거려야지. 대공이 슬림한 체형이라고는 하나 거의 190인 키를 가졌다. 키가 그렇게 큰데 닿지 않으면 이상했다.

‘하기야 그렇다고 그 작은 마차에 메르헨을 태우긴 싫었겠지.’

흥. 에스티아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건 비가 다 가려 막상 풍경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대공의 얼굴을 보는 것보다 낫겠다 싶었다.

-영애에 대한 소문이 원래는 좋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에스티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상하게 그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차유진인가 뭔가 학벌이 별로라면서? 왠지 김 사장이 무식하다고 그러더라고.

모진 말을 하는 건 현실, 소설 따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에스티아는 대공이 했던 말을 곱씹을수록 대공이 미워졌다. 에스티아가 오죽 못되게 굴었으면, 하고 이해해 보려고 해도 그게 잘 안 됐다.

결국 자신은 이제 에스티아이니, 그녀는 결국 자신의 편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평생을 에스티아로 살아야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까 그 말과 자신을 분리할 수가 없었다.

덜컹.

마차가 위로 튀어 올랐다. 에스티아의 팔이 중심을 잡기 위해 허공을 휘저었다. 하지만 허공에 무언가 잡힐 리가 만무했다. 에스티아는 자신의 손이 아래로 푹 꺼지는 걸 지켜보았다.

차라리 딱딱한 바닥에 부딪히는 게 나았을걸. 에스티아는 곧 이어진 상황에 참담함을 느꼈다.

만약 누군가 이 광경을 본다면 길게 볼 필요 없이 에스티아가 대공에게 안겼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폭 안겨 있었다.

에스티아는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의 얼굴은 완전히 대공의 가슴에 파묻혀 있었다. 게다가 그의 ‘본능적인 매너’인지는 몰라도 대공은 한 팔로 자신을 안고 있었다.

잠시 멍 때리던 에스티아는 황급히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마차가 한 번 더 덜컹했다. 그로 인해 더욱 깊이 대공의 품에 안긴 꼴이 되어 버렸다.

‘아, 이러다가 또 지 혼자 괜한 오해해 버리면!’

에스티아는 일어나려는 시도를 다시 해 보았지만 이번에도 실패했다. 비포장도로는 여간 울퉁불퉁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비까지 내려 길은 더 엉망이 된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믿지 않더라도 변론을 하려는데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가만히 있으세요. 또 영애가 손을 휘젓다가 얼굴을 맞고 싶진 않으니까.”

그 순간 그의 목소리가 떨렸던 것도 같았다. 자칫 수줍어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을 만큼.

잠시뿐이지만 대공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곧 그 생각을 버렸다. 목소리가 정말 떨렸다면 이 상황이 싫어서 그런 거겠지, 아니면 마차가 계속 흔들려서 그런 거겠지, 생각했다.

그가 이 순간을, 떨려 할 리가 없었으니까.

* * *

마차가 상단 앞에 멈춰 서자마자 에스티아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마부가 마차 문을 열기도 전에 먼저 문을 열고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몸에 온통 쥐가 나서 몸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러댔지만 상관없었다.

에스티아는 두 손으로 눈 위를 가리고는 상단 건물로 뛰어갔다. 그 뒤를 대공이 지긋이 바라보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온 에스티아는 축축한 로브를 벗어 던졌다. 가벼운 로브였지만 물에 젖으니 무거웠다. 외출용 드레스가 몸에 딱 달라붙어 있었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에팅?”

에스티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외쳤지만 대답이 없었다. 가게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에스티아가 한숨을 쉬며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발이 미끄러워 걸음이 떨렸다.

“그러다가 넘어지시겠습니다.”

어느새 가게 안으로 따라온 대공이 에스티아에게 말했다. 에스티아는 대공의 말을 무시하며 다시 에팅을 불렀다.

‘아씨, 여분의 옷 좀 빌리고 싶은데.’

축축해도 너무 축축한데. 결국 가게 안에서 걸칠 것을 찾아보려고 몸을 움직이는데, 언제 왔는지 대공이 바로 그녀의 옆에 있었다.

“……!”

어우, 누가 기사단장 아니랄까 봐 기척도 없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을 하려나 들어 보려는데 대공이 두 손을 그녀에게 뻗었다.

설마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는 건가 싶어 방어 태세를 취하려는데 몸 위에 무언가가 얹어졌다.

“이렇게 찾아서 언제 찾으시려고요.”

에스티아는 자신의 어깨를 감싼 천을 바라보았다. 담요였다.

“친구분한테 이런 꼴 보여 주시려고요?”

에스티아는 그제야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옷이 달라붙어 가슴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괜히 민망해져 에스티아는 담요를 여몄다.

“……감사해요.”

“매번 밉다, 증오스럽다, 이런 말만 듣다가 영애한테 감사의 말을 들으니 새롭네요.”

음, 방금 한 말은 취소다.

“그런 말도 감정이 있어야 하는 거죠.”

에스티아는 휙 뒤를 돌았다.

“앞으로 전하께서는 들으실 일 없을 겁니다.”

“그거야 두고 봐야 아는 거고.”

속에서 무언가가 다시금 울컥 올라왔지만 에스티아는 겨우 참았다.

“그럼, 두고 보죠 뭐.”

에스티아가 고개만 돌린 채로 싱긋 웃었다. 음소거를 하고 본다면 꽤 다정해 보일 모습이었다.

그래서 막 창고에서 나온 에팅의 눈에는 아가씨와 대공이 퍽 사이가 좋아 보였다. 아니, 단순히 좋아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무척 잘 어울렸다. 구석에 밀어 두었던 열등감과 질투심이 튀어나올 만큼.

“에팅!”

참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에팅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에스티아가 에팅을 향해 총총 뛰어오고 있었다.

“아가씨.”

미소를 짓고 싶었지만 입꼬리가 굳은 듯 올라가지 않았다.

“에팅, 왜 그래? 어디 아파? 안색이 안 좋아.”

에스티아가 깜짝 놀라며 에팅의 뺨에 두 손을 갖다 댔다. 에팅은 차갑지만 부드러운 손길에 한번, 에스티아의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에팅의 눈에 담요가 바닥으로 흘러내린 것이 보였다. 그 장면 뒤로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에스티아의 어깨가 보였다.

에팅은 두 가지의 충동을 느꼈다. 하나는 그녀의 어깨에 다시 담요를 덮어 주고 싶다는 충동, 다른 하나는 그녀를 껴안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에팅?”

에팅의 안색이 더 안 좋아지자 에스티아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에팅의 눈이 잘게 떨렸다. 약간은 창백해졌지만, 여전히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에스티아 아가ㅆ…….”

“영애.”

에팅의 목소리가 허무하게 꺼졌다. 대공이 바로 그녀 뒤에 서 있었다.

“담요 흘리셨습니다.”

대공이 에스티아의 어깨 위에 다시 담요를 둘러주었다. 긴 손가락이 에스티아의 쇄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심스럽지만 집요한 손길에 에스티아의 얼굴이 벌게졌다.

에팅이 그걸 보고 거들어 주려고 하는데 대공과 눈이 마주쳤다.

에팅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형형한 눈빛에 그대로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눈빛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나, 에팅이 그런 허황된 상상을 하는데 2층에서 메르헨이 내려왔다.

“전하!”

메르헨이 환하게 웃으며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메르헨, 그러다 넘어집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대공의 눈빛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에팅은 겨우 숨을 토해 냈다.

“오시는 데 불편하지 않으셨어요?”

메르헨의 손이 부드럽게 대공의 소매를 붙잡았다.

“영애가 편히 오셨다면 상관없습니다.”

착각인가? 에팅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에팅, 상단주님 위에 계시지?”

“네? 네…….”

에팅이 얼이 빠진 채 대답했다.

“그럼 가자. 상단주님께 폐하와 나눈 얘기 들려 드려야 해.”

에팅이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하, 셰린포드 영애. 대화 나누세요.”

“네, 고마워요, 영애.”

메르헨이 부드러운 곡선을 입가에 그렸다.

에스티아는 메르헨에게 목례를 건네며 둘의 곁을 지나쳤다.

이상하게 오늘은 그 둘을 보기가 힘들었다.

* * *

한편 웬트워스는 자리를 비운 글레멘드 집사 대신 사용인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웬트워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는 눈앞의 서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기어이 이 불충한 가신들이 가주가 없는 틈을 타 후계자를 괴롭힐 모양이었다. 그도 아니면 이럴 이유가 없다.

가신들이 에스티아에게 가신 회의를 요청했다. 웬트워스의 눈빛이 깊은 염려 속에 잠겼다.

원래 에스티아는 데뷔탕트를 치르면서 소 공작이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때 가문에서 ‘안 좋은 일’이 생기고 거기에다 대공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에스티아는 점점 총명함을 잃어 갔다. 기어이 그녀의 아버지는 책봉식을 미루었다.

유일한 후계자이지만 그저 영애로 남는다는 건 불명예다.

‘그때 사교계에서도 엄청 수군거렸지.’

웬트워스는 그때를 떠올리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이라도 그녀의 편이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가신들은 그녀를 비웃기 바빴다.

처음에는 걱정하기도 했더랬다. 유일한 후계자가 데뷔탕트까지 치렀는데도 여태 후계자로 임명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가신들은 에스티아 대신 줄을 댈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신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그 후계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기행을 펼치고 있다. 그들은 그것이 못마땅하면서도 탐이 나는 것이다. 자신들의 배를 더 부르게 할지도 모르니까.

그들이 자신의 주군을 삼키려 한다. 웬트워스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를 지켜 줄 가족, 그 존재가 없다.

다만 그녀를 통해 이득을 보려는 ‘아버지’가 있다.

단 한 번도 딸을 사랑한 적 없는,

로셸 글레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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