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 안 끝났어
에스티아는 사교계에서 유명 인사였다. 과거에는 자존심도 없이 대공을 쫓아다녀서 유명했고, 지금은 귀족 영애가 상인의 일을 하러 다닌다고 유명해졌다.
그나마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상해지긴 했어도 꽤 ‘잘한다’는 소식이 돌면서 웬만한 귀족들은 다 그녀를 만나고 싶어 했다. 대개 부인들은 실연을 독특한 방법으로 극복한다고 수군거렸다. 게다가 그녀가 실연을 겪게 만든 당사자가 그 실연 덕에 득을 얻었다고.
대공은 사실 남들이 뭐라고 얘기하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게다가 사기가 오른 기사단은 에스티아를 꼭 만나고 싶어 했다. 악녀라고 소문이 자자하던 아가씨 덕분에 자기들이 곤란을 면했으니 말이다.
대공이 에스티아를 부른 이유도 그래서이다. 에스티아를 직접 보고 그녀와 교류하면 기사단의 단원들이 더 기운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판단은 맞았다. 하지만 동시에 틀렸다. 정작 그의 사기는 땅바닥에 처박혔으니.
“전하.”
앞서 걷던 에스티아가 걸음을 멈췄다. 그걸 본 대공은 그제야 자신이 우뚝 선 채 생각에 잠겨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대공의 눈에 에스티아의 모습이 담겼다. 에스티아의 차림은 수수했다. 흰색의 얇은 엠파이어 드레스였는데 아무렇게나 풀어놓은 머리카락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에스티아가 저렇게 빛났나. 저렇게 아름다웠나. 오히려 전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을 때보다 더 빛이 나는 듯했다.
‘저 모습을 오스카 후작이 봤다고.’
비록 드레스 위에 로브를 걸치고 있다고 해도 무슨 옷을 입었는지는 당연히 보았을 것이다.
대공은 속이 뒤틀렸다. 겨우 그딴 인간이 저 모습을 보았다니. 에스티아가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그도 그녀를 사랑할 자격이 없다.
“전하.”
에스티아의 눈빛은 마치 ‘무슨 수작이냐’고 묻고 있는 듯했다. 대공은 주먹을 꽉 쥐었다. 믿을 수 없다. 전에도 저러는 척하고 결국 그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갑니다.”
“저는 길을 잘 몰라요. 전하께서 안내해 주셔야 합니다.”
에스티아의 말투는 지독하리만큼 담담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얼굴을 붉히고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에스티아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그의 옆에 다른 귀족 영애가 서 있어도 눈 한번 깜빡 안 할 거 같았다.
‘아직이야. 아직 증명은 안 끝났어.’
대공은 조용히 이를 으득 갈았다. 대공은 성큼성큼 에스티아를 향해 다가갔다. 이제 그녀는 그가 바로 코앞에 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녀가 끝까지 흔들리지 않을지.
하지만 서둘러서는 안 된다. 그는 당장 자신을 밀어붙이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그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빨리 걷지는 않았다. 그녀가 얼마나 가까이 걷고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
하지만 에스티아는 그 마음을 아는 것처럼 그와 멀리 떨어져서 걸었다. 겨우 그를 놓치지 않을 정도의 거리.
대공은 다시 걸음을 멈췄다. 이쯤 되니 에스티아도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좀 더 가까이 다가오십시오. 그러다 놓치시겠습니다.”
그는 스스로 말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는 게 한심할 정도였다.
“네.”
하지만 에스티아의 목소리는 여지없이 담담했다. 마음 같아서는 과거를 줄줄이 읊으며 당신이 어떻게 이렇게 침착할 수 있겠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감히 당신이. 나도 안 되는데, 당신이.
대공은 다짐했다. 절대 쉬이 물러서지 않겠다고.
무조건 그 마음을 보고야 말겠노라고.
* * *
기사단의 훈련장으로 가는 내내 대공의 기분이 완전히 가라앉았다는 걸 에스티아는 눈치챘다. 가지라고 할 때는 싫다가 막상 떠난다고 하니 아쉽긴 한 모양이었다. 에스티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영원히 자기의 것인 게 어디 있다고.
평생 인연이라고 생각했던 이들도 정작 힘들 때는 외면해 버렸다. 가족들은 진즉에 그녀를 버렸다. 그녀는 ‘영원’은커녕 ‘오래’도 힘들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대공이 안쓰럽기도 했다. 얼마나 자만했을까 싶어서.
‘그래도 불쌍하진 않아.’
만약 그녀가 에스티아에 빙의하지 않았더라면 에스티아는 원래 결말대로 죽음을 맞이했을 테니까.
그런 거 생각하면 에스티아는 내심 자신이 그녀에 빙의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녀는 에스티아와 레이븐을 내심 아꼈으니까.
“레이븐…….”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가 헙 하고 입을 가렸다. 제발 못 듣기를 바랐는데 대공의 옆모습을 보니 느낌이 싸했다.
‘설마 들었나?’
에스티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으니 보나 마나 질책할 게 뻔했다. 어쩌면 그 정도로 안 끝날지도.
그럼 모르쇠 해야 하나 에스티아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사이 대공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훈련장 천막 앞이었다. 대공이 우뚝 멈춰 섰다.
“폐하와 단둘이 말씀 나누시더니 이제 서로 이름을 부르기로 하셨나 봅니다.”
“아…… 아니 그게…….”
들었다. 대공의 목소리가 냉랭했다. 열심히 속으로 머리를 굴리던 에스티아는 결국 솔직하게 내뱉었다.
“그냥 이름이 너무 아름다우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제가 아는 어떤 나라는 ‘레이븐’이 ‘까마귀’라는 의미인데, 까마귀가 되게 똑똑한 새거든요. 어렸을 때는 이상하게 까마귀를 좋아했어요.”
똑똑한 새인데, 아무도 안 좋아해서 에스티아는 그 새가 좋았다.
기운 없던 대공의 눈빛이 다시 매서워졌다. 그걸 본 에스티아가 내심 흠칫했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제가 감히 그런 마음을 품은 건 아니니까요. 물론 그렇다고 대공비 자리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요.”
에스티아는 새침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꼈다.
아마 진짜 에스티아도 대공비 자리를 원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원하는 건 그저 그의 옆자리였을 것이다.
에스티아는 대공을 향해 있던 몸을 틀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이제 대화는 끝내고 훈련장으로 안내하라는 메시지라는 걸 알아차린 대공이 옆에 서 있는 기사에게 고갯짓했다.
두 기사가 양옆에서 천막을 걷었다. 그러자 넓은 입구 너머로 기사들이 열심히 훈련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걸 본 에스티아는 경이로움에 사로잡혔다. 땀을 흘리고 훈련하는 기사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칼을 휘두르는 모습에서 사명감이 느껴졌다.
에스티아와 대공을 본 기사들이 움직이던 몸을 멈췄다. 그들은 언제 훈련을 했냐는 듯이 정자세를 취했다. 에스티아는 대공을 따라 쭈뼛쭈뼛 들어갔다.
대공이 우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곧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리 고지했던 바와 같이, 오늘 경들에게 소개할 사람이 있습니다.”
에스티아는 자신의 작은 심장이 콩닥콩닥거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건 불안감 때문이라기보다는 기분 좋은 설렘 때문이었다.
“에스티아 글레멘드 양입니다. 차기 글레멘드 가의 가주가 될 사람이고, 이번 버지니아 약초를 미리 재배하고 기사단에 공급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분입니다.”
에스티아는 내심 놀랐다. 대공이 이렇게까지 제대로 얘기해 줄 줄은 몰랐다. 물론 프로 의식으로 대강 소개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 정도로 공을 세워 줄 줄은 몰랐다.
기사들이 거의 동시에 에스티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에스티아는 마주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마치고 대공이 몇 마디를 더 한 뒤 기사들에게 자율 훈련을 지시했다. 즉 마저 인사할 사람은 하고, 훈련할 사람은 하라는 것이었다.
에스티아는 대공이 자신을 배려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굳이 고마움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오해를 살 순간은 최대한 피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대공과 어색하게 서 있는데 한 기사가 다가왔다. 갈색 머리를 길게 땋아서 내린 기사였다.
“안녕하십니까, 글레멘드 양.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황실기사단의 부단장인 이벤다 아이비라고 합니다.”
‘뭐야, 이 멋진 분은!’
에스티아의 눈에서 곧 하트가 튀어나올 거 같았다.
“저야말로 이리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이비 경. 환대해 주시니 그저 기쁠 따름입니다.”
이번만큼은 립서비스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아이비도 에스티아의 진심을 알아차렸는지 부드럽게 웃었다.
“주변으로부터 하신 일을 전해 들었습니다. 덕분에 기사단이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에스티아는 벌게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걸 본 아이비가 동생을 보듯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부끄럽네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안 좋은 소문도 많이 들으셨을 텐데.”
마지막 말은 속삭이듯이 내뱉었다. 왠지 아이비 앞에서는 솔직해졌다.
“당사자와 제대로 얘기도 안 해 보고 내뱉는 말은 믿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런 말들에 관심도 없고요.”
단호한 음성이었다. 그걸 들은 에스티아는 다짐했다. 이 선생님은 꼭 내 편으로 만들리라.
“그런 의미로…….”
“……?”
아이비가 대공을 힐끔 쳐다보았다. 에스티아는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기웃했다.
“영애께 누군가의 부인이라는 자리는…… 너무 협소하죠. 설령 그 자리가 대공비 자리라고 해도 말이죠.”
에스티아는 풉 하고 웃었다. 그냥 들어도 누굴 저격하는 말인지 알 수 있었다.
그걸 증명하듯 대공의 아래턱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에스티아는 마음 같아서는 아이비를 끌어안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다정하게 말해 줄 수가 있지?
“기사들과 만나실 수 있겠습니까? 손목을 다치셨다고 들었는데.”
가슴이 찡했다. 메리와 웬트워스, 그 외에 사용인들이나 상인들 빼고 그녀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사람이 있었던가. 아이비의 부탁이라면 설령 다리가 부러졌어도 들어줄 수 있을 거 같았다.
“네, 괜찮습니다, 살짝 삐끗한 정도인걸요.”
“그럼 다행…….”
“뭐, 자칫하면 부러질 뻔했지만요.”
빠직.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옆을 째려보았다. 왠지 너무 조용하다 했다.
다행히 아이비는 대공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듯했다.
“그럼 영애에게 기사들을 인사시켜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단장님.”
대공은 대답하기 전 에스티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그러세요, 부단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비는 부드럽게 에스티아를 리드했다. 에스티아는 해맑게 웃으며 아이비를 따라갔다.
대공은 그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그녀가 보지 않는 새에 더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