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 마주치지 마
“이 냄새…… 꽃입니까?”
대공의 숨결이 귀에 닿아 간지러웠다. 에스티아는 몸을 움츠렸다.
“어…… 그…… 네. 사고가 나서 잠깐 비를 피하려는데 마침 거기가 꽃 창고였더라고요.”
“꽃 창고?”
대공이 몸을 살짝 뗀 채로 에스티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대답 안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이거 또 펜던트 눈빛이잖아.’
“네, 콘드 마을이었는데 거기에 꽃 창고가 있…….”
에스티아가 그걸 무시하고 애써 침착하게 말을 잇는데 대공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콘드…… 마을…….”
대공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전하?”
아무리 미운 구석밖에 없다지만 거의 쓰러질 거 같은 표정에 에스티아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하, 안색이 안 좋습니다.”
“콘드 마을의 꽃 창고면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대공의 숨이 살짝 거칠어졌다. 눈빛이 잘게 떨렸다. 그러더니 그가 에스티아의 목으로 손을 뻗었다.
“오스카 후작 소유의 창고이지요.”
쿵. 에스티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왠지 하면 안 되는 짓을 하다가 걸린 사람 같았다.
‘도대체 왜? 그 사람 창고에 잠시 몸을 피한 게 뭐 어쨌다고?’
에스티아는 속으로 자신을 달랬지만 심장이 벌렁거리는 걸 멈추지 못했다. 그사이 대공은 그녀의 목에서 뭔가를 떼어 냈다.
“꽃잎이네요.”
“꽃잎?”
에스티아는 대공의 손가락에 들린 꽃잎을 내려다보았다. 끝이 하얀 빨간색 꽃잎이었다.
도대체 언제 꽃잎이 묻은 거지? 그 창고인가?
왠지 모를 싸한 예감에 에스티아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물음표가 떠다녔다. 그 물음표는 대공이 주먹을 쥐며 꽃잎을 짓이기자 느낌표로 바뀌었다.
“꽃잎에 마력이 실려 있습니다.”
“네?”
어리둥절한 에스티아 앞에 대공이 꽃잎을 쥐던 손을 펴보았다.
“원래는 이렇게 시든 꽃이었던 거죠.”
대공의 손에는 먼지 같은 검은 가루들이 고여 있었다. 에스티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아까 그 시든 꽃잎이 그렇게 살아났던 거라고?
“영애.”
대공의 눈빛이 날처럼 날카로워졌다.
“창고에서 오스카 후작을 만났습니까?”
에스티아는 자꾸 위축되는 마음을 한번 제대로 혼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찌 되었건 원래는 에스티아의 마음이라고, 그가 그런 눈빛을 띌 때면 마음이 작아졌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지금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과거의 에스티아를 위해서라도 그의 앞에서는 기죽고 싶지 않았다.
“만나긴 했는데 왜 물으시는지요?”
원래는 더 싹수없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자신의 목은 소중해서 겨우 수위를 조절했다.
“그 정도는 물을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대공이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에스티아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지금 이 이상 그와 함께 있으면 안 될 거 같았다.
‘아니, 내가 무슨 범죄 용의자도 아니고!’
이 사람은 왜 형사처럼 캐물을까. 이 정도면 소설의 남주인공이 아니라 흑막 같잖아!
“전하께서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제가 누구와 만났는지 전하가 왜 궁금하세요?”
부드러운 음성이었지만 가시가 돋친 말이었다. 대공이 미소를 거두고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궁금할 만하죠. 마력이 듬뿍 담긴 꽃잎을 달고 영애께서 궁에 들어오셨는데.”
에스티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단순히 비꼬려고 하는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뭔지 모르지만 고위 마법이 걸려 있었습니다. 어찌어찌 제 마력으로 무력화시키긴 했습니다만, 여기에 영애의 기억을 읽을 수 있는 마법이 걸려 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에스티아는 흡 숨을 들이마셨다. 찔려서 그런 건 아니었다. 열 받아서 그런 거지.
“그러니까 전하께서는 저를 문책하고 싶으신 거군요. 황실과 기사단에 폐를 끼칠까 봐서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에스티아는 표정을 관리했다.
“그럼 지금이라도 퇴궁하겠습니다.”
그러고서는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대공의 표정이 흐트러지더니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아니, 그게 아니라!”
대공은 급하게 팔을 뻗어 에스티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대공이 드물게 말을 더듬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마차 사고가 나서 영애도 크게 다칠 뻔했고 그 이후 감시라도 하는 것처럼 몸에 이상한 게 붙어 있는데…….”
자세히 보니 식은땀도 흘리는 거 같았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도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에스티아는 대공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의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이상하긴 했다. 요즘 마차 사고가 빈번해서 미리 마차까지 점검했다. 마차는 공작 가문의 마차답게 흠 하나 없이 깨끗하고 튼튼했다. 근데 그런 마차가 겨우 웅덩이 하나에 바퀴가 망가졌다.
게다가 거기서 끝나지 않고 하필 비를 피한 장소가 오스카 후작 소유의 창고였다. 그것만 해도 싸하다 할 정도인데 소유자까지 만났고, 그 소유자를 만난 직후 마법이 걸려 있는 꽃잎이 옷에 묻어 있었다.
사실 제대로 선을 그으려면 여기서 억지로라도 반박을 하든 밀어내든 해야 했다. 하지만 불안한 건 에스티아도 마찬가지였다. 전반적인 내용은 알아도 에스티아의 삶을 세세하게 알지는 못했다. 즉 오스카가 현재 그녀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을지 예측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영애.”
불안한 에스티아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대공이 그녀를 불렀다.
“오스카 후작과…….”
그의 얼굴에 주저하는 기색이 스쳤다. 에스티아는 묵묵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공이 다짐이라도 한 듯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스카 후작과 되도록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
에스티아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펜던트, 마차, 꽃, 창고. 만약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라면?
‘아니, 애초에 우연일 수가 없어.’
한 번 정도면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다. 펜던트를 주고 그대로 그 남자와의 인연이 끝났더라면.
하지만 그 이후 마차가 부서졌고 다시 마주쳤으며, 어깨에는 마법이 걸린 꽃잎이 붙어 있었다. 모두 그 펜던트 때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절대 우연일 리가 없었다.
* * *
응접실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에스티아는 에스티아 나름대로 생각에 잠겨 있었고 대공은 그런 그녀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대공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스카 후작은 수상했다. 대공이 그냥 짜증 나는 정도라면 오스카 후작은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 긴장하는 게 설레어서 그런 거라면 모르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다.
‘마주치고 싶지 않아.’
에스티아는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이 대공의 눈동자에 선명하게 비쳤다.
에스티아도 대공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기도 곤란했다. 과거의 기억이 없다는 걸 들킨다면 보나 마나 병원에 집어넣으려고 할지 몰랐다. 그는 메르헨과 결혼하고 싶어 하니까.
그래서 결국 에스티아는 축약해서 말하는 걸 택했다.
“이번 일로 오스카 후작을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건 좀 아닌 거 같습니다.”
나름 부드럽게 말했는데 대공의 표정은 싸늘하다 못해 얼음 벌판 같았다.
“충분히 의심할 만한 정황이 있는데 말입니까?”
대공의 눈가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적지 않게 열 받은 거 같았다.
“증거도 없이 이번 일을 가지고 그럴 순 없죠.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
대공의 속이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뭐 이 정도 갖고 그러나. 나는 댁 때문에 수백 번도 더 그랬어!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우연이 연속으로 일어났는데 ‘이번 일을 가지고 그럴 순 없다’고요?”
대공의 목소리가 흥분한 듯 높아졌다.
“영애는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됩니까? 전에 ‘친분’이 있었다고 해서 감싸는 건가요?”
“……?”
에스티아는 그 말에도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에스티아는 오스카 후작과 친했던 걸까? 적어도 이성적인 감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에스티아는 9살 때부터 에버하르트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에스티아가 잠시 지친 나머지 오스카 후작에게 흔들렸던 거라면?
에스티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대공과의 사이가 틀어지기엔 충분한 조건 같았다.
“제가 싫으시잖아요.”
“……!”
“황실과 기사단, 전하께 폐를 끼친 게 아니라면 더더욱 전하께서 신경 쓰실 일 아니고요.”
대공은 맥이 빠진 표정이었다. 허망해 보이기도 했다. 에스티아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선을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오늘도, 그때도 선을 넘으셨어요.”
에스티아는 대공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증명을 한다는 건 전하께서도 ‘여태까지’처럼 선을 넘지 않는다는 가정에서 얘기한 거였어요. 저만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에스티아는 뒤를 돌았다.
“전하께서도 제게 마음이 없다는 걸 증명하셔야 하는 겁니다.”
에스티아의 마지막 말이 대공의 마음에 깊숙이 박혔다.
* * *
메르헨은 꽤 만족스러운 한편 좀 불안했다. 마음이 불안하니 점심도 거의 먹지 못한 채로 궁으로 향하는 참이었다. 그녀의 ‘소중한 말’이 그녀를 초대했기 때문이었다.
잠깐 그러는 척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진심 같았다. 메르헨은 저도 모르게 에스티아를 믿을 뻔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믿고 싶어졌다.
설령 그러는 척하는 거라고 해도 혹여나 이상한 짓 못 하게 계속 감시하면 되는 것이다. 메르헨은 마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에버하르트의 태도였다. 여태까지는 에스티아가 엇비슷하게 마음 떠난 척해도 귓등으로도 신경 안 쓰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마치 정말 진심인지 파악하려는 것처럼 에스티아의 곁을 교묘하게 맴돌았다. 아무리 메르헨이 최근에 몸이 안 좋았다고는 하나 그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첩보에 의하면 에버하르트는 에스티아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약초 때문이라고 해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이 불안했다.
메르헨은 다리를 꼬았다. 에스티아가 그한테 어떤 짓을 했는데. 그는 또 바보같이 흔들리고 있단 말인가.
메르헨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대책이 필요할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