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27화 (28/141)

27화 - 처신 잘하세요

에스티아는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잡아당겼다. 목걸이가 힘없이 끊기면서 보석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아버지한테 가서 말하세요. 대공 전하한테도 말하시고요. 전 이런 천박한 권력과 명예에 미련이 없습니다.”

“에스티아 아가씨!”

그러자 백작의 수족인 더킨스 남작이 소리를 빽 질렀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가주님은 어떨지 몰라도 대공 전하께서는 크게 실망하실 겁니다! 이렇게 경거망동하는 귀족 영애라니요!”

백작이 남작의 말을 수긍하듯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에스티아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웃었다.

그들은 대공이 이 집에 있는 걸 모르고 있었고, 웬트워스와 어떤 거래를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에스티아가 새어 나가지 않게 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에스티아는 웃었다. 거의 다 제압했다고 생각했다. 그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러고 보니 오늘이 그날이지요? 2년 전에 대공 전하가 아가씨께 청혼을 하려던 날 말입니다.”

에스티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걸 본 백작이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무릎 꿇으며 저한테 전하의 마음을 돌릴 수 있도록 도와 달라 하신 게 겨우 한 달 전입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백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에스티아는 몸을 떨었다.

2년 전 오늘, 대공이 그녀에게 청혼하려고 했다는 걸 어떻게 이들이 알고 있는 걸까. 왜 하필 오늘 대공은 그 사실을 말하고, 그들은 그걸 다시 그녀에게 얘기한 걸까.

왜, 왜.

에스티아는 드레스를 움켜잡았다.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너무도 선명해서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에스티아는 그 소리가 곧 과거의 에스티아가 내뱉는 비명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괜찮습니다.”

에스티아는 웃었다. 웃으려 했다. 그런데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흘러내려서 자꾸 입가가 일그러졌다.

“그때를 죽을 만큼 후회하니까.”

에스티아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회의장의 문이 열려 있었다.

“그러니 백작은…….”

에스티아는 백작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나를 모욕했다가는 글레멘드 가문과 척을 질 줄 아시오.”

에스티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가씨! 어찌 백작님께 함부로 말씀하십니까!”

로민스 자작이 기함하며 외쳤다. 어이없어하는 에스티아와 반대로 백작은 여유롭게 웃었다.

“아가씨와 척을 진다고 이 가문과 척을 진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백작이 에스티아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주제를 아십시오, 아가씨.”

“주제를 알라?”

에스티아는 지지 않고 백작에게 내뱉었다.

“그건 내가 백작에게 하고 싶은 말입니다.”

에스티아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 눈빛에 백작의 눈이 흔들렸다. 결국 백작이 입에 담기 힘든 말을 뱉으려고 할 때 그들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래, 글레멘드 가문과 척을 질 일은 없겠지.”

에스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동요하여 그를 끌어들이고 말았다.

“대공 전하!”

백작이 대공을 보고는 펄쩍 뛰었다. 다른 가신들도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바일 가문과 척을 질 거라는 걸 알아야 할 겁니다, 카인 백작.”

“예……?”

백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게 무슨……!”

“황제 폐하께서 에스티아 영애의 공로를 인정하셨습니다. 약초의 올바른 유통과 공급을 영애와 함께 의논하셨고요. 곧 공식적으로 공표하실 예정입니다. 그러니 카인 백작.”

대공이 백작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백작의 표정이 고통스럽다는 듯이 일그러졌다.

“내 앞에서 다시 영애를 모욕하면 내일은 없을 줄 아시오.”

이번에는 에스티아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대공의 표정은 침착했지만 분노가 가득했다.

“에스티아.”

“네.”

“혹시 회의할 안건이 더 있습니까?”

대공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평소와 달리 비꼬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에스티아는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있더라도 오늘은 파하고 싶습니다.”

“그럼 저와 함께 가시죠. 이 이상 감히 말을 꺼낸다면 나와 황제 폐하까지 모욕하는 걸로 간주할 테니.”

언뜻 보면 에스티아에게 말하는 듯했지만 엄연히 백작과 가신들에게 말하는 거였다. 그들도 그걸 알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공은 에스티아의 손을 잡았다. 전과는 달리 따뜻했다. 대공은 에스티아의 손을 잡고 회의장을 나와 에스티아의 방으로 향했다.

웬트워스는 물론 다른 사용인들까지 입을 떡 벌렸다. 특히 거래를 제안한 웬트워스는 당혹 그 자체였다.

물론 알고 있었다. 대공이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과거에는 에스티아가 그에게는 그저 약혼녀 후보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꼭 잡아야 할 상단 투자자이다. 혹시 가신들이 도를 넘는다면 마법으로 신호를 보내서 그를 부를 예정이었다.

하지만 대공은 그가 신호를 보내기 전에 나타났다. 마치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이.

웬트워스는 불안했다. 이상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모르는 게 있는 거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 * *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에스티아는 등을 돌렸다. 울음을 참으려고 했지만 자꾸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북받쳐 올랐다. 등 뒤에서 대공이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에스티아는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다. 그리고 뒤를 돌았다.

대공의 얼굴은 눈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언뜻 걱정하는 듯 보였다면 그건 다 자신이 만들어 낸 상상일 것이었다.

“왜 하필 오늘 저에게 그 얘길 하신 거죠?”

“무엇을요.”

대공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에스티아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했지만 그녀는 눈물을 참아 냈다.

“2년 전에 전하께서 저한테 청혼을 하려고 했던 사실을요. 그리고 카인 백작은 그걸 어떻게 안 거죠?”

에스티아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혹시 의도적으로 저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그러신 건가요?”

“영애, 착각하지 마세요. 카인 백작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그건 아주 ‘은밀한’ 일이었으니까.”

“은밀한 일이었다면……?”

“당신조차 몰랐을 거라는 소리입니다.”

대공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에스티아는 그저 매섭게 대공을 노려보았다.

“어쨌든 거래는 성립되었네요. 전하는 저를 도와주셨고 웬트워스가 제안한 대로 전하한테 서약서를 작성하겠습니다.”

에스티아는 눈을 깜빡였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제 명예를 걸고 전하의 약혼녀가 되지 않겠다는 서약서요.”

“됐습니다.”

귓가에 떨어지는 단호한 말에 에스티아는 움찔했다.

“그 빌어먹을 서약서 말고 해 주었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에스티아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들었다.

“약속했죠. 나한테 마음이 없다는 걸 메르헨에게 헌신함으로써 증명하겠다고.”

“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도움 받고 쓰는 거 말고 제 행동으로 증명하려고 했다고요!”

에스티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결국 눈물이 더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한테 도움을 받았다는 게 자존심 상했다. 거기에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까지 더하여 후회할 말을 더 부추겼다.

감정의 크기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다른 사람의 감정이 흘러들어와 슬픔과 분노에 더 살을 붙이는 거 같았다.

대공이 오늘의 2년 전 자신에게 청혼하려 했다고 한 말에 그렇게 동요한 이유도 그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마음이 한껏 슬픔에 젖은 듯한 느낌이 들었던 이유. 그저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거에 그치지 않고 그렇게 흔들렸던 것도 다른 사람의 감정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바로 진짜 ‘에스티아 글레멘드’의.

“그럼 다른 요구도 들어 드릴 테니까, 약혼녀가 되지 않겠다는 서약서도 작성해 드릴게요. 그래야 전하께서 제 진심을 믿으실 테니까.”

“말했잖습니까. 그 서약서는 필요 없다고.”

하. 에스티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증거를 남겨 두셔야 혹시라도 제가 ‘또’ 그러지 않죠.”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이 대공에게로 향했다. 대공도 지지 않고 그 눈빛을 마주했다.

“어차피 믿을 수도 없는 서약서입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약조한 각서도 수십 장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깟 서약서를 믿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애초에 전하는 절 믿기는 하셨나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 번이라도 절…… 사람 대 사람으로 믿으신 적은 있으세요?”

만약 진짜 그녀의 감정이 이 속에 있다면 에스티아는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분노’라는 감정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녀는 그를 버리고 싶었으니까.

“제가 그동안 전하를 괴롭게 했고, 전하의 연인을 힘들게 했습니다. 어쩌면 전하께서 절 이렇게 대해도 할 말이 없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렇게 망가졌었기 때문에 이제 전하를 사랑하는 게 지긋지긋할 거 같다는 생각은 안 하세요?”

“지긋지긋…… 하다고요?”

“네, 지긋지긋해요. 전하를 사랑하는 게 지긋지긋하다고요. 설령 하늘이 뒤집혀 전하가 저를 사랑한다고 해도 이제는 제가 싫다고요.”

대공의 얼굴 근육이 꿈틀거렸다. 분노를 애써 참고 있는 거 같았지만 에스티아는 멈추지 않았다.

“빚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지는 거예요. 전하와 저 같은 관계가 아니라.”

“당신과 제 관계가 어떤데요.”

대공이 이를 악물며 물었다. 어떻게든 대답을 듣게 다는 듯 눈빛이었다. 에스티아는 뭘 묻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서로를 고통스럽게 하는 관계.”

“…….”

“서로를 망가뜨리는 관계, 그래서 이제는 제발 끝내야 하는 관계!”

침착하던 에스티아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대공이 한 발자국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자, 그래서 어떻게 증명할까요, 제가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면 전하와 끝낼 수 있나요?”

“나랑 끝내고 싶으면…….”

대공이 한 손을 에스티아의 뺨에 올렸다.

“앞으로 처신 잘하세요.”

언뜻 들으면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눈빛은 칼을 품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내가 한눈을 팔면 나와 스친 모든 여자들한테 행패 부리고 다닐 거 같거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