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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36화 (37/141)

36화 - 저를 버리세요

아무리 잠시 정신이 무너졌었다고 해도 기죽고 싶지 않았다. 든든하게 아침까지 챙겨 먹은 에스티아는 하녀의 도움 없이 옷을 갈아입고는 방에서 나왔다. 확실히 잠과 밥이 보약이라고, 그래도 푹 자고 잘 먹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물론 이상한 꿈을 꾸긴 했지만 말이다.

문을 열고 나오자, 웬트워스가 정자세로 복도에서 에스티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웬트!”

“아가씨.”

미소 짓고 있었지만 걱정이 다분한 표정이었다. 그걸 보니 괜히 미안해졌다.

“걱정했지? 놀라게 해서 미안해.”

“그게 왜 아가씨 잘못입니까. 객께서 잘못하신 탓이죠.”

웬트워스는 일부러 누구 들으라는 듯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에스티아는 피식 웃었다.

“다음번에 혹시나 비슷한 일이 생기시면 바로 절 부르세요. 저희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단호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였다. 에스티아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응, 그럴게. 어제는 직접 손을 날려야 직성이 풀릴 거 같아서.”

에스티아도 그를 따라 누구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웬트워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실까요? 마차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응, 가자!”

에스티아는 기분이 좋아져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웬트워스가 따랐다.

여전히 천둥소리가 저택 전체를 울리는 날이었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던 에스티아는 곧 로비 한중간에 누군가 서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가씨.”

이를 진작 눈치 챈 웬트워스가 에스티아를 급히 붙잡았다. 언뜻 보이는 실루엣으로 짐작해 보건대 딱 그 남자였다.

“뒷문으로 나가실까요?”

웬트워스가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에스티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피할 이유가 뭐가 있어. 어차피 쌍방으로 잘못한 건데. 그리고 여긴 내 저택이야. 지가 여기서 날 쫓아내기라도 하겠어?”

에스티아는 대공이 자기 저택에서 그녀를 끌어내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렇죠.”

그 말에 웬트워스가 안심하듯 답했다. 에스티아는 온화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가 다시 그 미소를 지웠다.

대공은 얇은 남색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거의 무릎까지 내려오는 듯했는데, 아마 에스티아가 저걸 입는다면 거의 웨딩드레스처럼 질질 끌릴 터였다. 대공은 본관 문을 바라본 채로 그녀를 등지고 있었는데, 그 뒷모습이 사뭇 씁쓸해 보였다.

“대공 전하.”

하지만 그를 신경 쓸쏘냐. 에스티아는 차가운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대공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옅은 녹색 눈동자가 공허했다. 머리는 방금 감은 듯 헝클어져 있었고 안도 편안한 흰 블라우스 차림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앞머리가 이마를 덮은 건 처음 보는지라 신기하게 바라보는데 대공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상단으로 가십니까.”

“…….”

널 내보내러 간다, 이 자식아.

에스티아는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네, 듣기로는 이 날씨에도 잘하면 약초를 찾을 수 있다 하여 상단과 논의하러 가는 길입니다.”

“이런 날씨에요?”

대공의 표정에 미세하게 감정이 감돌았다. 에스티아는 그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네, 폭우가 온다고 해서 포기할 순 없죠.”

“그 손목에 약초를 캐러 다녔다간 진짜 큰 부상을 입을 겁니다.”

대공의 시선이 붕대를 감은 에스티아의 손목으로 향했다. 이를 눈치챈 에스티아가 손목을 등 뒤로 감추었다.

“손목이 부러지든 없어지든 전하께서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단조롭지만 분명하게 가시가 돋친 말이었다.

“거래처로서 만날 때는 어디까지나 공적으로 대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 주세요.”

더 할 말이 남았나요? 에스티아는 그런 의미가 담긴 듯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제가 이 저택에 있는 게 불편하시겠죠.”

응? 에스티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대공과 이야기를 할 때면 매번 삼천포로 이야기가 빠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 때문에 일부러 매번 아침 일찍 저택을 나가시는 걸 압니다. 지금도 절 만나기 싫어서 이른 시간에 나가시는 걸 알고요.”

“아뇨.”

에스티아는 단칼에 대공의 말을 끊었다.

“사실 전에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좋아하는 일을, 한시라도 빨리 시작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

대공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걸 본 에스티아가 말을 이었다.

“제 행동이 전부 전하로 인한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앞으로는 절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아, 이왕 이렇게 대화 나누게 된 거 차기 공작으로서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에스티아가 예를 갖추듯 앞으로 두 손을 모았다.

“충언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주세요. 어제 일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딱히 사적인 관계가 아닌 관계라면 어제처럼 무례를 범하셨다가는 안 좋은 소문이 돌 겁니다. 소문이 얼마나 끔찍한 건지 제가 잘 알거든요.”

“…….”

“그리고 정말 당신의 피앙세를 사랑한다면 다른 여인에게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제가 대공 전하라면,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시험하는 듯한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대공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에스티아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전하와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안 그래도 안 좋던 대공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쓰러질까 봐 걱정됐지만 지금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한 번에 말씀드려요. 어제 일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충동적인 행동이라고 해도 무례했습니다.”

에스티아의 시선이 살짝 부어 있는 대공의 뺨에 닿았다. 마음이 살짝 찌릿거렸다.

“하지만 전하께서도 잘못을 하셨습니다. 저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무기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제 제 마음을 짓밟으셨습니다.”

대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제야 슬슬 그녀가 진심이라는 걸 믿는 거 같았다.

“전하의 연인에게 가세요. 절 버리시고요. 저도 전하를 버리겠습니다.”

에스티아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대공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목소리조차 위태로웠다.

“난…… 제삼자가 하는 말을 믿지 않아요. 그래서…… 그래서…….”

대공이 고개를 숙이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어요. 내 귀로 직접 듣고 싶었고.”

“무엇을요……?”

뭔가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에스티아가 그를 경계하며 물었다.

“정말 듣고 싶었어요.”

대공이 천천히 에스티아를 향해 다가왔다.

“정말 날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답을 들어 안심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어쨌든, 에스티아는 대답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도저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그 대답을 하는 걸 막으려는 것처럼.

* * *

웬트워스는 자신보다 앞서 걸어가는 주군을 슬쩍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주군의 머리에서 김이 나는 거 같다. 많이 화가 났는지 우산도 본인이 들고 앞장서 간다.

주군의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적잖이 고민이 되었다. 사실 에스티아가 대답하지 못했을 때 그렇게 충격적이지 않았다. 장장 10년을 해 온 짝사랑이다. 하루아침에 정리가 된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거다.

그런데도 에스티아는 그게 충분히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때때로 걸음을 멈춰서 혼자 씩씩거리는 탓에 같이 걷던 상인들도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웬트워스가 괜찮다고 손짓해야 그제야 다시 움직일 정도였다.

“남작, 아가씨는 괜찮은 겁니까?”

그의 등 뒤에서 어리바리한 기사가 다가와 물었다. 기사 에이커는 얼마 전 에스티아에게 기선 제압을 당한 이후로 언제 거만했냐는 듯이 겸손해졌다. 웬트워스는 여전히 그가 못마땅했지만 어쩔 수 없이 대답해 줬다.

“기사님이 걱정할 건 아닙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따라오셔도 괜찮은 겁니까? 항상 전하 곁에 계시는 줄 알았는데.”

비가 오는 탓에 큰 목소리로 말해야 하는지라 대화 나누기가 힘들었다. 그런데도 에이커는 자꾸 웬트워스에게 말을 걸어 왔다.

“그래야 하죠. 그런데 같이 동행하시라는데 어쩝니까.”

에이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말은 대략 이랬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얼굴이 빨개진 에스티아에게 대공이 사과의 의미로 자기 기사를 딸려 보낸 것이다. 부려 먹고 싶은 데로 부려 먹으라고……. 요즘 에스티아라면 당연히 거절을 했겠지만 순간적으로 당황한 그녀는 그의 제안을 승낙하고 말았다.

아마 그래서 더 화가 난 것일 터였다. 그 길고 긴 짝사랑을 접을 정도로 독하게 마음을 먹었으니.

‘그나저나 말이 사과지, 이건 거의…….’

웬트워스는 애써 뒤에 떠오르는 말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근데 진짜 이 날씨에 산을 타는 겁니까?”

에이커의 초조한 음성이 웬트워스의 생각을 가로막았다. 웬트워스는 진심으로 에이커를 버리고 가고 싶었다. 별 도움도 안 되는 사람을 왜 보냈는지 모르겠다.

“그럼 진짜로 가지, 가짜로 갑니까?”

웬트워스의 말에 저절로 가시가 돋쳤다.

“아니, 가면 가는 거지, 왜 화를…….”

그러자 에이커는 곧바로 시무룩해졌다. 웬트워스는 그걸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태도가 바뀌었다고 해도 몇 주 전에 에스티아에게 한 행동을 떠올려 보면 좋게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웬트워스는 내심 안심하고 있었다. 아가씨가 에이커에게 사과하는 걸 보느니 차라리 비 오는 날 산을 타는 게 나았다. 다만…….

“아가씨.”

그의 주군이 산을 타는 건 정말 싫었다. 딴 게 아니라 전문 산악인도 아닌 귀족 아가씨가 이 날씨에 산을 타다가는 무슨 사고를 당할지 몰랐다.

“왜, 웬트?”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제가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해 드릴 테니 아가씨는 이만 들어가세요. 정말 위험합니다.”

웬트워스가 에스티아의 걸음을 따라잡으며 말했다.

“괜찮아, 많이 해 봤…….”

“많이?”

에스티아의 표정이 순간 당혹감으로 물들였다가 다시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완벽하게 훈련됐어. 절대 웬트를 곤란하게 안 할 테니 걱정하지 마.”

“그게 아니라……!”

웬트워스가 손을 뻗었지만 에스티아는 이를 무시하고 산 초입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거, 이거.’

웬트워스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에스티아가 다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피가 차게 식는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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