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 언제든 환영입니다
그가 좋아하던 꽃이 있었다. 바로 튤립이었다. 그것도 빨간 튤립. 우습게도 그의 꽃말이 ‘사랑의 고백’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이 꽃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고 하니 촌스럽다고 핀잔을 들었다.
그런데 그는 그마저도 좋다고 웃었다. 줄곧 사랑받고 싶다고만 생각해 왔는데 처음으로 사랑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을 줄 수 있는 그날까지 기다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녀의 마음이 돌변하기 전까지는.
보기만 해도 행복하니 그곳에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저 지금처럼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웃어 준다면 그걸로도 당분간은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삶을 이제 잘 안다고 자부했고 다른 보통 사람들처럼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근데 언제부터였을까. 그마저도 부족하다고 여긴 건.
그런데 점점 어렸을 때의 풋풋한 사랑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점점 깊어졌다. 그걸 모르기에는 그는 너무 오래 살았다. 그리고 그녀를 너무 많이 사랑했다.
오만하다는 건 무언가를 뽐낼 때만 쓰는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자신은 그렇지 않을 거라 단언하는 것, 그게 오만이다. 그리고 그는 오만했다.
그는 자신이 아주 오랜 착각을 해 왔다고 깨달은 그 날, 꽃밭을 전부 밀어 버렸다. 바람에 숨을 잃은 꽃들의 꽃잎이 흩날렸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바꿔 보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꽃밭에 새로운 꽃을 심었다.
꽃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 * *
‘이 주변에 꽃밭이 있었나?’
에스티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곳은 작은 마을이긴 했지만 그녀가 알기론 이 마을에는 꽃밭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꽃을 싣고 가던 꽃마차가 그녀가 타고 온 마차처럼 거의 전복되지 않는 한, 이런 냄새가 날 리가 없었다.
어차피 지금 당장 할 일도 없겠다, 에스티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창고 안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창고 안은 어두웠지만 창문으로 흘러들어오는 미세한 빛 때문에 여기저기에 상자가 쌓여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 봤을 땐 괜한 호기심이었지만 그때는 도저히 이는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에스티아는 조금씩 창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고는 낡아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 소리가 났다.
‘이 창고는 주인이 없는 건가?’
그런 거 치고는 창고가 작진 않았다. 나름 크다면 큰 창고인데 주인 없이 버려져 있다는 건 말도 안 됐다. 게다가 이렇게 문이 활짝 열린 채로.
에스티아의 손이 먼지가 쌓인 상자 위로 향했다. 먼지는 두껍게 쌓여 손으로 한 번 쓸면 손바닥에 덩어리가 덕지덕지 묻는 수준이었다. 에스티아는 손을 털고 상자 뚜껑에 손을 올렸다.
먼지가 많이 쌓인 것에 비해 상자의 질은 좋았다. 좋은 나무를 쓴 거 같았다.
에스티아는 상자를 열었다.
처음에는 무슨 시금치 같은 게 들어 있는 줄 알았다. 창고 안이 어두운 탓에 색깔도 잘 보이지 않아 더욱 나물 같았달까. 하지만 곧 그녀의 코를 찌르는 향기에 그것이 나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건 말라비틀어진 꽃이었다. 자세히 보니 나물 이파리처럼 보이던 건 꽃봉오리였다. 그 사실을 아니 자연스레 줄기와 이파리가 보였다.
에스티아는 꽃 한 송이를 집어 들었다. 꽃은 곧 잘게 부서질 것처럼 썩어 가는 상태였다. 벌레가 기어 다닐 거 같은 꽃이었지만 에스티아는 꽃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겉으로만 보면 썩은 내가 진동하고 온갖 벌레가 기어 다닐 것처럼 생겼는데 냄새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갓 피어난 거 같은 향기로운 냄새였다. 아무래도 바람을 타고 온 꽃향기의 출처는 이곳인 듯했다.
‘튤립이야, 티아.’
에스티아는 움찔했다. 귓가에 누군가의 음성이 스쳤다. 정확히는 과거가 불러온 목소리였다. 그런데 악몽 속 그녀에게 저주를 퍼붓던 목소리는 아니었다. 좀 더 미성이고 부드러운…….
익숙한 목소리였는데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누구지? 기억을 헤집어 봤지만 당연히 기억이 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진짜’ 에스티아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최근 기억 속에서 매칭되는 목소리가 있을 리가…….
그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에스티아는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날카로운 두통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꽃이 그녀의 손에서 떨어졌다. 낡은 꽃은 바닥에 닿자마자 먼지처럼 바스러졌다.
에스티아는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꽃은 언제 존재했냐는 듯이 완전히 형체를 잃어버렸다.
창문 틈으로 바람이 들어와 가루를 흩날렸다. 가루는 언제 꽃이었냐는 듯이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녀의 시선이 바람의 흐름을 쫓았다. 바람이 날아가는 쪽으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누구인지 잘 보이진 않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어떤 남자가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에스티아는 흐릿한 시야에서 남자를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남자는 우산을 접고 이제 막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웬트워스와 같이 왔어야 했어.’
어디 건들기만 해 봐, 구두라도 집어 던질 거니까!
겁이 났지만 에스티아는 이를 악물었다. 만약 그마저도 소용없으면 제대로 소리를 지르든, 손을 물어뜯든 할 셈이었다.
실제로 에스티아의 자세가 약간 낮아졌다. 조금이라도 남자가 공격하려는 기색을 보이면 구두로라도 뚝배기를 깰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자의 걸음은 사뿐사뿐 걸어온다 싶을 정도로 부드럽고 가벼웠다. 곧 남자가 고급스러운 옷을 걸쳤다는 걸 깨달았을 때 에스티아는 남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헐, 뭐야.’
에스티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자는 그녀가 잘 아는 남자였다. 아니, 정확히는 불과 얼마 전에 본 남자였다.
‘라 빅터 후작.’
그 이름을 떠올리자마자 연보라색 눈동자가 그녀에게 닿았다. 사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했을 뿐 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그녀에게로 향해 있었다.
오스카 후작이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 * *
서슬 퍼런 손이라고 생각했다. 본능이 앞섰다면 그 손을 깨물어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에스티아는 이를 드러냈다. 그게 곧 겁먹은 강아지 같다는 생각이 들자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글레멘드 영애?”
미성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닿았다. 에스티아의 눈이 다시 커졌다.
“오스카 후작님? 여긴 어떻게…….”
큰 마을도 아닌데 후작이 어떻게 여길 왔을까. 에스티아는 곧바로 의심부터 들었다. 전생에서 혹독한 사회생활로 우연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고 배운 참이었다. 그게 누군가와 마주친 거라면 더욱더.
그렇기에 에스티아는 알게 모르게 오스카 후작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그걸 본 오스카 후작이 픽 웃었다.
“지나가는 길에 마차가 부서진 것을 보고 들어왔을 뿐입니다. 애초에 당황스러운 건 저인데요.”
“……?”
에스티아가 두 주먹을 꽉 쥔 채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후작의 눈에는 그게 꼭 작은 강아지처럼 보였다.
“창고를 정리하러 오는 길이었거든요. 근데 영애가 계신 거고요.”
“정리……? 엇 그럼 이 창고가 후작님 창고였어요?”
당황하여 본래 말투가 그대로 나왔다. 그제야 후작 저택에서 보았던 꽃이 떠올랐다. 지나치게 푸르렀던 파란 장미꽃밭.
“예, 오랜 시간 방치해 두어서 언젠가 정리를 해야 하지 싶었거든요. 비를 핑계로 대다가는 영원히 정리 못 하겠다 싶어서 오늘 왔습니다.”
“아…… 근데…….”
에스티아가 후작의 뒤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 그러다 에스티아의 시선이 다시 후작에게로 향했다.
“……혼 ……혼자 오셨나요?”
싸한 느낌에 에스티아는 더듬더듬 물었다. 오스카 후작이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다만 사용인들과는 마차를 따로 타고 왔을 뿐입니다.”
“아…….”
에스티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 앞뒤가 안 맞지는 아닌데 왠지 모르게 찝찝했다.
“춥지 않으십니까?”
“네?”
“여름인데 초봄 날씨 같지 않습니까.”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역시 몸을 떨고 계시네요. 제 코트라도 빌려 드릴까요?”
“아뇨!”
에스티아는 후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 추위야 뭐…….”
모 나라의 추위에 비하면 애교지, 애교. 에스티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전생의 나라를 떠올렸다.
“다행입니다, 안색이 창백하시길래.”
후작이 싱긋 웃었다. 에스티아의 몸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그렇게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려던 그때, 누군가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황궁으로 갈 마차를 구해 왔습니다!”
아까 그녀를 태우고 온 마부가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에스티아는 마부를 보자마자 후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잘 청소하세요!”
말하면서도 개떡같이 말했다는 걸 알았지만 구태여 수습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에스티아는 마부를 따라 허둥지둥 걸음을 옮겼다.
“영애.”
그런 그녀를 후작의 낮은 목소리가 붙잡았다. 에스티아는 걸음을 멈춰 선 채로 고개만 돌렸다.
“혹시 꽃이 필요하시거든 언제든 저택으로 오세요. 영애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후작의 미소가 은은하게 빛났다. 그걸 본 마부의 얼굴마저 붉어질 정도였으나 에스티아는 도리어 딱딱하게 굳었다.
“네, 감사합니다. 후작님. 그럼 이만.”
에스티아는 몸을 돌려 마부가 구해 온 마차로 향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다급한 어깨 위로 꽃잎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꽃잎은 혹시라도 그녀를 놓칠세라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