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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28화 (29/141)

28화 - 이 정도 가지고

그 말을 끝으로 대공은 방에서 벗어났다. 뺨이라도 한 대 갈겨 줄걸. 어제 대공이 한 말 덕분에 에스티아는 오늘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기분을 달래겠다고 메리가 아침부터 달려와서 조잘거렸다.

“아가씨가 대공 전하와 황제 폐하께 인정을 받았다는 소문이 자자해요! 부인들과 영애들이야 뭐라고 하든 말든, 여기저기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어 난리래요! 약초를 얻으려면 무조건 아가씨한테 잘 보여야 한다고요.”

메리가 두 손을 모아 가며 열심히 자신이 들었던 걸 털어놓았다.

“게다가 그 스퀘일러 상단주가 아가씨를 애제자로 받아들인 거 같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다른 상단의 상단주들도 아가씨를 뵙고 싶어 한 대요. 상단인으로서 능력이 출중한 거 같으시다고요.”

결국 메리의 노력에 에스티아가 백기를 들었다. 에스티아가 겨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 많이 바빠지실 거예요. 오늘만이라도 푹 쉬세요, 아가씨.”

메리가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야, 난 가만히 있으면 더 불안해. 아버지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마냥 시간을 보낼 순 없어.”

“아가씨…….”

메리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모두가 쉬쉬하고 있을 뿐, 이 저택의 모두가 염려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최대한 실적을 쌓아야 해. 내가 ‘영애’로서는 쓸모가 없을지라도 ‘사람’으로는 쓸모 있게 보이도록.”

“네…….”

메리가 고개를 숙였다. 에스티아가 침대에서 일어나 메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이것보다 더한 일도 겪었는데 뭐. 그래서 메리…….”

에스티아가 주저하며 말을 흐렸다. 번개가 번쩍하며 안으로 빛이 쏟아졌다.

“대공은?”

그 말이 혀에 감겨 잘 떨어지지 않아 온 힘을 다해 뱉어야만 했다.

“전하께서는 일찍 기사단으로 훈련을 지휘하러 가셨어요. 근데…….”

메리가 에스티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메리가 말을 잇지 못하자 에스티아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계단 쪽을 한참을 보시다가 가셨어요. 마치 아가씨를 기다리는 것처럼.”

“…….”

더 하지 못할 말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 말이 무엇이든 에스티아는 결코 다정한 말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얼마나 더 거지 같은 말을 하려고.”

“네?”

“아니야.”

에스티아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메리가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 아가씨한테 전해 달라는 말이 있었어요.”

“뭔데?”

혹시 그 말을 전하려고 남아 있었던 걸까? 에스티아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전하께서 이번 주 내로 기사단에 한 번 방문해 달라고 하셨어요. 기사들이 약초 수급 총책임자를 직접 봐야 약초를 먹겠다고 했대요.”

본인이 그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메리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악녀로 소문난 에스티아니 기사들이 아직 완전히 그녀를 못 믿는 듯했다.

“괜찮아. 이 정도 가지고 상처받진 않아.”

에스티아가 자상하게 메리를 달랬다. 하지만 내심 속으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약초에 독이라도 탔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에스티아가 한숨을 쉬며 책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자리에 앉은 다음 편지지를 꺼내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궁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멀진 않았지만 순탄하지 않았다. 마차는 잠시도 쉬지 않고 덜커덩거려 엉덩이가 배길 정도였다. 에스티아는 벽을 짚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러다 엉덩이에 쥐가 날 판이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길로라도 갈 수 있다는 거에 감사해야 할 상황이었다. 다른 길은 산사태로 인해 흙에 파묻히거나 물에 잠기는 등으로 아주 아수라장이었다. 약초 수급을 떠나서 엄청난 장마로 온 나라가 절규하는 판이었다.

에스티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왕 이럴 거면 신관에 빙의라도 했으면 이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까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만약 그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그런 상상을 하려는데 마차가 크게 요동쳤다. 에스티아는 그 움직임에 옆으로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나며 마차가 기울어졌다. 다행히 그 소리는 곧 멈추었지만 에스티아는 심장이 벌렁거리는 걸 느꼈다. 마부가 허겁지겁 마차의 문을 열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마부는 심하게 넘어졌는지 얼굴이 상처 투성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에스티아의 안위를 먼저 살폈다.

“자, 어서 제 손을 잡으세요.”

에스티아는 마부의 손을 잡아 뒤로 쏠린 마차에서 겨우 나올 수 있었다.

비가 많이 내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마차의 바퀴가 주저앉아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뭐지, 이 데자뷔.’

에스티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셰린포드 가의 마차 바퀴가 망가져서 대공과 함께 자신의 마차로 돌아왔어야 했던 날이 생각났다. 하지만…….

‘뭔가 느낌이 달라.’

에스티아는 몸을 떨었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혼자 오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가씨, 일단 저곳으로 잠시 들어가시죠.”

마부가 창고로 보이는 나무집을 손으로 가리켰다. 에스티아와 마부는 부랴부랴 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에스티아는 잠시 숨을 골랐다. 마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에스티아에게 말했다.

“아가씨, 잠시 주변에 도움을 청해야 할 거 같습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네, 그래요.”

에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부는 곧장 어디론가 달려 나갔다.

그걸 뒤에서 보고 있던 에스티아는 그제야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 길이 원래 그랬나?’

에스티아는 로브를 걸친 팔을 쓰다듬었다. 여름인데 이상한 한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곧 달콤한 꽃 내음이 났다. 에스티아는 향기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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