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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24화 (25/141)

24화 - 다시 같이

가주님이 폰스탄 왕국으로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무슨 연휴로 가신 건지 웬트워스도 알지 못한다. 소수의 경호원과 집사만 대동하셔서 떠났을 뿐이다.

떠나기 전에 에스티아에게 남기는 인사는 없었다. 그저 집안을 잘 관리하고 에스티아를 잘 ‘통제’하라는 지시만 있었을 뿐이다. 에스티아도 아버지가 자상한 말을 남길 거라고 기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때도 에버하르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

‘한 번은 답장하실 수 있잖아요, 한 번은.’

웬트워스는 우연히 그 편지의 내용을 보았다. 일부러 보려 한 건 아니었다. 울다 지친 아가씨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 주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눈물 자국에 흐려진 글씨를 보았고.

웬트워스는 차라리 아가씨가 평민을 좋아하는 게 나을 거 같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사랑만 있으면 되는 아가씨이니 신분만 포기하면 이룰 수 있는 사랑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도 가주님을 떠올리고는 곧 사라졌지만.

그래도 그렇게 되면 도주는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웬트워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쓸모없는 가정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자꾸 든단 말이다. 이제 대공은 에스티아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걸.

그나마 다행인 건 요즘 아가씨가 진짜로 대공 전하를 포기하는 거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웬트워스도 기뻤다. 아가씨가 더는 무의미한 사랑을 계속하지 않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 하지만…….

-에스티아를 잘 보거라, 웬트워스. 헛짓거리하지 않도록.

로셸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공에게 보낼 귀한 아이이니 티끌만큼이라도 금이 가면 안 돼. 잘 알겠지.

웬트워스는 몸을 떨었다. 자신을 망해 가는 남작 가문에서 거둬 준 은인이지만 처음부터 마음이 가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 어려 자신에게 낯을 가리는 에스티아에게 정이 갔다. 말은 틱틱거리지만 한 번도 웬트워스를 함부로 대한 적이 없었다.

주군은 꼭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야 하는 건 아닐 터였다. 웬트워스는 9살 때 이미 자신의 주군을 정했다.

그래서 가신들을 그냥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에스티아가 설령 차기 후계자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게 감히 그들이 몰래 범하는 비리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겨우 그런 버러지들이 자신의 주군을 물어뜯으려고 한다. 웬트워스는 잘 알고 있다. 그동안 에스티아가 얼마나 힘겹게 삶을 버티어 냈는지. 만약 다른 사람들이 가주가 자신의 딸을 어떻게 대했는지 알면 기함할 것이다.

그가 검을 배운 이유이기도 했다. 주군이 정말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그게 누구든 베어 버리기 위해서. 하늘 아래 그보다 위에 있는 사람은 오직 에스티아뿐이었다.

어느 제국의 황제를 데려와도 에스티아보다 귀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겨우 그런 놈들이 건들려고 해.’

아마 온갖 비난과 모욕을 섞어 그녀를 쓰러트려 들 것이다. 자존감을 꺾어 놓아 자신들에게 복종하도록 만들겠지.

그 꼴을 어떻게 봐.

웬트워스를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를 실은 글레멘드 마차가 저택을 출발했다.

* * *

에스티아는 에팅이 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남자 옷이라 헐렁하긴 했지만 드레스보다는 훨씬 편했다. 어차피 평범한 귀족 영애로 살기는 글렀으니 아예 남자 옷을 입고 다닐까도 싶었다. 아예 이 세계의 코코 샤넬이 될까도 생각해 봤다. 최초의 여성 정장 창시자! 꽤 괜찮은데?

에스티아는 벨트를 둘러 바지를 적당하게 졸라맸다. 보송보송한 새 옷을 입으니 기분이 좋았다. 물론 다시 비에 젖긴 하겠지만 딱 달라붙는 드레스보다는 나으리라.

에스티아는 긴 머리를 틀어 올렸다. 요 근래에 이 거추장스러운 머리를 자를까 싶었다. 어차피 이제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도 없으니.

“아가씨, 다 입으셨습니까?”

에팅이 조심스럽게 방문을 노크했다.

“응, 에팅. 들어와.”

에스티아는 머리를 둥글게 묶었다. 모자 따윈 쓰지 않았다.

에팅은 조금씩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다 에스티아의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저 평범하던 자신의 방이었다. 변한 거라고는 에스티아가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고 서 있다는 것뿐인데도 방의 분위기가 전혀 달라 보였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옷이 너무 잘 어울려서 그런 걸까. 아니면 시원하게 머리를 틀어 올린 그녀의 모습이 빛나 보여서 그런 걸까.

“고마워, 에팅. 만난 이후로 도움만 받네.”

에스티아가 겸연쩍다는 듯이 웃었다. 에팅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세요, 아가씨. 아가씨가 저희 상단에 도움을 준 것만 해도 비교할 바가 못 되는데요.”

에팅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근데 정말 그럴 것이, 작년과 비교해 보면 감히 비교하기가 미안할 정도의 수익을 창출할 정도였다. 이미 이런저런 용병단 및 단체에서 엄청난 액수의 선금을 들고 올 정도였다.

스퀘일러는 그런 에스티아가 정말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원래 가끔씩 만나며 예뻐하던 아가씨였지만 지금은 진짜로 아끼는 게 눈에 보였다. 하기야 성격도 저리 다정다감한데 상단인으로서의 선구안까지 갖고 있으니 오죽하랴.

“아니야, 에팅. 운이 따라 줬어. 옷은 내가 깨끗이 빨고 돌려줄게.”

에스티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에팅은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사적으로 에스티아와의 연결 고리가 생기는 거 같아 기분이 좋았다. 옷쯤이야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었다.

“아, 아니면 에팅, 언제 한번 우리 저택으로 와. 내가 제대로 대접할게!”

에스티아는 손뼉을 딱 치며 에팅에게 다가왔다.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보통 귀족 영애들이 뿌리는 인위적인 향수 냄새가 아니었다. 꽃이 바람에 흩날릴 때 나는 달콤한 향이었다.

에스티아에게서는 자주 풀 향이 났다. 신기한 건 이 냄새가 다른 상인들한테서도 나는 데도 에스티아의 향기는 뭔가 더 푸르른 느낌이 난다는 것이다. 에팅은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에스티아가 좋았다.

“초대해 주신다면 저야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죠, 아가씨.”

“혼자 와도 좋고, 다른 상인들이나 상단주님과 와도 좋아. 에팅은 언제라도 환영이야!”

에스티아는 팔을 양쪽으로 활짝 폈다. 에팅은 순간 그 작은 품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저급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정도로 수수한 에스티아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그런 의미로 에팅…….”

활기차던 에스티아가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작은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상단 마차 좀 빌릴 수 있을까? 대공 전하의 마차를 얻어 타고 와서 마차를 타려면 마부를 또 구해야 하거든.”

에팅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스티아라면 마차는 물론이고 돈까지 빌려줄 수 있는 투자자였다.

“당연하죠, 아가씨! 그걸 말이라고요. 이 날씨에는 마차 구하시기도 힘들 겁니다. 그리고 안 빌려 드리면 저 상단주님한테 혼납니다.”

에팅이 장난스러운 투로 말하자 에스티아의 표정이 풀어졌다. 에스티아가 아이같이 웃었다.

“고마워, 에팅. 이 상단에 네가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저, 그럼 아가씨…….”

에팅이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그걸 본 에스티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에팅? 편하게 말해. 다 들어줄게.”

에스티아가 싱긋 웃었다. 에팅의 얼굴이 더욱 벌게졌다.

“그, 그러니까 저랑 같이…….”

똑똑.

“같…… 응?”

에팅이 고개를 돌렸다. 문도 열려 있는데 누가 노크를 하나 했더니 대공이었다. 눈빛이 유독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두 분이서 같이 마차를 타고 가시려고요?”

대공은 분명 에스티아에게 묻고 있었지만 시선은 에팅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런 거였어, 에팅?”

에스티아가 대공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에팅에게 물었다. 다만 날카로운 시선은 대공에게 보내고 있었다.

“네, 아가씨.”

에팅은 괜히 기가 죽었다. 이런 자신이 무척 싫었지만 어쨌든 이 상황에 끼어든 사람이 무려 ‘대공’이었다. 황제 다음의 권력을 가진.

“친구 분과 ‘우정’을 다지시는 것도 좋지만 두 분이서 같이 마차를 탈 이유는 없겠군요.”

이건 또 뭔 소리래. 에스티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대공은 꼭 핵심적인 부분을 나중에 얘기해서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전 좋습니다. 안 그래도 에팅을 한 번 저택에 초대하고 싶었거든요.”

보나 마나 또 태클을 거는 거겠지. 에스티아의 시선을 돌렸다.

“그럼 웬트워스 남작은 그 먼 길을 다시 홀로 돌아가야겠군요.”

“응? 웬트워스가 왔어요?”

깜짝 놀란 에스티아의 입에서 원래 말투가 튀어나왔다.

“웬트워스가 왜…….”

“요즘 영애의 행보로 인해 영애 가문의 가신들이 회의를 요청했다고 하더군요.”

“아.”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작은 지금 셰린포드 영애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영애가 굳이 에팅과 그 작은 마차를 타고 가시겠다고 하면 제 선에서 돌려보내지요.”

‘내 수행원인데 왜 자기가 돌려보내!’

에스티아의 눈빛이 번쩍했다. 대공의 의도가 뻔히 보였지만 그렇다고 에팅하고 가겠다고 바득바득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에팅, 미안해. 저택은 다음에 초대할게.”

“괜찮아요, 아가씨. 편하실 때 언제든 초대해 주세요.”

“그럼 전 메르헨에게 인사를 하고 오죠.”

“인사요?”

에팅과 손을 마주 잡던 에스티아가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홱 돌렸다.

“제 저택으로 가는 길은 아직 복구 중이고, 셰린포드의 마차는 바퀴가 부서졌다더군요.”

“그러니까 겸사겸사 다시 저희 저택으로 가시겠다고요?”

뭐야, 이거! 뭔가 이상하다. 왠지 모르게 되게 인위적인데 뭐가 문제인지 딱 짚기가 어려웠다. 왜 바일 가문으로 가는 마찻길은 아직도 복구가 안 되었으며, 셰린포드 마차는 왜 갑자기 바퀴가 부서진 걸까?

“네, 웬트워스가 부탁하던걸요. 글레멘드 가신들이 가신 회의를 소집하니 거기서 영애를 변호해 달라고.”

에스티아는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결국 미리 생각하고 있던 경우의 수가 슬슬 발생할 모양이었다.

상단에서 일하는 걸로 그녀를 물어뜯으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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