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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30화 (31/141)

30화 - 다쳤냐고

그날 대공은 예민했다. 두통은 시시때때로 찾아왔는데 대개 원인은 똑같았다. 그 누군가를 생각하면 머리가 찌르르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부기사단장인 아이비가 걱정스러운 투로 그에게 물었다. 보통 무뚝뚝한 편이라 거의 말을 꺼내는 편이 아닌 그녀가 드물게 그에게 말을 건넸다.

“잠시 들어가서 쉬시지요.”

아이비가 건물 안으로 눈짓했다. 대공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오늘 손님도 오기로 했으니까요.”

“아, 손님이라면 글레멘드 영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이비는 사교계에 드나든 지는 꽤 되었지만 그래도 사교계에서 유명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빠삭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영애의 덕을 많이 보았다지요? 사교계에서는 안 좋은 말이 많다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평이 많이 갈리겠네요.”

대공은 의아하다는 듯 아이비를 바라보았다. 보통 말수를 생각하면 평소에 비해 거의 10배 수준으로 말하고 있는 거와 다름없었다.

“경, 많이 신나신 거 같습니다.”

대공이 지친 기색으로 웃었다. 아이비가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그의 옆에 섰다.

“저야 그렇죠. 여자인데 기사 된다고 뒤에서 얼마나 욕을 했는데요. 영애도 사람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사람이잖아요.”

일상을 얘기하듯 편안한 톤이었지만 얼마나 큰 고생을 겪었는지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보통 영애들과는 다른 길을 간 그녀로서는 어쩌면 에스티아는 친해지고 싶은 객일지도 몰랐다.

에스티아도 ‘귀족 영애’라는 한계를 벗어던진 사람이었으니까.

“몸이 안 좋으시면 제가 안내해도 괜찮습니다.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었거든요.”

“아닙니다. 안 그래도 낯을 많이 가리는 사람이에요. 모르는 사람이 안내한다면 꽤 불편해할 겁니다.”

응? 아이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에스티아가 그에게서 정을 뗐다는 소문이 맞다면 오히려 그를 불편해할 것인데. 아니, 오히려 마음을 접어서 편하게 생각하려나.

평생을 거의 일만 하며 살아온 아이비로서는 사랑 때문에 아웅다웅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대공은 더더욱 어려웠다. 싫고 좋고가 그 누구보다 명확한 대공, 즉 기사단장은 유독 한 명에 한해서 태도가 애매했다.

처음에는 마치 벌레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비는 대공을 힐끔 쳐다보았다. 보통 그가 누군가를 제압할 때는 그렇게 신사적이지 않았다. 특히 행실이 안 좋거나 인성에 문제가 많을수록 그랬다. 그럴 때면 전에 없이 대공 같았고, 기사단장 같았다. 기사들이 그를 따르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스티아가 남자랑 대화하는 걸 보게 될 때면 표정이 달라졌다. 눈에 안 보이면 불안하지만 막상 누군가의 눈에 들어오면 초조한 것처럼 보였다.

마치 뺏길 것처럼.

아이비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자신이 사랑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라고 해도 자기 단장보다는 나을 거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단장님.”

“네?”

대공의 눈에 초점이 없었다. 방금 훈련을 지휘할 때까지만 해도 총명하던 대공은 어디로 갔나. 아이비는 정말 자신의 단장이 걱정스러웠다.

“손님이 오신다고 깨끗한 제복으로 갈아입으신 거 아니었나요?”

아이비도 대공이 자신을 잘 아는 만큼 그를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 그는 체면을 차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보통 훈련을 지휘할 때는 편한 바지에 흰색 셔츠만 걸쳤다. 너무 편안한 차림새여서 황제까지 나서서 좀 갖춰 입으라고 말할 정도였다.

즉 지금 이렇게 제복을 제대로 갖춰 입었다는 건 아주 제대로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비는 대공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혀를 찼다.

“아…… 네, 곧 오겠죠.”

“곧은 아닐걸요.”

“예?”

멍하던 대공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대공이 기둥에서 등을 뗐다. 아이비가 비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영애께서 타고 오시던 마차가 거의 전복될 뻔했다는군요. 소식통에 따르면 어디 하나 안 부러진 게 다행…….”

아이비는 옆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색에 말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니 예상대로 대공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답니까?”

당장 대답 안 하면 가만 안 두겠다는 표정이었다. 이런 표정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던 지라 아이비는 담담한 어조로 하던 말을 마저 이었다.

“다행히 크게 다치신 데는 없고 다른 마차를 타고 오신다고 합니다. 아무리 전복된 건 아니어도 차체가 많이 부서졌으니까요. 그래서 시간이 아마 더 걸릴…….”

아이비는 이번에도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전에 대공이 어디론가 급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이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굳이 저렇게 감춰야 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참 어렵게들 산다. 아이비는 여전히 비를 내리는 걸 바라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 * *

에스티아는 어깨를 주물렀다. 역시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제일 무섭다더니.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은 거 같더니 오른쪽 어깨가 욱신거렸다. 다시 보니 손목도 좀 아픈 거 같았다.

아무래도 저택으로 돌아가면 의원한테 진찰이라도 받아야 할 거 같았다.

근데 사실 그녀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건 교통사고의 후유증이 아니었다.

아직도 몸에서 꽃향기가 나는 듯했다. 라 빅터 후작이 가져온 향기였다. 에스티아는 자신의 로브를 들어 코를 갖다 댔다. 진한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썩은 꽃에서 나온 냄새일까? 아니면 정말 후작에게서 난 냄새가 로브에 밴 것일까.

뭐가 됐든 찝찝한 건 마찬가지였다. 소설에 나오지 않은 인물인데 자신과 깊은 연관이 있는 인물이라 그런 걸까. 오히려 메르헨과 대공을 만날 때보다 마음이 불안했다. 차라리 대공처럼 확실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나았다. 물론 대공의 경우 드러내는 감정이 경멸, 환멸, 무시 같은 거여서 그렇지.

그렇게 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새 마차가 황실 문을 넘어 훈련장 바로 앞에 당도했다. 원래는 거대한 공터였던 땅 위로 큰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에스티아는 곧 깜짝 놀랐다.

거대한 체구가 모자를 쓴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공……?’

당연히 그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직접 안내해 줄 줄은 몰랐다. 거기다가 저렇게 비장하게 서 있을 건 뭐람. 에스티아는 벌써부터 대공이 어떤 태도로 나올지 긴장이 되었다. 어찌되었건 ‘그때’ 이후로 처음 보는 거였으니까.

마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마부가 마차에서 내려 문을 열었다. 대공의 옆에 있던 기사가 에스티아에게 손을 내밀려던 그때 대공이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에스티아는 자신의 앞으로 불쑥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았다. 잠시 망설였지만 여기서 피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지라 에스티아는 그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안에 계신다고 들었…….”

“다쳤습니까?”

“네?”

에스티아는 대공의 손을 잡은 채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비꼬는 건가 생각했지만 심각한 표정을 보아하니 그건 아니었다.

“다쳤냐고요.”

대공의 안색은 창백하기까지 했다. 순간 춥냐고 물을 뻔하다가 왠지 그건 아닌 거 같아서 에스티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그걸 오해한 대공의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말씀하기 싫으십니까? 그 정도로 많이 다친 거예요?”

아니, 두 문장이 호환이 안 됩니다, 대공님.

많이 다치면 말을 하기 싫어지는 건가? 에스티아는 여전히 대공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공은 그게 사고 후유증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떨리는 손으로 그녀를 조심스럽게 리드했다.

“이러면 당장 치료부터 받으시지…….”

대공이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안색만 보면 그가 더 아픈 사람 같았다.

“아…… 그냥, 뭐…… 괜찮은 거 같아서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거 같아서 에스티아가 머쓱해하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그의 옆에 있던 기사와 함께 우산을 쓰려고 하는데 대공이 손에 들고 있던 다른 우산을 폈다. 그러고는 에스티아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자신의 옆으로 잡아당겼다.

‘이 인간이 왜 이래?’

에스티아는 황당한 나머지 손을 놓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디 다쳤습니까?”

“네?”

“어디를 다쳤냐고요.”

대공이 조급한 듯 그녀를 채근했다. 에스티아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오른쪽 손목이 조금 아프긴 한데…….”

에스티아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손목이 살짝 벌게져 있었다.

그걸 본 대공의 표정이 더 싸늘해졌다. 대공이 그녀의 왼손을 잡고는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발이나 다리는 괜찮으신 거죠? 그럼 더 빨리 자리를 옮기시죠.”

“네? 어디 가는데요?”

“의원실이요.”

“의원실? 황의가 있는 그 의원실이요?”

미쳤나! 에스티아는 펄쩍 뛰었다. 그곳은 황족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기껏해야 대공작 정도까지만 허용되었다. 아무리 공작 영애라 해도 함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거길 제가 왜! 전 괜찮아요!”

“영애까지는 괜찮습니다.”

“누가 그래요?”

“제가 그렇습니다. 제가 황제 폐하께 잘 말씀드릴 테니 잔말 말고 따라오세요.”

“하지만…….”

“더 안 좋아지고 싶습니까!”

대공이 걸음을 멈춰 서며 버럭 소리 쳤다. 그거에 에스티아도 울컥했다.

“제가 괜찮다는데 왜 화를 내세요!?”

고분고분 말을 들을까 보냐. 에스티아는 대공 따라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대공이 포기하듯 숨을 내뱉었다.

“그래, 당신이 원하는 말 해 주겠습니다.”

“무슨 말이요?”

“걱정됩니다.”

에스티아는 입을 떡 벌렸다. 그걸 본 대공이 한 번 더 말했다.

“걱정된다고요. 소식 듣고 내가 얼마나……!”

목소리가 격앙되던 대공은 말을 뚝 멈췄다. 그는 숨을 고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손은 놓지 않은 채였다.

“일단 오세요. 치료가 먼저입니다.”

“…….”

에스티아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 걸었다. 비가 많이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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