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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38화 (39/141)

38화 - 끝나지 않았어

저택 안이 분주했다. 양동이를 든 하녀들이 분주하게 방과 방 사이를 오갔다. 에스티아는 방 한구석에 서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에이커의 부상은 치명적이진 않았지만 결코 가볍진 않았다. 의학적 지식을 약간 갖고 있는 사용인이 상처를 보고는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의사를 불러야 하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비는 하필 소나기에서 폭우로 변해 있었고 이런 날씨에 치료를 미루다가는 꼼짝없이 환자가 죽을 판이었다.

에스티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제 막 저택에 도착해 침대에 눕혔을 뿐이지만 이미 억겁의 시간이 흐른 거 같았다. 그만큼 아는 사람의 심각한 부상은 그녀에게 큰 충격이었다.

“에스티아.”

누군가 그녀를 불렀지만 에스티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에스티아.”

결국 목소리의 주인이 한 번 더 그녀를 부르고 나서야 에스티아는 그게 대공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전하…… 에…… 에이커가…….”

“진정하세요.”

커다란 손이 에스티아의 손을 감쌌다. 하녀들은 에이커 치료할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었고 웬트워스는 급한 대로 동네 의원을 찾으러 나갔기 때문에, 그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웬트…… 이…… 이안의 말로는 공격을 당한 거 같대요. 실력자 같다고 했어요.”

에스티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조금 더 그를 신경 써야 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날카롭게 쓰렸다.

급한 설명이긴 했지만, 웬트워스는 검기를 느꼈다고 했다. 살기가 잔뜩 깃든 검기라 모를 수가 없었다고.

“제가 더 신경 썼어야 했어요.”

에스티아는 대공의 손을 꼭 붙잡았다. 대공은 더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뇨, 에이커여서 그나마 산 겁니다. 당신이 거기에 있었다면…….”

대공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아무리 웬트워스가 있었어도 위험했을 겁니다.”

에스티아는 고개를 들었다. 눈에 보인 대공의 눈빛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

“제가 한번 상태를 보겠습니다.”

대공이 동의를 구하듯 에스티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에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이 큰 보폭으로 침대로 다가갔다. 분주히 오가던 하녀들은 바로 옆으로 비켜섰다.

대공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옷에 묻은 흥건한 피와 창백한 얼굴색만 보면 에이커는 거의 죽은 것처럼 보였다.

“전하.”

“실력자가 한 게 맞습니다. 그것도 전문적으로 암살 훈련을 받은.”

에스티아의 입이 꾹 닫혔다.

대공이 에이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그의 손에서 하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주변 하인‧하녀들은 물론 에스티아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하, 그건.”

“마나입니다. 에이커의 몸 안에 든 마나를 보고 있는 겁니다.”

대공의 표정이 더욱 딱딱해졌다. 엄청난 집중력이었다.

“마나가 훼손됐습니다. 누가 헤집어 놓았어요. 초급 마법사였으면 이미 죽었습니다.”

“마나요? 마나라면…….”

에스티아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마나라면 치유할 수 있어요. 저택에 창고가 있어요.”

“창고요? 버지니아 약초 창고는 여기서 마차를 타고 좀 더 나가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대공이 자신의 마나를 거두고 물었다. 에스티아가 고개를 저었다.

“저희 가문의 소속인 마법사들에게 부탁했어요. 상비약처럼 당신들을 위한 버지니아 약초를 주변에 마련해 두고 싶다고. 스퀘일러 상단주와 마법사들과 상의해서 저택에 작은 약초 창고를 만들었습니다. 그거라면…….”

좀 더 빨리 에이커를 치료할 수 있다.

“메리아나!”

“네, 아가씨.”

메리가 빠른 걸음으로 에스티아 옆으로 다가왔다.

“창고에 가서 빨리 약초를 가져와. 그리고 카린, 너는 빨리 상단에 들러 에팅을 데리고 와. 약을 만들 사람이 필요해. 최대한 빨리!”

네. 메리와 카린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신속하게 움직였다.

“괜찮습니까? 당신의 마법사들을 위한 약이 아닙니까.”

“치료가 먼저에요. 약초는 다시 재배하거나 마을에 있는 창고에서 조금 가져오면 돼요. 전혀 문제 될 거 없어요.”

이성을 되찾은 에스티아가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그보다 많이 심각해요?”

에스티아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육체의 부상보다 마나의 부상이 더 심각해요. 육체로 따지면…… 소위 말하는…….”

대공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칼부림을 당한 겁니다.”

“개자식.”

“영애?”

“쓰레기 같은 자식.”

에스티아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둘 중 하나예요. 약초를 노렸거나, 날 노렸거나.”

“……? 영애를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대공이 미간을 찌푸렸다. 에스티아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건 전하께서 제일 잘 아시겠죠.”

“그게 무슨…….”

화를 내며 에스티아에게 따지려던 대공은 자신의 옆에 있는 환자를 의식하고는 말을 멈췄다. 그 사이로 다시 하녀들이 바쁘게 오갔다. 다행히 웬트워스가 영지에 머물고 있던 의원을 데리고 왔다.

에스티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곧 두 손을 맞잡았다. 사실상 치료는 이제 시작이었다. 긴 밤이 시작되었다.

* * *

하녀들은 물론 하인, 의원, 웬트워스까지 전부 녹초가 되었다. 그나마 평소 하던 대로 추출물을 만들던 에팅만이 그나마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에팅, 고생 많았어.”

에스티아가 에팅의 어깨를 다독였다.

“아닙니다, 아가씨. 기사님이 안정된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에팅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온화한 웃음이었지만 그래도 지쳐 보였다.

“에팅?”

“예?”

대공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에팅을 불렀다. 에팅이 갑작스러운 대공의 목소리에 펄쩍 뛰었다.

“고생 많았습니다.”

“네?”

“엥?”

대공의 말에 에스티아와 에팅이 동시에 대답했다. 두 사람은 당황해서 눈이 커졌는데 반면 대공의 표정은 평화로웠다.

“상처도 잘 봉합되었고 마나도 진정되었으니 한숨 돌렸습니다. 이제 다들 쉬어요.”

대공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따뜻해서 에스티아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비꼬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를 증명하듯 사용인들이 하나같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방을 떠났다.

“에팅, 들어가요. 여기는 영애와 내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하던 일이라도 빨리 하느라 기력이 많이 쇠했을 거 아닙니까. 얼른요.”

부드러웠지만 묘하게 단호한 목소리였다. 에팅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결국 에스티아가 나서서 에팅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래, 얼른 들어가서 쉬어. 와 줘서 고마워, 에팅.”

작지만 따뜻한 손이 에팅의 손을 잡자 에팅의 얼굴이 벌게졌다.

“예, 아가씨.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르세요. 바로 달려오겠습니다.”

“그래!”

에스티아가 해사하게 웃었다. 에팅의 얼굴이 곧 터질 듯 벌겋게 달아올랐다. 결국 에팅이 고개를 돌렸다.

“그……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아가씨, 대공 전하.”

그러고서는 후다닥 방에서 나갔다.

왜 저러지? 원래 부끄러움이 많이 성격인가. 에스티아는 의문이 들었지만 애써 그 의문을 한쪽 구석에 밀어놓았다.

“전하.”

움찔. 근엄했던 표정은 어디로 가고 눈치를 보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에스티아는 순간 당황했지만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놀라셨죠?”

아무리 미운 인간이라도 어찌 되었든 계속 봐야 할 사람이었다. 에스티아는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사실 놀라긴 했습니다. 에이커는 제가 성인이 되기 이전부터 데리고 있던 아이라.”

“…….”

“영애를 책망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그렇게 만든 자의 잘못이지, 거기에 있던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 영애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고요. 오히려…….”

대공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영애 덕분에 에이커가 목숨을 건졌습니다.”

“아니에요.”

에스티아는 괜히 머쓱해졌다.

“제가 한 건 지시한 거밖에 없는데요.”

“명확하게 지시하고, 미리 대비를 해놓았죠. 덕분에 에이커는 금방 회복할 겁니다.”

에스티아는 왠지 이 방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대공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건 여전했지만 따뜻한 위로를 들으니 마음이 간질거렸다.

“다…… 당신 덕분이에요, 에스티아.”

대공의 입가에 은은하면서도 해사한 미소가 걸렸다.

쿵. 얼떨결에 그 미소를 본 에스티아는 순간 심장을 부여잡을 뻔했다. 동시에 몸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면서 현기증이 났다.

“……영애?”

에스티아의 안색이 창백해지자 대공의 표정이 다시 얼어붙었다.

“왜 그럽니까, 어디 아파요? 표정이 왜 이래요.”

대공의 큰 손이 에스티아의 뺨에 닿았다. 에스티아의 눈동자가 점점 흐려졌다.

“그게…… 좀 어지러워요.”

에스티아가 대공의 팔을 붙잡았다. 그걸 본 대공이 다른 손으로 에스티아의 이마를 짚었다.

“……하. 열나지 않습니까, 이게 무슨! 이럴까 봐 걱정했던 건데.”

대공이 다급히 의자를 끌어와 에스티아를 앉혔다. 그러고는 에스티아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평소의 에스티아라면 기함했을 일이지만 지금 그녀는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 봐 봐요, 에스티아. 나 봐요.”

대공이 에스티아의 두 손을 붙잡았다. 큰 손에 작은 두 손이 완벽하게 들어갔다.

“내 말에 대답할 수 있겠어요?”

“아…… 아…… 네…….”

에스티아는 겨우 대공의 말에 대답했다. 대공이 손을 뻗어 다시 에스티아의 뺨을 매만졌다.

“이런 날씨에 나간 탓도 있지만 놀라서 그런 것도 있을 겁니다. 당분간은 어디 나갈 생각 하지도 말아요. 알겠죠?”

그러면 왠지 답답할 거 같았지만 에스티아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대공이 몸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작은 에스티아의 몸이 대공의 실루엣에 완전히 가려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대공이 허리를 굽혀 에스티아를 조심스레 안았다. 그러고는 다리를 바쳐 그녀를 안아 들었다.

“전……하…….”

창백해진 입술에서 작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쉬셔야 합니다. 에이커는 어차피 제 아이이니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영애께서는 쉬세요.”

따뜻한 품에 자상한 음성이었다. 불과 며칠 전에 매서운 말을 내뱉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넘어가지 말아야지. 대공의 품에 안겨 방으로 향하던 에스티아는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에스티아’에 동화될 거 같아서.

그렇게 몇 번이나 다짐을 했을까. 어느새 침실에 도착한 대공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에스티아를 침대에 눕혔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손수 겉옷을 벗겨 주고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에스티아.”

꿈으로 빠져드는 에스티아의 귓가로 대공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을 노린 사람이, 약초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대공비 자리가 탐나서 그런 건지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목소리가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이어졌다.

“어제는 미안했어요. 그러니…… 아직은 다 끝났다고 말 못 하겠습니다.”

절대.

그 단어를 끝으로 에스티아는 완전히 꿈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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