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 참 많이
대공이 끌고 올 때만 해도 ‘이 인간이 왜 이러나’ 싶었는데 점점 부어오르는 손목을 보며 에스티아는 생각을 바꿨다. 통증도 점점 더 심해졌다. 굵은 바늘로 콕콕 찌르는 느낌이 든달까. 아무래도 마차 바퀴가 부서질 때 어딜 부딪히긴 한 모양이었다.
에스티아는 애써 고통 어린 신음을 삼켰지만 표정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의원이 진단을 위해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고 만질 때는 손을 빼고 도망갈 뻔했다.
궁극에는 에스티아의 얼굴이 벌게지는 정도까지 되었다. 의원은 그런 에스티아를 살피며 손목 위에 약초를 뿌리고 붕대를 감았다. 의원이 붕대를 다 감고 나서야 에스티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조금 삐끗하신 것뿐입니다. 그래도 여기서 더 심했으면 뼈가 부러지셨을 수도 있습니다. 당분간은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에스티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속으로는 이 정도 갖고 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창 일할 때는 다리에 깁스를 한 채로 몇 주 출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럴 때는 고분고분 알았다고 하는 게 정답인 걸 알고 있는 에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치료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대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긴 했지만 막상 치료를 받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의원은 싱긋 웃더니 치료 물건들을 정리했다.
“그럼 전 다른 치료가 있어 이만 가 보겠습니다. 두 분이서 편히 이야기 나누시다 가시죠.”
의원은 키트를 들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방에서 나갔다.
“자, 영애의 바람대로 의원의 방이 아닌 응접실에서 치료를 받으시니 마음이 좀 편하신지요.”
평소의 비꼬는 투가 다시 돌아왔다. 에스티아는 붕대 감은 손목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네. 감사해요, 잘 말해 주신 덕에 치료를 받을 수 있었어요.”
“제가 와 달라 요청한 게 아닙니까.”
대공의 낮은 목소리가 에스티아의 귓가에 닿았다.
“저의 책임도 있는 거죠.”
순간 ‘아니’라고 대답할 뻔했다. 대공의 목소리가 슬프게 들렸기 때문이다. 아까 다쳤냐고 화냈을 때부터 자꾸 진심처럼 들리는 목소리가 신경 쓰였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대공이 상체를 낮춰 에스티아의 시선을 맞추었다. 그 지긋한 시선에 에스티아는 목이 빨개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냥…… 좀 이상해서요. 요 며칠 사이에 두 귀족 가문의 바퀴가 부서졌잖아요. 상단 마차는 한 번도 안 부서졌다는데…….”
에스티아는 자신의 손목을 주물렀다.
“왜 셰린포드 가문의 마차와 저희 가문의 마차만 그런 일을 겪나 싶어서요.”
“글쎄요, 두 마차만 그런 일을 겪었으면 마차 사고로 인해 사교계 파티가 줄줄이 취소됐겠습니까.”
대공이 부드러운 동작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대부분 다 마차 사고 때문이라지요. 감기도 있고요.”
그런가. 에스티아도 찻잔을 들어 올렸지만 왼손을 사용한 탓에 동작이 삐걱거렸다.
“물론.”
대공의 시선이 에스티아에게로 향했다.
“고의성이 의심된다면 조사는 해 봐야겠죠.”
차를 들이켜던 에스티아의 손이 움찔했다. 눈빛이 또 살벌한 게 이번에 여기에 꽂힌 거 같다. 셰린포드 마차 바퀴가 부서진 게 오죽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이거 혹시 바퀴 망가트린 걸 나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에스티아는 괜히 조마조마한 마음에 불쑥 말을 꺼냈다.
“셰린포드 마차가 그렇게 되었을 때는 전하께서도 많이 놀라셨겠어요.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영애의 일이라면 저희 마차 열 대라도 만들어서 빌려 드릴 테니까!”
에스티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샤바샤바 하는 게 영 달갑진 않았지만 이때 바짝 고생하면 대공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만 대공의 시선이 묘했다. 마치 말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사람처럼 집요한 기색을 띄었다. 에스티아는 살짝 대공의 반대쪽으로 엉덩이를 움직였다. 그렇게 살짝 거리를 벌리자 대공의 미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손.”
“네?”
이번에는 에스티아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무슨 강아지야?!
“손 좀 줘 보세요.”
에스티아의 불편한 심기를 알아차렸는지 이번에는 대공이 공손하게 말을 건넸다.
“한번 보고 싶습니다.”
대공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하얗고 긴 손이었다. 흉터가 가득했지만 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생긴 거 같다는 생각이 드니 아름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에스티아는 대공의 손을 내려다보며 다친 손을 내밀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에스티아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이만하면 정말 다행입니다. 이번에 마차 사고로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나왔는지는 들으셨지요?”
걱정이 깃든 잔소리에 에스티아는 고개를 들었다. ‘걱정이 깃든 거 같다’는 건 분명 착각이라는 건 아는데 지금은 언뜻 들으면 그렇게 들렸다.
“이번에는 단순히 삐끗한 정도이지 더 심하게 사고가 났더라면 뼈가 금 가는 정도에서 안 그쳤습니다.”
그러고서는 대공은 에스티아의 손과 손목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어쨌든 무사…… 아!”
대공이 손등을 지그시 누르자 찌르르 고통이 느껴졌다.
“이 정도에도 아프면 그렇게 살짝 다친 것도 아닙니다. 당분간 상단 활동은 쉬세요.”
“안 돼요.”
“하?”
풀어졌던 대공의 표정이 다시 딱딱해졌다.
“겨우 손목만 다치니 심각성이 잘 안 느껴지십니까?”
“겨우 손목 가지고 오해하게 만들지 마세요.”
결국 에스티아도 날카롭게 말을 뱉었다.
“오해?”
대공이 아래턱을 꽉 무는 게 보였다. 에스티아는 대공의 손에서 손을 뺐다.
“네, 저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오해할 수 있잖아요. 제 소문 잘 아시면서.”
움찔. 대공의 눈동자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에스티아는 시선을 내렸다.
“……그냥 괜찮다는 얘기예요. 신경 쓰지 마시라고요.”
“고작 삐끗한 거라고 해도 딱 보면 아플 걸 아는데, 신경 쓰지 마라?”
아씨. 정말 대공은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에스티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얼마나 아픈지 전하가 어떻게 아신다고요. 정말 괜찮아요, 이 정도는.”
에스티아의 목소리가 깊게 잠겼다. 이제야 겨우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는데 쉴 수는 없었다.
“압니다.”
“네?”
에스티아가 기운 없이 고개를 들었다.
“한때 의학도 공부했었으니까요. 아주 독하게.”
“의학을요?”
에스티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버하르트 바일이 의학을 공부했다는 건 원작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새로운 소식에 에스티아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전하가 의학 공부는 왜요?”
결국 에스티아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대공이 그런 에스티아를 조용히 바라보더니 다시 그녀의 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공작 부인이 편찮으셨으니까요.”
“……?”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에스티아의 눈이 더욱 커졌다. 대공이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레 문질렀다.
“영애의 어머님이 많이 아프셨으니까요. 그래서 공부했었습니다.”
에스티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게 무슨…….”
“영애가 참 많이 우셨죠. 어머니가 많이 아프다고. 매번 의원을 불러다가 어떻게 됐냐고 물었는데, 밤늦을 때나 의원이 자리를 비웠을 때는 의원을 부를 수 없어서 힘들다고요.”
대공의 목소리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감미로웠다.
“영애가 편하게 물을 수 있는 상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했죠. 그럼 언제든 궁금한 거 물으라고.”
“혹시…….”
에스티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저한테 이 사실을 말한 적 있으세요?”
질문이 이상하다는 걸 안다. 진짜 에스티아라면 까먹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묻고 싶었다. 왠지 그래야 할 거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았다.
* * *
그녀가 읽은 로판은 지극히 주인공 중심주의였다. 서브 여주였던 에스티아, 서브 남주였던 레이븐은 오로지 두 주인공의 서사를 위해 존재했다. 즉 그들의 서사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는 얘기이다.
에스티아의 이야기가 나올 때, 아버지 로셸 글레멘드만 나오고 어머니에 대한 언급은 없어서 막연히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나 하고 추측만 했었다. 그녀는 행복하기만 한, 혹은 무조건 행복이 보장된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곧 흥미를 잃었다.
도리어 주인공들을 절절이 사랑하는 에스티아와 레이븐에 더 마음이 갔다. 흔히 말하는 ‘서브병’에 걸린 것이다.
미치도록 소설을 읽던 그녀는 ‘에스티아’가 죽는 장면에서 책을 덮었다. 존재감을 가진 주인공이 아니면 행복할 수 없는 건가, 그런 감성에 젖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이, 이 남주가 ‘에스티아’를 위해 공부했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저한테 이 사실을 말한 적 있으세요?”
그래서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에스티아는 그 대답을 꼭 듣고 싶었다.
“…….”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대공은 에스티아의 손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했습니다. 말 안 했죠.”
에스티아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대공이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하려고 했지만…… 어쩌다 보니 얘기하지 못했죠.”
“네, 정말 몰랐어요…….”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역시 처음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건 아닌 것이다. 일방적인 짝사랑 때문이 아닌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전하…….”
사실 말을 꺼내면서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진정 그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그 ‘다른 이유’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 되니 에스티아는 한 가지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그가 처음부터 그녀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는 것. 이성적인 감정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철천지원수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가문과의 약속으로나마 청혼을 하려고 했던 거겠지.
그렇지 않다면 이 반응은 도저히 설명을 하기가 어려우니까.
“잠깐만.”
하지만 대공의 말이 에스티아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왔다. 에스티아는 뒤로 몸을 빼려고 했지만 대공이 에스티아의 팔을 붙잡았다.
“이 냄새…….”
대공의 숨이 귀에 닿았다.
“꽃입니까?”
“……!”
왠지 들키지 말아야 할 사실을 들킨 기분이 들었다.
오스카와 만난 사실을 그에게 말하면 안 될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