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 감히
에스티아가 별관에 머무르고 있을 무렵, 저택에는 두 손님이 찾아왔다.
한 손님은 메르헨에게서 온 답신이었고, 다른 손님은 에스티아 병문안을 위해 방문한 사람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메르헨이 에스티아에게 어떤 편지를 보냈는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역시 가장 궁금한 건 왜 눈앞의 남자가 이 집에 왔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뵙네요, 대공 전하.”
나긋나긋하면서 동시에 여유로운 톤이었다. 그는 그 목소리가 미치도록 싫었다.
“오랜만입니다, 오스카 후작.”
대공이 낮게 읊조렸다. 에스티아가 별관으로 갈 때만 해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는데 지금은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후작이 여길 올 이유는 없을 거 같은데.”
“없긴요.”
오스카 후작이 싱긋 웃었다.
“얼마 전에 영애께서 제 펜던트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안 그래도 답례를 해야 했는데, 영애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어서요.”
으득. 대공의 아래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얼마 전에 에스티아가 흘렸던 펜던트가 떠올랐다.
“미리 기별은 하고 오신 겁니까? 잘, 아시다시피 영애께서는 지금 몸이 좋지 않으신데요.”
“글쎄요, 워낙 편하게 서로의 집을 왔다 갔다 해서.”
대공은 잠시 방에 놓고 온 검을 가지고 올까 고민했다. 그만큼 후작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있다 못해 흘러넘치고 있었다.
“오히려 미리 기별해야 하는 건 대공 전하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지금 이렇게 머물고 계신 게 영애한테 얼마나 큰 불편함일지…….”
결국 대공은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전쟁에 참여할 때보다 감정을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병문안을 오셨다?”
대공의 눈에서 형형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후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곁에 있는 사용인에게 물었다.
“영애께서 어디 계신다고요?”
“잠시 남작님을 뵈러 갔습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아가씨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예, 그럼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전해 주세요.”
“네.”
후작이 특정 대목에서 딱 대공을 쳐다보며 말했다. 카린이 긴장한 낯빛으로 대답하며 물러갔다.
‘젠장.’
등 뒤로 쥔 대공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예 대놓고 하는 도발에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게 혐오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별관의 문이라도 틀어 잠그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녀가 이곳으로 오지 못하도록.
“한 가지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다른 사용인을 따라 응접실로 가려던 후작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대공에게 말을 건넸다.
“어디 들어 보죠.”
대공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후작은 언뜻 보면 공손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보통을 통해 전해 들으니, 영애와 전하가 서로에게 더는 마음이 없는 거 같다고 하더군요.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장기간 영애의 집을 머무는 건 다소 결례가 어긋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 치 혀로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역시 그 말이었다. 대공은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그래서 여기에서 나가 줬으면 좋겠다, 이겁니까?”
“아뇨, 그저 전하와 에스티아 영애의 명성에 흠이 갈까 걱정이 되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에스티아 영애.
‘감히.’
대공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후작이 여전히 미소를 띠운 채 말을 이었다.
“정 저택으로 돌아가실 수 없으면 저희 저택의 방이라도 내어 드릴까요?”
“입 조심하세요, 후작.”
대공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말을 내뱉지 말고.”
“아, 죄송합니다. 제가 지나쳤군요. 다만 이미 약혼 내정자도 있으신 분이 계속 여기에 계시는 게 염려스러워서 그랬습니다.”
“약혼 내정자?”
“네, 메르헨 셰린포드 공작 영애 말입니다.”
대공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역시 그 이름을 왜 안 꺼냈나 했다.
대공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뭐라고 해야 할지, 너무 많아서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두 분 사이야 워낙 견고하시지만, 뭐든지……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후작은 그 말을 끝으로 허리를 숙이고는 응접실로 사라졌다. 대공은 한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바늘로 찌르듯 콕콕 쑤시고 속이 메스꺼웠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사용인이 다가와 물었다. 대공은 겨우 눈을 뜨며 대답했다.
“두통약 좀 가져다주겠나?”
“예, 전하.”
사용인은 깍듯하게 절하고는 약 창고로 걸음을 옮겼다.
‘하…….’
대공은 입을 틀어막았다. 사라졌던 ‘증상’이 다시 튀어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그는 지친 걸음으로 에이커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를 위해 마련된 푹신한 의자에 앉자 잠시 안도감이 들었지만 그것마저도 곧 사라졌다. 그리고 곧 극심한 불안감과 초조함이 몰려왔다.
두 손을 들어 입을 덮었다. 식은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윽.”
대공은 숨을 헉헉 골랐다. 자괴감이 그의 목을 졸라왔다. 겨우 이 정도로 동요한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이래 가지고서야 그의 말이 틀렸다는 것도 증명하지 못할 판이었다. 조금도.
‘안 돼, 절대 안 돼.’
두 손을 맞잡은 손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에버하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절대, 절대 이대로 뺏길 수 없었다.
* * *
에스티아는 옷을 갈아입고 카린을 따라 로비로 들어섰다. 웬트워스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에스티아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남자 두 명이 지금 이 순간 동시에 이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왠지 폭풍전야의 기운이 감돌았다.
에스티아는 웬트워스를 곁눈질했다. 웬트워스도 에스티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신호를 교환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단단히 각오하자는 말이 무언으로 오갔다.
에이커와 대공이 있는 방은 굳게 닫혀 있었다.
평소에 틈만 나면 어디서든 갑자기 나타나는 사람인데 조용하니 에스티아는 괜히 불안했다. 오스카 후작을 싫어하는 거 같긴 했는데, 혹시 그래서 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까?
에스티아는 긴장한 눈빛으로 응접실 문을 쳐다보았다.
“아가씨, 몸이 좋지 않으시다고 전달 드릴까요?”
그걸 기민하게 눈치챈 웬트워스가 에스티아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아냐, 왠지 오늘은 꼭 만나야 할 거 같은 기분이 들어.”
에스티아는 카린에게 눈짓했다. 카린은 응접실 문을 노크하고는 에스티아가 왔음을 알렸다. 그리고는 문을 열었다.
연보라색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남자가 손님용 의자에 앉아 있었다. 검정색 외출복은 적절하게 몸에 딱 맞아 절로 테가 흘렀다. 오죽하면 평소에 포커페이스인 카린마저도 얼굴을 붉힐 정도였다.
“후작님.”
“영애.”
오스카가 부드러운 동작으로 소파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군더더기 없는 몸짓이었다.
“몸은 이제 괜찮으십니까.”
“네, 덕분에 많이 나아졌습니다.”
에스티아는 애써 어색함을 숨기며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을 겪으셔서 많이 놀라셨나 봅니다.”
“놀라긴 했지만 다행히 잘 회복하고 있습니다. 저도, 에이커 기사도.”
“그렇군요……. 그를 공격한 범인까지 알게 된다면 더 좋을 텐데요.”
에스티아의 미간이 움찔했다. 왠지 모를 서늘한 느낌이 에스티아의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잡아야죠. 그런 짓을 한 사람은.”
에스티아는 다짐하듯 말했다. 오스카가 온화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후의 일은 대공 전하께서 잘 처리하실 테니까요. 그의 사람이지 않습니까.”
왠지 그의 사람이니 더 이상 참견하지 말라는 말 같았다. 에스티아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저와 동행하다 생겨난 일입니다. 제 책임도 있는 게 맞아요.”
“정확히는 영애와 동행한 게 아니라 상단과 동행을 한 것이지요.”
“아뇨, 저 때문에 따라오신 게 맞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사과의 의미로 보내신 거니까요.”
“그렇다면 더더욱.”
후작이 은은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애의 책임이 아니죠.”
“…….”
결국 에스티아가 먼저 입을 다물었다. 이러다가 대화가 끝나지 않을 거 같아서였다.
“영애를 뭐라 하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에스티아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후작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사과했다. 에스티아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어요.”
“답례를 하려고 온 건데 죄송합니다. 답례이자 사과의 선물로 받아 주세요.”
오스카가 몸을 일으켜 옆에 두었던 꽃다발을 건넸다. 고급스러운 포장지에 곱게 쌓인 꽃다발이었다. 에스티아는 화려한 꽃에 한 번 더 놀랐고, 저 화려한 꽃을 미처 보지 못했다는 거에 또 한 번 놀랐다.
“아름다워요.”
“좋아하시니 기쁩니다.”
오스카가 싱긋 웃었다. 저 미소를 보니 왜 새삼 귀족 영애들이 그렇게 목을 매는지 알 거 같았다.
“이렇게 와 주실 필요는 없는데…….”
“어떻게 제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의 영애와의 우정이 있는데요.”
우정? 에스티아는 그 대목에서 자신도 모르게 웃을 뻔했다. 그녀에게 청혼까지 했던 사람이 우정이라니.
“그나저나 대공 전하가 여기에 계셔서 신경 쓸 게 많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침묵하고 있는데 오스카가 불쑥 대공을 언급했다. 에스티아는 침착하게 차를 마셨지만 속으로는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업무적인 것만 이야기를 나누니까요.”
“그래도…… 그분과 약혼을 하고 싶어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아니다’라고 대답하려던 에스티아는 입을 다물었다. 왠지 그의 화법에 감기는 거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튼,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말 괜찮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다행히 오스카는 더 캐묻지 않고 넘어갔다. 하지만 이마저도 계산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꽃이 무슨 꽃인지 아십니까.”
“튤립이네요…….”
“맞습니다.”
오스카가 미소를 지었다. 그걸 본 에스티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서늘한 기운이 그녀의 팔을 타고 올라왔다.
“제가 전에 좋아했던 꽃이죠. 영애에게 꼭 드리고 싶어서.”
에스티아의 손이 잘게 떨렸다. 왠지 당장 이 꽃을 내려놓고 싶었다.
“다음번에 저희 꽃밭 또 보러 오시죠. 다시…… 튤립을 심어 볼까 합니다.”
에스티아는 더는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영애, 괜찮으십니까?”
에스티아의 표정을 본 오스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에스티아를 향해 다가왔다.
오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오스카가 에스티아의 옆에 앉고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이런, 아직 열이 납니다. 제가 방까지 데려다 드릴까요?”
에스티아는 그의 손을 쳐내고 싶었다. 싫다고 고개를 젓고 싶었다. 그런데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기운이 쭉 빠졌다.
동시에 몸을 옥죄어 오는 마력을 느꼈다. 에스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디서인가 느껴 본 적이 있는 마력이었다.
-에스티아.
에스티아는 눈을 번쩍 떴다. 그 목소리였다. 숲에서 봤던 그 목소리. 그때 느꼈던 기운.
그 꽃.
에스티아는 오스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후작의 미소는 부드러웠지만 그녀를 뚫릴 듯 바라보았다.
그때 보았던 꽃의 기운을 그대로 머금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