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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39화 (40/141)

39화 - 꽃

원래의 자신과는 다르게 에스티아는 꽤 약한 몸인 거 같았다. 며칠 동안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으니. 나무라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빨리빨리’ 유전자가 사라지진 않았는지라 에스티아는 영 답답했다.

열이 충분히 내린 뒤에도 메리와 웬트워스는 에스티아가 침대 밖으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결국 에스티아는 거의 침대에서 음식만 받아먹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안색이 좋아졌다.

그날 이후 대공과는 당연히 마주친 적이 없었다. 에스티아도 거의 침실을 벗어나지 않기도 했고 대공도 구태여 에스티아를 보러 오지 않았다.

덕분에 에스티아는 환자 생활에 편하게 적응하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은 몸이 근질근질했는데 그 이후부터는 이 생활이 너무 좋았다. 이렇게 쉬어 본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나른해진 에스티아는 기지개를 쭉 켰다. 기분 좋은 감각이 발끝까지 퍼져 나갔다.

에팅도 잘 회복하고 있다고 하니 당장 불안해할 건 사라진 듯했다. 에스티아는 새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꽃은…….’

에스티아는 등을 베개에 기댄 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이상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던 꽃은 확실히 평범한 꽃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일부러 마력을 불어넣은 게 아닌 이상.

하지만 어떤 멍청이가 그렇게 깊은 숲에 있는 꽃에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안 그래도 이틀 전에 웬트워스에게 꽃을 조사해 달라고 부탁한 참이었다. 그를 불러 달라 설렁줄을 당기려던 에스티아는 손을 뻗다 말고 다시 내렸다. 아무리 편안하다 해도 몸이 근질근질한 건 사실이니 직접 가서 물어봐야겠다 싶었다.

에스티아는 긴 머리를 고무줄로 묶고, 옷장으로 가 편안한 카디건을 걸쳤다. 웬트워스는 본관 옆 별채에 머물고 있었으니 금방 만날 수 있었다.

에스티아는 총총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몸이 가벼워지니 저절로 신이 났다. 물론 대공이 머무는 방 앞을 지날 때는 조용히 지나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스티아는 사뿐사뿐 널찍한 계단을 내려갔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계단에 에스티아의 발이 살풋살풋 닿았다.

마지막 계단에서 내려오자 에이커가 머물고 있는 방문이 보였다. 잠시 얼굴을 보고 갈까 하던 에스티아는 문이 살짝 열려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에스티아는 살금살금 걸어 문틈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흰색에 가까운 옅은 은발이 보였다. 아무래도 대공이 며칠 내내 에이커의 곁을 지킨 모양이었다. 에스티아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문을 열었다.

지난번과는 다른 실내용 회색 코트 차림이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대공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이렇게 졸기도 하는 사람이구나 싶어서 새삼 신기했다. 냉혈하기만 한 사람은 아닌 거 같았다.

하기야 그러니 메르헨과 그렇게 진한 사랑을 했겠지. 내 사람에게는 잘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괜히 황실 기사단장이 아니겠지.

그도 과거에는 에스티아를 아꼈을까. 자신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아프면 이렇게 밤을 새워서 옆에 있기도 하고 그랬을까. 그는 분명 에스티아를 ‘미워’하고 있었다. 단순히 벌레 보듯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랬다면 더 편했을지도.’

에스티아의 눈빛이 고요히 잠겼다. 도대체 뭐 때문일까. 이 사람은 어떤 일 때문에 그토록 에스티아를 미워하게 되었을까.

에스티아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남자처럼 힘만 세다면 머리라도 한 대 때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대신 에스티아는 대공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바깥에서 많이 활동하는지 피부는 살짝 탔지만 그럼에도 하얀 피부였다. 속눈썹은 한번 건드려 보고 싶을 만큼 길었고 콧매도 부드러운 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입술은 피곤한지 조금 갈라지긴 했지만 붉은 기가 적절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머리는 방금 감았는지 촉촉했는데 그 흐트러진 모습이 마음속의 은밀한 배덕감을 부추겼다. 그걸 깨닫는 순간 에스티아는 맞아야 할 사람은 대공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비수 같은 말들을 듣고도 저 모습에 혹하는 자신이 정말 한심했다.

“……아.”

그렇게 스스로를 책망하며 등을 돌리던 에스티아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멈칫했다.

“왜…….”

깨어났나 싶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았는데 대공의 눈은 여전히 꼭 감겨 있었다.

‘잠꼬대?’

이 사람도 잠꼬대를 하는구나.

새삼 신기해진 에스티아는 대공의 옆에 서서 허리를 숙였다.

눈만 감고 있으면 순둥이 같은 사람이 눈만 뜨면 어쩜 그렇게 재수가 없을까. 정말 그저 그런 엑스트라에 빙의했으면 차라리 마음껏 선망이라도 했을 텐데.

에스티아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삶에 많이 적응하긴 했지만 앞으로가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역시 한시라도 빨리 더 열심히 일해야 했다. 에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올렸다. 다시 대공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대공은 눈도 참 예뻤다. 지금도 이렇게 보고 있으니 푸른 초원이 생각나는…… 응? 지금?

“악!”

에스티아는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대공은 그런 그녀를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먼저 봐 놓고 왜 본인이 놀랍니까?”

“하…… 그…… 주무시는 줄 알고.”

가슴에 손을 올리고 떨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던 에스티아는 곧 그 말이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빠르게 해명했다.

“아, 그니까, 그, 문이 열려 있길래 들어왔는데 악몽을 꾸고 계시길래요. 안 좋은 꿈 꾸셨나 봐요.”

에스티아는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 어색하다 싶었다.

“머리를 묶었네요.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이 사람이 왜 또 이렇게 간지럽게 얘기할까. 에스티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네, 그냥, 이게 돌아다니기 편할 거 같아서요.”

그냥 툭 내뱉던 에스티아는 아차 했다. 딱 대공이 물어뜯기 좋은 말이었다.

날카로운 말에 대비하려던 에스티아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는 대공을 보고 흠칫했다. 고요한 표정이었다.

“예전에도 그랬어요, 영애는.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걸 좋아했어요.”

“아…… 그랬나요?”

그걸 알 턱이 없는 에스티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공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그려졌다.

“물론 나중에는 후계자 수업을 받는다고 그마저도 제한 당했지만.”

어쩌면 이 사람이 에스티아를 미워하기 시작한 건 그렇게 예전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얇은 차림으로 어딜 가십니까?”

마음 같아서는 알 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는데 괜히 또 신경을 자극할 필요는 없을 듯하여 에스티아는 순순히 대답했다.

“웬트워스를 만나러 가려고요.”

“아하.”

에스티아의 눈썹이 움찔했다. 단 두 글자였지만 왠지 말에 뼈가 있었다.

“뭐, 웬트, 아니 이안은 언제 어떻게 만나도 편한 사람이니까요.”

에스티아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며 말을 툭 내뱉었다.

“그렇죠, 편하면 옷이 얼마나 얇든, 남자를 만나러 가든 여자를 만나러 가든 편하게 입고 편하게 이름 부르고 그러겠죠.”

역시 비꼬지 않으면 에버하르트 바일이 아니지.

“하지만 저 같으면 뭐 하나라도 더 껴입을 겁니다. 어쨌든 ‘외간 남자’가 혼자 있는 곳에 가는 거니까.”

의도가 다분한 말이었다.

‘누가 보면 내 약혼자인 줄 알겠네.’

에스티아는 속으로 코웃음을 흘렸다.

“저 같으면 괜히 꾸미면서 시간 버리느니 조금이라도 빨리 가서 내 친구를 보겠어요. 그리고.”

에스티아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팍 쳐들었다.

“그런 말은 셰린포드 영애에게 하는 게 더 좋을 거 같다고 생각하는데, 전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

대공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에스티아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럼 쉬세요, 대공 전하. 저는 제 ‘친구’ 이안을 보러 가겠습니다.”

“영…….”

대공이 무슨 말을 꺼내려고 입술을 움직였지만 에스티아는 못 들은 척 방을 나섰다. 손수 문까지 꼭 닫아 준 에스티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별관으로 향했다.

* * *

별관은 공작가의 별관답게 큰 규모를 자랑한 반면 소박한 내부를 갖고 있었다. 기본적인 가구 외에는 작은 장식품 하나 없었다. 웬트워스의 평소 성향을 보여 주듯 먼지 한 톨 떨어져 있지 않았다. 에스티아는 꾀죄죄한 자신의 차림새를 보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별관의 하녀는 에스티아에게 공손하게 인사하고는 웬트워스가 잠시 자리를 비웠노라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길지 않으니 응접실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다과를 준비하러 갔다.

에스티아는 하녀가 준비한 다과를 먹으며 웬트워스를 기다렸다. 다행히 웬트워스는 오래 지나지 않아 곧 돌아왔다.

“아가씨!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오시면 어떡합니까!”

웬트워스는 응접실에 들어오자마자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다 나은 거 같다고 바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둥, 여름이라고 해도 감기가 걸렸으면 얇게 입고 다니면 안 된다는 둥 온갖 말들을 쏟아부었다.

에스티아가 괜찮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물구나무라도 하려고 하자 그제야 잔소리를 멈췄다.

“후…… 정말 이제는 괜찮으신 겁니까?”

“그렇다니까!”

에스티아는 초코 쿠키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나저나 어디 갔다 왔어?”

에스티아는 쿠키를 열심히 씹었다. 단맛이 혀끝에서 시작해 온 입 안을 물들였다.

“아, 마찻길을 보러 갔었습니다.”

“어땠어?”

천연덕스럽게 쿠키를 먹던 에스티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말도 아닙니다. 진흙에, 마차들 잔재에, 나뭇가지에……. 치울 만하면 폭우가 내리니 큰 문제입니다. 아마도 꽤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야 할 거 같습니다.”

“그렇구나. 아, 그러고 보니…….”

본래 여기로 온 목적을 떠올린 에스티아가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봤던 꽃에 대해 알아봤나 해서. 나중에 들을까 했는데 계속 신경이 쓰여서 왔어.”

“아.”

웬트워스가 꽃의 모습을 떠올리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알아봤는데 마법사들도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라고 하더군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대로 알아 오지 못해서.”

“아니야, 괜찮아.”

“대신.”

“?”

웬트워스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어두워졌다.

“소문이 하나 돌고 있었습니다.”

“무슨 소문?”

“그게…….”

웬트워스가 난감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무래도 평범한 소문은 아닌 듯했다. 에스티아는 차분하게 웬트워스의 말을 기다렸다.

“아가씨가 말씀하신 꽃 이야기는 못 들었지만 대신 누군가가 특정 꽃을 찾아다닌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응? 무슨 꽃?”

“‘히아신스’요.”

히아신스? 에스티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설의 꽃이라고 하더군요. 영원한 마력을 얻을 수 있는 꽃이라고 합니다. 마법사들이 오랜 세월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고요.”

“…….”

왠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꽃을 발견한 시기에 누군가가 전설의 꽃을 찾아다닌다는 소문이 맞물렸다. 설마…….

“그런데 그 꽃을…….”

웬트워스가 잠시 말끝을 흐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찾아다니는 사람이…… 오스카 후작님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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