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 빚
상단 가게에 도착한 웬트워스는 마차가 서자마자 마차에서 내렸다. 상단 앞에는 셰린포드 가문의 마차와 바일 가문의 마차가 세워져 있었는데, 셰린포드 가의 마차는 바퀴가 부서져 주저앉아 있었다.
왠지 모를 촉이 선 웬트워스가 마부에게로 다가갔다.
“이게 뭔 일이오?”
웬트워스가 마차를 가까이 보러 허리를 숙였다. 마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르겠습니다, 나리. 어떤 미친놈이 바퀴를 부순 거 같습니다. 올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마부는 혀를 쯧 찼다. 날씨도 이 모양인데 갑자기 마차까지 망가지니 막막하리라.
“그래서 어쩌기로 하였소?”
“다행히 바일 대공 전하께서 본인의 마차를 빌려주신다는 군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음? 그 말인즉슨 다시 에스티아와 마차를 타려고 했다는 건가? 그 작은 상단 마차로?
“아…… 그럼 수고하시오.”
“들어가십시오, 나리.”
마부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고는 다시 보수 작업에 열중했다. 웬트워스는 가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식이 맞다면 이곳에 에버하르트 바일, 메르헨 셰린포드, 그리고 자신의 주군이 있을 터였다.
웬트워스는 에스티아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2층에서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렸다. 아가씨인가 싶어 계단으로 향하던 웬트워스는 복도를 걸어오는 대공과 마주쳤다.
“잘 지내셨습니까, 대공 전하.”
웬트워스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남작은 여전히 날 반가워하는 눈치는 아니군요.”
대공의 말투는 점잖았지만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다.
“수행원이라는 분이 집에 들어오시질 않아서 그만두신 줄 알았습니다.”
빠직. 웬트워스는 저도 모르게 대공을 노려볼 뻔한 걸 참았다. 약초의 현황을 파악하느라 분주했던 거뿐인데 대공은 그걸 또 비꼬고 있었다.
“다시 저희 저택으로 오시는 것이지요?”
“마치 확신이라도 하는 말투인데.”
대공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웬트워스는 그 표정이 못내 못마땅했다.
“전하의 마차를 셰린포드 아가씨께 빌려 드렸다고 마부한테 들었습니다. 작은 상단 마차로 그 어지러운 길을 가실 일도 없으니 답은 하나죠. 그래서 말입니다만, 전하.”
“?”
대공이 나른하다는 듯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였다.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표정이었다. 역시 전이나 지금이나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었다.
“전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움이라니요?”
웬트워스는 이를 꽉 물었다. 에스티아를 지키고 대공을 그녀의 곁에서 치워 버릴 방법은 이거밖에 없었다.
“가신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가신 회의라…….”
대공이 다시 고개를 바로 세웠다. 추측하기 어렵진 않았다. 보나 마나 귀족 영애가 상인 노릇하는 걸 빌미로 조금이라도 뜯어낼 생각일 것이다. 차기 가주도 제압할 겸 더욱 심하게 몰아치겠지.
“가신들이 에스티아를 가만두지 않겠군요.”
대공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침착하고 평온한 표정이었다.
반면 웬트워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대공이 지금 그녀를 뭐라고 부른 거지?
‘……2년 만인가.’
웬트워스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원래 습관이 저도 모르게 나온 거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왠지 기분이 찝찝했다.
“아가씨가 귀족 영애처럼 처신하지 않는다 뭐라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대공 전하가 옆에서 아가씨의 손을 들어 준다면 잠시는 잠잠해지겠죠. 나랏일을 할 차기 가주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하면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제안을 받아들이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보증한 상단에서 몸을 담았다 한들, 황제가 직접 저택으로 와 그녀를 돕지 않는 한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황제 다음의 권력이, 바로 그 순간 그녀 옆에 있어야 했다.
* * *
마차 안 분위기는 당연히 숨 막혔다. 차라리 대공과 둘이 탔을 때가 나았다. 적어도 분위기가 이렇게 살벌하지는 않았으니까.
둘의 기 싸움은 첨예했다.
웬트워스는 대공에게 깍듯하게 대했지만 묘하게 날이 서 있었고, 대공은 그런 웬트워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크게 선을 넘거나 결례를 범한 건 아니어서 중간에서 중재하기도 애매했다.
에스티아는 좌불안석이었다. 둘은 틈만 나면 서로를 노려보기 일쑤였다. 에스티아가 중간중간 웬트워스에게 말을 건네면 웃어 주었지만, 말이 끝나면 바로 대공을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둘이 이러는 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에스티아와 남매처럼 자라온 웬트워스로서는 그녀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는 대공이 마음에 안 들었을 것이다. 반면에 대공인 그로서는 남작인 그의 태도가 못마땅했을 것이고.
게다가 그녀가 다시 웬트워스에게 살갑게 말을 건네려고 하면 대공이 툭툭 한마디를 던져댔다. 예를 들어,
“남들이 보면 군신 관계가 아니라 애틋한 연인 사이처럼 보이겠습니다.”
라던가,
“소문을 무서워하시는 분이 아니셨던가요.”
라던가.
웬트워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은 대공을 잡아먹을 듯 날카로웠다.
결국 에스티아는 입을 다물었다. 저택으로 가는 길이 너무나도 길었다.
* * *
“음, 이거 굉장히 어색하다.”
거울 앞에 선 에스티아는 어색하다는 표정으로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반면 자신의 아가씨를 아름답게 꾸민 메리와 카린은 내심 뿌듯하다는 표정이었다.
에스티아는 딱 붙는 사파이어색의 푸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귀에는 물방울 장식이 반짝반짝 달린 귀걸이를 달았다. 얼굴에는 파우더를 바르고 입술에는 핑크빛이 도는 립을 발랐다. 이렇게 보니 진짜 공작 영애 같았다.
빙의된 이후로 줄곧 수수한 옷만 입었다. 불편한 옷은 전생에서도 지긋지긋하게 많이 입은 터였다. 드레스를 입더라도 편한 외출용 드레스만 입었다. 사교계 파티에 참석하지 않으니 굳이 치렁치렁 꾸밀 필요가 없었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아가씨.”
메리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곧 피라냐들에게 뜯길 아가씨가 안쓰러우면서도 그녀에게서 풍기는 고고한 분위기에 감탄스럽기도 했다.
“이상하지 않아? 입어서는 안 될 옷을 입은 느낌이야.”
“무슨 소리세요! 이런 옷 원래는 더 자주 입으셨잖아요. 대공…… 아, 아니에요, 아가씨.”
메리가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끝까지 안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대공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겠지. 억지로 치장하면서.
그때를 떠올린 건지, 곧 있을 회의가 걱정스러운 건지 두 하녀의 표정이 안 좋았다. 에스티아는 싱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 메리, 카린. 그래 봤자 길에서 스치면 그냥 잘사는 아저씨들이야.”
에스티아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메리와 카린은 곧 킥킥 웃었다.
“가신 회의가 4시랬지?”
“네, 아가씨.”
메리의 목소리가 다시 침울해졌다.
에스티아가 메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사용인이라고 생각한 에스티아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와.”
문이 천천히 끼익 열렸다. 에스티아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데 집중했다. 그런 그녀를 그는 지긋이 바라보았다.
“준비 중이시네요.”
“뭐야!”
귀걸이를 매만지던 에스티아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두 하녀도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여…… 여긴 왜 오셨어요? 옷은 왜 또 그렇게 갈아입으셨고요?”
에스티아는 이런 모습으로 그를 보는 게 민망해 괜히 시선을 돌렸다.
대공은 멀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비와 바람에 흐트러졌던 머리도 다시 깔끔하게 넘긴 상태였다.
“그야 웬트워스 남작과 거래를 했으니까요.”
“필요 없어요.”
에스티아가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메리와 카린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방에서 나갔다.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에스티아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곧 가신 회의라 같이 응접실에서 차를 마실 수도 없으니 그가 자리를 비켜 주는 게 맞았다. 하지만 대공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억지로라도 내보내야 하나 고민하는데 대공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 방은 그대로네요.”
“그대로요?”
대공의 말에 에스티아가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대공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렸을 때는 자주 왔으니까요.”
대공은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당연히 조금 바뀌기야 했지만 크게 다르진 않아요. 깔끔하지만 묘하게 정돈 안 된 느낌은.”
대공의 시선이 책과 서류가 널브러져 있는 에스티아의 테이블로 향했다. 에스티아는 괜히 민망해져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런가요? 전 잘 모르겠는데.”
“똑같습니다, 전이랑.”
그 말이 왠지 모르게 간지러워 에스티아는 괜히 자신의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얼굴도 화끈거리는 거 같았다.
‘미쳤다, 그런 말을 들어 놓고.’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서 에스티아는 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전하의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이번 건은 오해하셔도 좋아요. 그래도 싫습니다. 전하의 도움을 받는 건…….”
“미안하지만,”
대공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이건 남작과 나와의 거래입니다. 영애가 뭐라 할 건 아니죠.”
“그건……!”
“정 그러하시다면, 제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마무리하시면 되겠군요.”
깔끔하게? 어떻게 물어뜯을지 알면서!
여유로운 태도가 더욱 에스티아의 화를 돋웠다.
“차라리 제가 다시 웬트워스 남작과 이야기하고 오겠습니다. 전하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요.”
“유감스럽게도.”
대공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에스티아의 말을 가로막았다.
“웬트워스에게는 영애의 명령보다 영애의 안전이 더 중요한 거 같더군요. 저라면 남작을 설득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느니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겠습니다.”
“그래서 머리 굴리고 있었어요. 그 계획에는 전하는 없었고요. 가장 도움 받기 싫은 사람이, 전하였습니다.”
대공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를 한없이 옭아맬 듯한 눈빛이었다.
“상황을 한번 파악해 보시죠, 글레멘드 영애. 지금 영애에게 제일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나 같으면 뒤처리를 나중에 하더라도 도움을 받겠어요.”
“도움은 빚이에요.”
“……?”
“전하께서 아무리 웬트워스와 거래를 한 거고, 두 분이서 뭔가를 주고받음으로써 거래가 끝난다고 해도, 저한테는 빚이라고요. 그런 사적인 빚을 전하에게 지기는 싫습니다.”
“사적인 빚…….”
대공이 에스티아가 했던 말을 읊조렸다.
“어차피 그 빚은 아주 차고도 넘칠 텐데?”
주먹이라도 휘둘러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대공이 두 손을 에스티아의 어깨 위에 올렸다. 그러고서는 그녀를 잡아당겼다.
“이 모습을 보니 그때가 생각나네요. ……때.”
그 뒤로 대공이 에스티아의 귓가에 뭐라고 더 속삭였다.
에스티아는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 빌어먹을 한마디 때문에 회의는 아주 제대로 망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