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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35화 (36/141)

35화 - 당신은 아니야

지독히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나면 한 가지 깨닫게 되는 게 있다. 살면서 죽는 것보다 무서운 게 많다는 거. 에스티아에게는 그게 경멸과 무시였다.

에스티아는, 그리고 그녀 자신은 누구에게도 함부로 무시당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에스티아는 대공의 뺨을 내리쳤다. 아무리 과거의 에스티아가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런 수치를 당해서는 안 됐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입을 맞출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신은 아니야.”

심장이 달음박질쳤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분명 그에게 말했다. 그동안 부린 패악질은 당신과 당신의 약혼녀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도움으로써 갚겠다고.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자신의 노력을 헌신짝 취급했다.

“왜 당신은 아닌 줄 알아? 내가 아무리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여자라고 할지라도, 혐오스러운 사람하고 입을 맞추진 않거든.”

대공은 고개가 돌아간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때린 부분이 벌써 벌겋게 부어오르고 있는데도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에스티아는 눈물을 참지 않았다. 이런 수치에는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비명과 고함을 질러도 마땅했다.

“상처받았습니까?”

“뭐?”

“이제야 좀 화가 나요? 그러게, 진작 나 좀 봐 주지.”

“도대체 뭐라는 거야?”

이제 사용인들이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참으면 호구다.

“개운하다는 표정을 볼 때마다 속이 뒤집어졌거든. 당신을 괴롭게 하고 싶어서 한 건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게 해서.”

에스티아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런 놈이 남주라니. 아마 원작자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었다.

“헌신하라고 했지, 행복하라고 안 했어.”

“……당신이 사람이야?”

에스티아는 참지 않고 내뱉었다. 복도 너머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그렇게 한순간에 마음을 버리는 게 말이 돼? 제정신이야?”

대공의 눈동자가 분노로 타올랐다. 에스티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 한 놈이 성낸다더니 자신의 잘못은 쥐꼬리만큼도 생각 안 했다.

“제정신 아니지! 당신이 그렇게 짓밟은 마음인데!”

비명인지 울음인지 모를 음성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당신이…… 끔찍해…….”

“……!”

대공의 표정이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에스티아는 꿈에서 들었던 말을 다시 내뱉었다.

“당신이…… 너무 끔찍하고 싫어.”

“아가씨!”

다급한 목소리가 둘의 사이를 끼어들었다. 에스티아의 눈이 대공의 뒤로 향했다.

“웬트워스…… 아니, 이안.”

에스티아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안…… 이안…….”

에스티아의 위태로운 목소리에 웬트워스가 황급히 다가와 에스티아를 끌어안았다.

“바일 공!”

웬트워스가 격노하며 대공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감히, 아가씨께 무슨 무례입니까! 설령 대공 전하라고 해도 아가씨께 이런 무례를 범하실 수는 없습니다!”

웬트워스가 에스티아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당장 나가세요. 나가지 않으신다면 무력으로나마 끌어내겠습니다.”

에스티아의 숨이 점점 느려졌다. 갑작스럽게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의식이 흐려졌다. 곧 에스티아의 몸이 축 늘어졌다. 웬트워스가 바로 그녀의 몸을 단단히 받쳤다.

“에스……티아……?”

그러자 언제 날카로웠냐는 듯 대공이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으며 에스티아에게로 다가왔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웬트워스가 이를 갈며 대공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대공이 창백하게 질린 채 멈춰 섰다.

그렇게 대공은 잠시 괴로운 듯 쓰러진 에스티아를 바라보다가 겨우 방을 나갔다. 걸음에는 짙은 미련과 후회가 묻어 있었다.

웬트워스는 자신이 편지를 떨어트렸다는 사실도 잊고 에스티아의 몸을 흔들었다.

수신인에 닿지 못한 편지지는 그렇게 잠시 잊혔다.

* * *

비는 밤이 되니 더 많이 쏟아졌다. 이대로 세상이 잠겨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았다. 이왕이면 그와 그녀만 남겨 두고 잠겨 버리면 좋으련만.

메르헨은 수면용 드레스로 갈아입고 책상 앞에 앉았다. 며칠 잠을 자지 못했는데도 전혀 졸리지 않았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그가 에스티아의 집에 있는데.

전이었다면 에스티아가 무슨 꼼수를 부렸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메르헨은 황궁의 응접실에서 얼어붙은 대공의 표정을 기억한다. 메르헨은 여기서 더 억지를 부리면 오히려 더 손해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이대로 놔두면 알아서 두 마음이 서로 할퀴어 댈 것이다. 자신은 그저 기다리면 되었다.

사실, 원래는 대공이 그의 저택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올 생각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메르헨은 펜을 들었다.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이를 어리광으로 데려와 봤자 겨우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그래서 대신 다른 수를 써서 원하는 전개를 만들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저절로 굴러온 패도 있으니 딱 좋지 않은가.

‘다만 완전히 믿을 순 없어.’

고고하던 상대가 갑자기 저자세로 나온다면 필히 이유가 있는 것이다. 메르헨은 그녀를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쓰기 좋은 패를 방치할 수도 없다.

메르헨은 시험해 보기로 했다.

에스티아가 정말 쓸모 있는 패인지.

메르헨은 편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이번에도 여지없이 꿈을 꾸었다. 에스티아는 어떤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가슴속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에스티아는 마음이 트이는 그 감각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간 계속 집에만 있었더니 더 신이 났다.

“에스티아!”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다정하면서도 강인한 목소리였다. 에스티아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가 웃으며 다시 달렸다. 그러자 한 인영이 못 말린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쫓아왔다.

에스티아는 까르르 웃었다. 그가 자신만을 바라보며 따라오고 있다는 게 정말 좋았다. 에스티아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긴 팔이 그녀의 허리를 잡아챘다. 에스티아는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그 팔을 툭툭 쳤다. 따뜻하고 든든한 어깨가 등 뒤로 느껴졌다. 에스티아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이름을 외쳤다.

“에버하르트!”

헉.

에스티아는 눈을 번쩍 떴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에스티아는 몸을 일으켜 목덜미를 쓸어보았다. 손바닥 가득 땀이 묻어 나왔다. 에스티아는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무서운 꿈도 아니었는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에스티아는 협탁에 있는 유리컵을 집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든 물을 한 번에 들이마셨다.

에스티아는 숨을 ‘하’ 하고 내뱉었다.

분명 제대로 꿈을 기억하고 있는 게 맞다면 대공과 자신은 서로 정답게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마치……

다정한 연인처럼.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원작 어디에도 둘이 연인 사이였다는 내용은 없었다. 그저 꿈일 것이다. 어쩌면 마음 어딘가에 ‘진짜 에스티아’의 미련이 남아 있어서 그런 걸지도.

“아가씨.”

그때 문밖에서 메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스티아는 유리컵을 협탁에 내려놓았다.

“들어와.”

메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몸은 어떠세요?”

“자고 나니 괜찮아. 무슨 일 있어?”

메리는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침대 맡에 앉았다.

“아뇨, 아가씨. 다른 게 아니라 메르헨 아가씨한테 편지가 와서요. 어제 남작님이 전하려고 오셨다가 아가씨가 쓰러지셔서…….”

“셰린포드 영애?”

에스티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사용인이 급하게 전해 주더라고요.”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에스티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날씨에 사용인을 급하게 보낼 만큼 심각한 일이…….

순간 어떤 예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에스티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사용인은?”

“너무 비가 많이 오는 데다가 많이 젖어서 잠시 여분의 방을 내주었습니다.”

“잘했어, 메리.”

에스티아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메리가 싱긋 웃었다.

“네, 다행히 감기는 걸리지 않은 거 같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응, 혹시 새로운 소식 있으면 바로 말해 줘.”

에스티아의 말에 메리는 공손하게 알겠다고 답한 뒤, 방에서 나갔다. 그녀가 혼자서 편지에 집중할 시간을 주는 것이었다.

에스티아는 그런 메리를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편지에 눈을 돌렸다. 그러고서는 메리가 은쟁반에 얹어서 가져온 편지 칼로 편지를 뜯었다.

편지는 정갈한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친애하는 에스티아 양에게.

오늘 하루도 잘 보내셨나요? 요즘 날씨가 많이 좋지 않아 걱정입니다.

게다가 영애께서는 현재 상단 일도 겸하고 있으니 더 걱정이 많으실 듯합니다. 부디 영애가 무탈하기를 바랍니다.

사실 이 편지를 쓰기까지 여러 고민을 거듭하였습니다. 혹시나 영애에게 의도치 않은 상처를 입힐까 싶어서요.

그래도 용기를 내어 편지를 씁니다.’

아무래도 이제부터 본론이 나올 모양이었다. 에스티아는 한숨을 돌린 다음 다시 편지에 집중했다.

‘오늘 궁에 저를 불러 주셨을 때 대공 전하로부터 영애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갑자기 전하가 영애의 저택에 머물게 되어 영애께서도 많이 놀라셨을 거 같습니다.

영애의 마음이 힘드실 거 같아 대신 저희 집에 머무는 게 어떠냐고 여쭈었더니, 제가 건강이 좋지 않아 오시는 게 염려스럽다고 하셨습니다. 제 건강이 더 안 좋아질까 봐요.

그러시더니 마찻길이 복구되는 대로 바일 저택으로 돌아올 거라고 하시더군요.

저도 부득이하게 영애께 불편함을 드리는 거 같고, 전하께서도 저택으로 돌아와 업무를 보셔야 하니 제가 영애께 한 가지 제안을 드릴까 합니다.

저와 함께 마찻길 복구에 힘을 합치는 건 어떠신지요?

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주변 마을 사람들로는 힘이 부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희 저택의 사람과 영애 저택의 사람들을 보내, 그들을 도우면 어떨까 싶습니다.

절대 강요하고자 하는 건 아니니 너무 마음 쓰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메르헨 셰린포드’

내심 긴장했는데 오히려 환호성을 지르게 만드는 편지였다. 대공을 빨리 보낼 수 있다면 에스티아로서도 환영할 만한 제안이었다.

에스티아는 서랍에서 편지지를 꺼냈다.

드디어 저 대공을 치워 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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