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 필요 없어
중요한 거래처 미팅을 앞두었던 어느 날, 엄마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네 아빠가 도박을 했어.”
그리고 빚을 졌어. 엄마는 그 한마디를 덧붙였다.
전화는 곧 끊어졌다.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는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날 미팅은 아주 엉망이 되었다. 평소에 잘 마시지 않았던 술을 마셨고 곧 의식이 끊겼다.
그렇게 에스티아는 이 세계로 왔다. 어느 정도 정이 있어야 전생을 그리워할 텐데 워낙 막장이었던지라 별로 그립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에서 그녀의 사람들은 다정했다. 그 사람들만 곁에 있다면 왠지 두렵지 않았다. 이곳 세계를 공부하며 가문에서 내쳐졌을 때를 대비해 대책도 세워 놓고 있다. 이래 봬도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 정도는 두렵지 않았다.
물론 두렵지 않다는 게 실패하지 않을 거 같다는 건 아니다. 다만 실패해도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갔다 올게, 메리.”
에스티아가 메리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아가씨, 도망치셔도 돼요. 보통 무례하신 분들이 아니잖아요.”
메리의 눈가가 촉촉했다. 에스티아는 한 손을 들어 메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나도 엄청 무례할 테니까.”
에스티아의 장난스러운 투에 메리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지만, 곧 다시 울상이 되었다.
“괜찮아요, 메리. 내가 아가씨 옆에 있을 테니까.”
웬트워스가 에스티아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존재가 듬직했다.
전생에서 에스티아에게는 10살 어린 동생이 있었다. 부모님은 경제적인 능력이 거의 없어서 그녀가 그 집안의 가장이었다. 그녀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
부자가 아니어도 좋다. 보통 귀족 영애처럼 호화롭게 살지 못해도 좋다.
‘그냥 지금이 좋아.’
에스티아는 웬트워스의 손을 잡았다. 그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자, 웬트. 혹시라도 내가 누굴 때릴 거 같으면 말려 줘야 해.”
에스티아가 웬트워스의 손을 조물락거리며 눈을 찡긋 했다. 웬트워스가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같이 가담하는 건 안 됩니까?”
에스티아와 웬트워스는 마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시간이 다 되었는데요.”
옆에서 불쑥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에스티아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공이 손님용 소파에서 다리를 꼬고 그들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에스티아도 질세라 미간을 찌푸렸다.
“영애의 인간관계는 참 넓네요. 이렇게 다양한 ‘친우’ 분도 계시고. 정말 남매 같으십니다.”
저 오만한 표정은 도대체 언제쯤 안 볼 수 있을는지. 에스티아는 한숨을 픽 쉬었다.
“네, 그렇죠. 혹시 전하의 약혼녀가 되려면 인간관계가 협소해야 하는 건지요? 아, 그냥 궁금해서 여쭙는 겁니다.”
대공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 표정을 보고 뿌듯해진 에스티아는 보란 듯이 웬트워스의 손을 잡았다.
“가자, 웬트워스.”
“네.”
웬트워스가 응접실 문을 열었다. 에스티아가 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대공이 뒤에서 말을 툭 던졌다.
“오늘이었습니다.”
“네?”
또다시 의미 모를 말에 에스티아가 결국 뒤를 돌아보았다. 대공의 표정이 오묘했다.
“아까 영애의 방에서 제가 말했던 그날이요. 오늘이었습니다.”
에스티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지자 웬트워스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괜찮아.”
에스티아가 다시 웬트워스의 손을 잡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이상하다, 왜 이러지.
응접실 문이 닫히면서 대공의 모습도 사라졌지만 에스티아는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
대공이 했던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마음이 찢어질 거 같았다.
끔찍했다.
* * *
가신들은 양옆으로 10명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에스티아가 오자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표정은 심드렁했다. 몇몇은 표정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허유, 얼마나 물어뜯으려고.’
에스티아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당연히 상석에 앉았다. 그녀가 앉자 가신들도 그녀를 따라 착석했다. 웬트워스는 그녀의 뒤에 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가씨.”
그녀의 오른편에 앉은 가신이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엄밀히 말해 원래 에스티아의 능력을 따져 보았을 때 지금쯤 그녀는 소공작이 되었어야 했다. 몇 줄 안 나온 원작의 묘사대로라면.
하지만 에스티아는 사랑 때문에 여전히 ‘아가씨’이다. 그 사실이 왠지 마음을 쓰리게 만들었다.
“오랜만입니다. 카인 경.”
에스티아는 침착하게 그의 인사에 답했다.
당연히 지금의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웬트워스와 메리의 도움으로 그녀는 미리 그들의 이름과 정보를 외워 두었다. 그들은 가신들을 미리 불러 어떤 가신들이 각자 어디에 앉아 있는지 그녀에게 알려 주었다.
카인 백작. 들은 대로라면 가신들을 대표해서 그녀를 물어뜯을 사람이었다. 그는 가신들 중에서 가장 신분이 높고 나이도 많았지만, 본인이 직접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저희가 이렇게 모인 이유는 짐작하고 계시겠지요?”
그 말과 함께 매서운 시선들이 그녀에게 꽂혔다.
“웬트워스 남작이야 아가씨를 다 받아 주고는 있지만 저희는 가신으로서 아가씨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도요?”
가만히 듣고 있던 에스티아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올바르게 행동하는 건 앞서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따라가면 되는 법이죠. 저희는 글레멘드 가문의 가신으로서 마땅히 그럴 의무가 있습니다.”
그 말에 다른 가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같이 다 권위적인 표정이었다.
“그래서 저를 어떻게 ‘지도’하실 생각이신지요?”
에스티아가 싸늘하게 웃으며 물었다. 카인 백작이 옆자리 가신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요즘 입에 담기도 싫…… 힘든 일을 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천한 상인들이랑 같이 다니신다지요?”
에스티아는 말문이 막혔다. 신분제이니 당연히 귀족으로서의 자존심이 되게 셀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함부로 얘기하니 기가 막혔다.
“스퀘일러 상단은 작지만 결코 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말단 직원까지 전문적인 지식을 소유한 상단이에요.”
“어찌 되었든 상인이지요.”
카인 백작이 비웃듯이 입술을 비틀었다.
“과거에는 농민들보다 천한 이들이 상인이었습니다, 아가씨. 지금이라고 해서 고귀한 이들은 아니지요.”
“…….”
에스티아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하고 싶으신 말씀이 무엇인지요? 상단과 어울리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마땅히 상단과 작업을 진행할 인물을 고용하자는 것이지요. 저희 쪽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가씨.”
에스티아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전개에 한숨을 푹 쉬었다. 보나 마나 에스티아가 투자해서 발생한 수익을 자기들도 한몫 챙길 속셈인 것이다.
“안 그래도 귀족 영애가 평민들이나 할 천한 일을 한다고 사교계가 난리입니다. 가주님께서 들으시면 과연 가만히 있으실까요? 앞을 내다보십시오, 아가씨.”
백작이 책망하듯이 말했다. 말이 조언이지 거의 핀잔과 조롱이었다.
“상단과 일을 하는 건 저희한테 넘기시지요. 그럼 가주님한테는 저희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작이 으스대는 표정을 짓더니 가신들과 마주 보며 웃어 댔다.
“바일 대공 전하께서도 그 소문을 들으셨을 텐데, 창피하지도 않으십니까?”
아주 까딱하면 삿대질이라도 할 기세였다.
“그분과 맺어지고 싶으시면 귀족 영애다운 조신함을 보이셔야지요. 날카롭게 나오셔 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습니다. 뭐, 저희야 입조심 하겠지마는 소문이야 어찌 날지 모르니까요.”
즉, 자신들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가주와 대공에게 안 좋게 말하겠다는 의미였다.
“대공 전하한테 밉보이길 바라십니까? 설마요.”
백작이 다시 깔깔 웃었다.
“아가씨가요?”
마지막 이성이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에스티아는 씨익 미소 지었다. 그들이 간과한 게 있었다.
그날 거래처와의 미팅이 망한 건 그녀가 그 자리에서 발표를 망쳤거나 상처받고 질질 짜서가 아니었다.
“카인 백작.”
“예, 아가씨.”
백작이 여전히 실실 웃어댔다. 에스티아가 앞에 놓인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1골드는 제아무리 광을 내 봐야 1골드이고, 1억 골드는 진창에 처박혀도 1억 골드이지요.”
“예……?”
여유롭던 백작의 표정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에스티아의 말에 살짝 굳어 가기 시작했다.
“경이 저를 에스티아 글레멘드로 보지 않는 거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 그게 무슨 말씀…….”
백작이 어처구니없어하며 말을 이으려는 순간, 에스티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무슨……!”
백작과 가신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에스티아는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찻잔을 든 손을 꺾었다.
컵에 든 차가 에스티아의 옷으로 흘러내렸다.
* * *
그날 미팅이 망한 건 어디서 그녀의 소문을 듣고 온 거래처 사장이 그녀를 향해 패드립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앞에 든 물 컵을 들어 사장의 노트북에 들이부었다.
그 상황을 전혀 예상치 못한 사장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이 노트북에 뭐가 들었는지 아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모른다고 큰소리로 말하고는 사장의 가발까지 벗겨 버렸다. 그러고는 곧장 회의실을 나왔다.
두려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지금과는 달리 대책도 없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후회가 없었다.
‘어쩌면 여기에 올 운명이었을지도.’
에스티아는 손에 든 컵을 떨어트렸다. 장미가 그려진 찻잔이 힘없이 깨졌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푸른 드레스에 진한 얼룩이 생겼다.
“천한 일을 한다고 하시니 조금이라도 그에 맞게 보여야 되나 싶어서요.”
에스티아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그래도 어떡하죠. 설령 진흙이 묻어도 전 이 가문의 후계자인데.”
백작이 할 말을 잃은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요. 천박하다고 욕은 하고 싶은데 숟가락은 얹고 싶으신가요? 그럼 잘 보이셔야지. 난 앞으로 더 잘될 거라 굳이 ‘글레멘드’라는 이름이 필요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