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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37화 (38/141)

37화 - 우리 결혼할까

다행히 비는 조금씩 멈추기 시작했다. 물론 아예 멈춘 건 아니고 소나기 정도로 오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그제야 웬트워스도 안심했다.

그 모습을 본 에스티아가 피식 웃었다.

반면에 에이커는 불안한 눈빛이었다. 그의 시선은 하늘을 향했다가 땅으로 향했다가 에스티아와 웬트워스에 꽂히기도 했다.

“아무래도 에이커가 이상한 오해를 하는 모양입니다.”

“나야 괜찮은데, 웬트는?”

“저도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오해해 주면 더 좋겠죠.”

웬트워스가 에이커를 찌릿 노려보며 말했다. 에스티아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에이커가 힘겹게 그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에이커, 괜찮아요? 힘들면 내려가도 좋아요.”

에스티아가 반쯤 진심으로, 반쯤 농담 식으로 말했다. 그만큼 에이커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아닙니다.”

에이커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걸 본 에스티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치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에스티아는 문득 자신도 아까 전 저택에서 저런 표정을 지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깨닫자 에스티아는 이를 꽉 깨물었다.

-정말 날 사랑하지 않습니까?

대공의 음성이 다시 떠올랐다. 에스티아는 그때 대답하지 못했다. ‘사랑하지 않는다’의 ‘사’조차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게 분하고 화가 났다. 그리고 겁이 났다.

요 근래 알 수 없이 눈물이 나오고, 화가 나고,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는 걸 보면 분명 동화되고 있었다. 에스티아에게. 그 사실이 두려웠다. 이 속에 에스티아의 ‘자아’가 있었다. 어쩌면 진짜 에스티아는 아직 여기에 있을지도 몰랐다.

‘무슨 지킬 앤 하이드도 아니고.’

에스티아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본 웬트워스가 그녀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가씨, 내려갈까요?”

고개를 돌려 본 웬트워스의 표정에는 걱정기가 다분했다. 에스티아는 미안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아냐, 그냥 머리가 좀 복잡해서.”

정신 차려야지. 에스티아는 속으로 다짐했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딴생각에 한눈이 팔려서는 안 되었다. 에스티아는 열심히 상인들과 약초를 찾으러 다녔다.

해가 어느새 꼭대기에 떴을 때 한 상인이 휴식 시간을 알렸다.

웬트워스가 누가 벤 듯 나이테가 드러난 나무 기둥 위에 깨끗한 천을 깔았다.

“춥지 않으십니까?”

아무리 여름이라고 해도 여름치고는 여전히 쌀쌀한 날씨였다. 에스티아는 웃으며 기둥 위에 앉았다.

“아니, 오히려 시원해. 비가 많이 그쳐서 다행이야.”

“네, 많이 그쳐서 다행이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아가씨를 둘러업고서라도 하산했을 겁니다.”

웬트워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본 에스티아는 뿌듯하다는 듯이 웃었다. 아직 자신이 이런 애정을 받는다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너무 신기했다.

“맞아, 웬트라면 그랬을 거야. 오늘은 사실…… 충동적인 행동이 맞았어.”

원래는 상단에 가서 스퀘일러와 이야기만 잠깐 하다가 오려고 했다. 그런데 대공과 그렇게 부딪히고 나니 집에 빨리 돌아가기 싫었다. 그렇다고 한가로이 여기저기 놀러 다니자니 잡생각이 많이 들 거 같았다.

“웬트.”

“네?”

웬트워스가 물을 마시며 대답했다.

“나랑 결혼할래?”

“풉.”

말하기가 무섭게 웬트워스가 물을 뱉어 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사레가 들린 듯 콜록콜록 기침까지 했다.

“어휴, 괜찮아?”

에스티아는 일어나서 웬트워스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웬트워스는 사례가 심하게 걸렸는지 계속 켁켁거렸다.

“아가씨…… 제가 잘못 들은 거겠죠?”

“아니, 제대로 들은 건데.”

에스티아는 웬트워스가 들고 있던 물통을 가져가더니 쭉 들이켰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십니까.”

“말도 안 될 건 또 뭐야. 내가 싫어?”

“아뇨!”

웬트워스가 화들짝 놀랐다. 에스티아는 그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물마저 입 안에 털어놓았다.

“근데 왜?”

에스티아가 천진난만한 표정을 하며 물었다. 웬트워스는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그러…… 그러니까…….”

“신분 차이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 내가 공작 영애 때려치우고 전문 상인으로 거듭나 볼게.”

에스티아는 눈을 찡긋했다. 웬트워스는 주저앉을 뻔한 걸 겨우 버텨 냈다.

“이런 대화를 해도 되는 겁니까……?”

“응? 안 될 건 뭔데!”

평온하던 에스티아가 얼굴을 붉히더니 버럭 했다.

“내가 뭐 누구 약혼자라도 된대!”

“아…… 아니, 그게!”

웬트워스가 당황하며 두 손을 저었다.

“여기에 기사 에이커도 있고…….”

“에이커가 어디 있는데! 없잖아! 아무 데도!”

“……?”

“……?”

큰 소리로 대화하던 두 사람이 동시에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옆에 있어야 할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폴! 에이커 기사님은 어디 계십니까?”

웬트워스가 다급히 한 상인을 붙잡고 물었다.

“기사님이요? 같이 따라오시는 거 아니셨습니까?”

폴은 덥수룩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다른 상인들에게도 물어도 마찬가지였다. 에이커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가씨.”

웬트워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무래도 어디에 조난…….”

황급히 말을 이어 가던 웬트워스가 갑자기 말을 뚝 멈췄다.

“왜? 무슨 소리…….”

“쉿.”

웬트워스가 검지를 입가에 갖다 댔다. 에스티아는 바로 입을 꾹 다물었다. 웬트워스가 어딘가를 향해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에스티아도 그를 따라 주변 소리에 집중했다. 무슨 소리가 들릴까 기대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결국 상인들과 주변을 둘러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웬트워스가 어딘가로 급히 달려갔다. 너무 빨라서 감히 쫓아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웬트!”

에스티아가 크게 소리를 질렀지만 그가 너무 빨라서 닿지 못했다.

결국 에스티아는 뛰는 걸 멈추고 헉헉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침을 한 번 삼키고 걸음을 옮기기 위해 허리를 폈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낭패였다. 함부로 걸음을 옮기는 게 아니었다. 자칫하다간 에이커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 조난당할 처지였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어디로 왔는지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침착하자, 침착해. 분명 웬트워스를 쫓아왔으니 여기 있다 보면 나타날 거야.’

에스티아는 스스로를 달랬지만 심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세차게 뛰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에스티아.’

“?”

에스티아는 고개를 홱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환청이라기에는 너무 선명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어디선가 분명 들어 본 목소리.

이상했다. 마나가 넘쳐흘러서 환각이나 환청을 유발하는 숲이나 산도 있었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리인데 그건 더더욱 아니었다.

결국 에스티아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물론 이번에는 헤매지 않도록 지나가는 길마다 나무의 작은 나뭇가지를 살짝 부러뜨려 놓는 걸 잊지 않았다.

‘에스티아…….’

슬픈 음성이었다. 깊은 고독이 배어 있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에스티아는 계속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이 소리를 따라가는 게 바보 같다는 건 알았지만 왠지 이 음성을 무시해서는 안 될 거 같았다.

에스티아는 걸음을 멈췄다. 그녀를 부르던 목소리가 멈춘 탓이었다. 에스티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더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돌아가야 하나 생각하는데 그때 에스티아의 시선에 무언가가 걸렸다.

땅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작은 빛이었지만 너무나도 뚜렷한 빛이었다. 에스티아는 그 빛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한쪽 무릎을 굽혔다.

꽃이었다. 줄기에 푸른 꽃송이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빛은 이 꽃에서 나오고 있었다.

‘꽃에서 빛이 왜 나와?’

여러 로판 소설을 읽어 보았지만 꽃에서 빛이 나온다는 얘기는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 에스티아는 꽃이 꺼림칙하면서도 외면하지 못했다. 오히려 손이 저절로 꽃을 향해 움직였다. 왠지 저 꽃잎을 한 번 만져 보고 싶었다. 촉감을 느껴 보고 싶었다.

“……씨……!”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전에 본 적이 있었나? 전생에서도 이렇게 예쁜 꽃을 본 적이…….

“……가씨!”

너무 예쁘다.

에스티아의 손이 점점 더 꽃 가까이로 향했다.

“아가씨!”

에스티아의 어깨가 움찔했다.

동시에 그녀의 손끝이 꽃잎 코앞에서 멈췄다. 에스티아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다.

“……?”

에스티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인 손을.

에스티아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가씨, 도대체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이번에는 진짜 누군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고개를 돌렸다. 웬트워스였다.

“웬트…….”

“왜 여기에 계시는 겁니까.”

웬트워스는 화가 나 있었다. 에스티아는 어버버 대답했다.

“그게…… 널 따라오다가…… 잠깐.”

더듬거리며 말하던 에스티아는 웬트워스 소매에 묻은 피를 발견했다.

“다쳤어!?”

에스티아가 웬트워스의 손목을 홱 하고 잡아당겼다. 웬트워스는 화가 난 와중에도 에스티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건 제 피가 아닙니다.”

“그러면?”

에스티아가 웬트워스의 손목을 잡고 물었다. 웬트워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건…….”

웬트워스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에이커 기사님의 피입니다.”

“뭐?”

머리가 하얘졌다. 에스티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렀다. 웬트워스도 이를 꽉 깨물었다.

꽃만이 그런 두 사람을 고요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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