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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34화 (35/141)

34화 - 입맞춤

“경들을 만나 기쁩니다. 이번에 약초 수급 총책임자인 에스티아 글레멘드입니다.”

에스티아가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기사들에게 인사했다. 기사들의 눈빛은 딱 둘로 갈렸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과 경계심이 그득한 눈빛.

긴장이 되었지만 그들이 경계하는 것도 이해가 갔기에 에스티아는 담담히 말을 이어 갔다.

“불미스러운 소문으로 경들께 심려를 끼쳐드렸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유통과 제조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될 것입니다. 추후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저희 저택으로 편하게 연락을 주셔도 됩니다.”

에스티아가 안심시키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럴 때 너무 비장하게 해도 안 좋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미소가 효과를 발휘하듯 기사들의 얼굴이 좀 풀어지면서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무성한 소문과 달리 꽤 멀쩡해서 놀란 모양이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영애께 기사 한 분 한 분 소개해 드리도록 하죠. 경들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이 자리에서 영애에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아이비가 말을 끝마치더니 능숙하게 에스티아를 한 기사에게로 안내했다.

“이쪽은 젠이에요. 올해로 기사단에 최연소로 입학한 기사입니다.”

아이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젠을 소개했다. 에스티아는 방긋 웃었다.

“반가워요, 젠.”

“안녕하세요, 아가씨. 젠이라고 합니다. 성이 있긴 하지만 한미한 가문인지라 ‘젠’이라고 편하게 불러 주십시오.”

“성 같은 건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석에서 만나면 편하게 서로 이름 불러요, 젠.”

에스티아가 젠에게 악수를 청했다. 젠은 쭈뼛거리다가 에스티아의 손을 맞잡았다.

“예, 아가씨. 아가씨의 공로는 익히 들었습니다. 덕분에 기사단에 사기가 많이 올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에스티아 아가씨.”

다행히 젠은 처음부터 그녀에게 호의적인 편이었다.

에스티아가 슬쩍 뒤에 서 있는 대공을 바라보았다. 대공의 표정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지만 에스티아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이 상황을 적잖이 마음에 안 들어 하고 있다는걸.

그래서 에스티아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기사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질문을 듣고 답해 주었다.

다행히 그저 호기심만 있는 기사들이라도 에스티아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에스티아는 그걸로 만족했다.

“그 손으로 악수는 잘하셨습니까?”

기사들과 인사를 끝내고 다시 응접실로 돌아가는데 대공이 어느새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계속 앞으로 걸었다.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닌데, 못할 게 뭐가 있겠어요. 그나저나.”

“……?”

에스티아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곧 피앙세와 만나실 텐데 저하고 있을 시간이 있으시겠어요?”

“무슨 소리입니까?”

한순간에 대공의 목소리가 날카로운 가시가 세워졌다.

“셰린포드 양도 오라고 했어요. 전 폐하께 상의드릴 일이 있어 폐하한테 가 보아야 합니다.”

에스티아는 응접실 문 앞에 딱 멈춰 섰다. 그런 다음 육중한 문을 잡아당겼다.

화려한 응접실이 눈에 보이고 곧 그 안에 있던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전하!”

청초한 웃음을 보니 역시 여주인공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스티아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전하와 셰린포드 영애를 도우라고 하셨죠. 그래서 제가 불렀습니다.”

에스티아는 최대한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대공의 무방비한 표정을.

에스티아는 순간 무언가를 깨달았지만 애써 외면했다.

그래야 살 거 같았다.

* * *

에스티아는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였다. 오늘 대공과 기 싸움을 하고, 기사들과 인사하고 황제를 만나느라 너무 피곤했다. 하지만 사실상 무엇보다 피곤한 거는 아직도 대공이 그녀의 집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놈의 빌어먹을 마찻길은 왜 아직도 복구가 안 되는 건지. 여주인공과 생겨야 할 상황이 왜 자신에게 발생하고 있는 걸까. 아무래도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라도 복구에 힘써야겠다고 에스티아는 다짐했다.

그래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미리 메리에게라도 말을 해놓아야겠다 싶었다.

에스티아는 차가운 금속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와 동시에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에스티아는 정말로 오늘 하루를 기분 좋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발걸음이 고요히 그가 돌아가야 할 방으로 사라지길 바랐다. 오늘 이대로만 끝난다면 꽤 괜찮은 하루였다.

에스티아는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차가운 느낌이 손끝에서 사라졌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찬 기운이 서렸다. 그녀의 감이 그녀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다만 그 내용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에스티아는 숨을 참고 조용히 기다렸다. 발걸음은 작은 문소리와 함께 사라지는 듯했다. 곧 이어지는 노크 소리만 아니었다면.

“영애.”

대공의 음성이었다. 나지막한 음성이 꽤 지쳐 보였다. 에스티아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 시간은 저녁 9시였다. 원래 그녀에게는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여기는 달랐다. 손님이 저택의 영애의 방을 ‘직접’ 찾아올 시간은 아니었다.

‘모른 척할까?’

지금 시간이라면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에스티아는 다시 침실로 향하기 위해 뒤를 돌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도대체 왜.’

자꾸 자신이 모르는 무의식한테 지배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에스티아는 화딱지가 나 다시 문 앞에 섰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신가요. 들리니까 하실 말씀을 간단하게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난 잘 안 들리는데. 사용인들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해야 하나.”

이 자식이?

당기는 문이 아니라 미는 문이었으면 넌 죽었어, 인마.

에스티아는 이를 으득 갈았다. 손잡이를 내리고 당기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자, 열었습니다. 말씀하세요.”

이번에는 또 어떤 미운 말을 하나 들어 보자. 에스티아는 문을 연 채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얼굴도 보기 싫었다.

“손목은 어떻습니까.”

근데 대공의 말은 이번에도 예상을 빗나갔다. 에스티아의 눈가가 움찔했지만, 그녀는 애써 그를 쳐다보고 싶은 걸 참았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영애와 시간은 잘 보내고 오셨나요?”

혹여나 악녀처럼 들릴까 봐 에스티아는 일부러 목소리를 다듬었다. 부드럽게 말하려고 했는데 잘 됐는지는 모르겠다.

“…….”

하물며 무슨 꼼수냐고 캐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대공이 이상하게 구니 도리어 마음이 불안했다. 에스티아는 두 손을 부여잡은 채 대공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가만히 서 있을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오!’

에스티아는 일단 여기에서는 백기를 들었다. ‘빨리빨리’ 민족은 역시 느릿느릿한 걸 견디지 못한다.

“왜 아무런 말…….”

고개를 돌리며 말을 내뱉은 에스티아는 그대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대공의 눈은 마치 누군가한테 버림이라도 받은 듯했다. 누구한테? 설마 메르헨하고 뭔 일이 있었나?

“혹시 메르헨과 무슨 일 있었어요?”

에스티아는 노파심에 대공에게 물었다. 그 덕에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를 지긋이 보던 대공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뇨, 메르헨을 만나 너무 행복했습니다. 영애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

원래 같았으면 재수 없다고 속으로 욕했겠지만 대신 에스티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이상했다. 평소라면 오만하게 비꼬면서 말할 텐데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말투는 지극히 인위적이었다. 마치 연기를 하는 것처럼.

“그런데 왜…… 표정이 안 좋으세요?”

에스티아는 걱정됐다. 정확히는 그가 걱정된다는 게 아니라 혹시나 괜한 또 오해를 뒤집어쓸까 걱정됐다.

귀하신 몸 여기까지 오셨는데 비꼬지 않을 리 없다고 생각한 에스티아는 여러 개의 가정을 미리 생각해 놓기 시작했다.

“영애는…….”

옳지. 몇 번일까. 몇 번 가정대로 얘기할까.

에스티아는 미리 각오를 했다.

“영애는…… 그래서 행복합니까?”

“?”

이건 또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누가 보면 내가 찬 줄 알겠어.

‘왜 지 혼자 연극 찍는대?’

“무슨 말씀이세요?”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문 닫고 싶었지만 차마 후환이 무서워 그럴 순 없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일부러 나랑 메르헨 붙여 놓는 거, 만족스럽냐고 묻는 겁니다.”

에스티아는 마음 같아서는 과거 에스티아가 그랬던 것처럼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빙빙 돌려서 말하는 건 그녀가 가장 싫어하던 거였다.

“그걸 ‘하명’하신 게 전하셨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하고 있는데 뭐가 잘못되었나요? 지난번 가신 회의 때 도와주신 거 조금이라도 답례를 하고 싶었습니다.”

“답례는.”

대공이 으르렁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받는 사람이 원하는 답례를 해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게 전하가 원하시는 게 아니었나요?”

에스티아도 지지 않고 대공의 말을 맞받아쳤다. 대공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꾹 다물다가 답답한 듯 위 단추를 풀었다.

“그걸 원하시는 게 아니면 도대체 뭘 원하시는 거죠? 말씀만 해 주세요, 다 할 테니까.”

에스티아는 고개를 탁 쳐들며 말했다. 대공의 눈빛이 더 깊어졌다.

“영애는 여전하네요.”

“?”

“맞는 말을 해도 꼭 하나씩 실수를 하는 거.”

대공의 목소리는 지극히 담담했다. 에스티아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대공이 가까이 다가왔다. 에스티아는 뒤로 물러서고 싶었지만 그러면 지는 거 같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대공의 목이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에스티아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그걸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순간 그게 짜증이 난 에스티아는 오른손을 들어 가슴을 툭툭 쳤다.

탁. 차가운 손이 그녀의 손목에 닿았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에스티아의 눈에 옅은 녹색 눈동자가 보였다.

“손목 더 안 좋아지고 싶지 않으면 그만 하세요.”

에스티아는 목을 움츠렸다. 대공의 숨이 바로 귀에 닿아서 간지러웠다.

에스티아는 손목을 빼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대공이…….

화가 난 거 같았다.

왜?

에스티아는 시선을 들었다. 그러자 짙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답례는 또 증명으로 해 주었으면 하는데.”

참나. 버진 로드라도 깔아 드릴까? 에스티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네, 말씀하세요. 뭘 하면 될까요?”

“요구는 아니고 먼저 묻고 싶습니다.”

에스티아는 말해 보라는 듯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곧 들려온 대공의 말은 에스티아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하고도 입을 맞출 수 있습니까?”

“……!”

에스티아는 기가 막혀 입을 쩍 벌렸다.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있으면요, 하시게요?”

“네, 보고 싶네요. ‘이제는’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입을 맞춘 뒤 당신의 표정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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