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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41화 (42/141)

41화 - 살려 줘

살면서 종종 마음속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평소와 같은 일상을 사는데 유독 마음이 지친 날이거나 뭔가 이상한 낌새를 감지할 때. 지금 이 상황은 당연히 후자였다.

사실 빙의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마법이니 마력이니 하는 건 잘 모른다. 다만 지금 이 남자가 자신으로부터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말이 되지 않으니까.

후작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현실인지 꿈인지 정신이 몽롱할 정도였다.

-……줘.

그때 그녀의 귓가에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지, 이 목소리는?

-……터, 우리 ……를 살…… 줘.

그 목소리를 가만히 듣던 에스티아는 곧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바로 그녀의 목소리였다. 누군가에게 간절히 빌며 말하는 슬픈 음성.

에스티아는 곧 그 음성이 과거의 에스티아가 보내는 사이렌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렇다면 남은 궁금증은 이거였다. 왜 하필 이 말이 들려오는가. 에스티아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그걸 알아야 왜 이 후작이 에스티아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지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에스티아는 과거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빅터…… 제발…….

과거의 에스티아가 조용히 흐느꼈다.

-……를 살려 줘.

“에스티아!”

에스티아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이 목소리는 꿈속의 음성이 아니었다. 엄연히 현실의 소리였다.

“에스티아, 안에 있습니까?”

‘대공?’

에스티아의 눈이 겨우 문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후작의 눈동자도 옆으로 향했다. 그의 눈은 고요했지만 동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로를 담고 있었다.

“메리! 응접실 문이 왜 잠겨 있습니까?”

대공이 뭔가 이상한 걸 눈치를 챈 걸까? 그녀가 지금 뭐라 할 수 없는 함정에 빠졌다는걸.

“열쇠 가져오세요. 그리고 오스카 후작.”

서늘한 음성이 문 너머로 들려왔다.

“당장 이 빌어먹을 문 열지 않으면…….”

대공이 문을 내리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내 이름을 걸고 당신을 죽이겠습니다.”

에스티아는 눈을 깜빡였다. 이상했다. 저 말만 들으면 그가 그녀를 지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은가.

‘말이 되지 않는데.’

에스티아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손에 더 힘을 몰아넣었다. 그러자 손이 꿈틀 움직이며 위로 들렸다. 에스티아는 그대로 후작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목에서 곧바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에버하르트!”

어디선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대공이 정말로 문을 부순 모양이었다.

“에스티아.”

초조하고 다급한 음성이 에스티아를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정신이 몽롱해졌다.

“라 빅터 오스카!”

불안하게 흔들리던 음성은 곧 분노를 가득히 담아냈다.

“너…….”

“영애가 몸이 안 좋으신 모양입니다.”

“뭐?”

“아직 열이 많으신 거 같군요.”

단조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동시에 긴 팔이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왠지 깨어나고 나서도 방금 일을 기억 못 하실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조금이라도 이 여자한테 무슨 일 생기기만 해. 그 수십 배, 수백 배로 돌려받을 줄 알아.”

침착하지만 벼린 칼이 서린 목소리였다.

“이 여자의 행복도, 불행도 처음부터 내 것이었어. 네놈이 넘볼 게 아니야.”

뭔 소리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후작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어쩌죠, 이제는 아닌 거 같은데.”

“입 다물어.”

“영애가 깨어나시거든 물어보세요. 당신을 사랑하는지.”

“…….”

“아, 그리고.”

마치 일상 얘기하는 것처럼 후작의 목소리가 평온하게 이어졌다.

“당신의 피앙세, 뭐 하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장난스럽게 웃는 목소리가 묘하게 소름이 돋았다.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고 그걸 눈치챈 대공이 그녀를 더 꼭 껴안았다.

“메르헨에게 허튼수작 부릴 생각하지 마.”

“왜요, 사랑해서요?”

윽. 에스티아가 괴로운 듯 몸을 비틀었다. 대공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네놈한테 대답할 건 아니야. 당장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

“그 말을,”

후작이 싱긋 웃었다.

“당신이 아닌 내가 하게 될 날이 올 겁니다. 그럼.”

후작이 사라져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옆으로 메리가 총총 다가오는 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아가씨!”

“메리, 따뜻한 물과 수건 좀 가져와요.”

“네, 대공 전하!”

메리가 후다닥 다시 사라졌다. 대공이 계단을 향해 걸어가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열이 나는 게 아니라 차갑잖아.”

그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에스티아.”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에스티아.”

그가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에스티아는 꿈속에서 그 목소리를 조용히 들었다.

과거 언젠가 들었던 거 같은 따뜻한 목소리였다.

* * *

“아가씨.”

하녀가 눈치를 보며 조금씩 자기 주인에게로 다가갔다.

“에스티아 아가씨의 답신은 오지 않았고, 그, 그, 대공 전하는…….”

“러스.”

그녀가 상냥한 목소리로 하인을 불렀다.

“나한테 보고할 때는 어떻게 하라고 했지?”

“네?”

“나한테 보고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잖아.”

맞잡은 여린 두 손이 덜덜 떨렸다. 러스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겨우 말했다.

“보고할 때는 말을 더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여인이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겠니?”

“죄송…… 합니다…….”

“이 혀가 굳이 필요할까 싶어.”

하얀 손가락이 창백한 입술에 닿았다.

“어차피 제 기능을 하지 못하잖아.”

“아…… 아가씨……!”

러스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갖다 댔다.

“죄송합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용서 받고 싶으면 제대로 정보 알아갖고 와. 이미 알고 있는 거 얘기하지 말고.”

서늘한 목소리가 러스의 귓가에 꽂혔다. 그녀는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영애에게 다시 편지를 써야 할까. 지금이라면 말을 잘 들을 거 같은데.”

오밀조밀한 얼굴에 차가운 냉기가 흘렀다.

바닥에 엎드린 채 울고 있는 하녀를 옆에 두고, 여인은 편지지 대신 옆에 놓여 있던 신문을 펼쳤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 * *

다행히 에스티아는 1시간도 안 되어서 일어났다. 주변 사용인들은 안심하는 동시에 방금 전 일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에스티아를 보고는 다들 다시 울상이 됐다.

에스티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로서도 무척 답답했다. 오스카 후작이 꽃을 들고 왔던 건 기억나는데 그 이후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용인들한테 물어보니 대공과 후작이 싸운 거 같다는 말만 했다. 대공이 문을 부쉈다고.

머릿속에 물음표가 수십 개 떠올랐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확실한 건 당사자들한테 물어봐야 한다는 건데 문제는 그 당사자들이 되도록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에스티아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팡팡 찼다. 당분간 이리저리 쏘다니는 건 물 건너갔다. 며칠 사이에 벌써 두 번이나 쓰러진 게 되어 버렸으니. 게다가 한 번은 남주 때문에, 다른 한 번은 원작에 등장도 하지 않는 인물과 같이 있다가 그렇게 됐다.

‘에스티아의 운명도 참 기구하구나.’

어떻게 보면 에스티아에 빙의한 게 그렇게 이상하지 않은 거 같았다. 둘 다 세상의 미움과 경멸을 받은 사람들이니까.

에스티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궁금한 걸 참지 않고 부딪히고 싶을 때는 제대로 부딪혀 보는 거였다.

에스티아는 침대에서 내려와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문을 벌컥 열었다.

“악!”

문을 연 에스티아는 빽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방에 예상치도 못한 사람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왜 또 거기에 계세요오!!”

에스티아가 심장을 부여잡으며 태연하게 앉아 있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뭘 놀랍니까? 전에는 매일 이랬는데.”

긴 손가락이 신문을 차락 넘겼다. 에스티아는 씩씩거리며 자신의 책상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대공이 나른한 표정을 한 채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것도 바로 그녀의 의자, 그녀의 책상에서.

“뭐, 매일 이랬다고요?!”

에스티아가 책상을 두 손으로 짚었다. 대공은 그때까지도 시선을 들지 않았다.

“예, 2년 전만 해도 매일같이 찾아왔었던 거 기억 안 나십니까?”

알 게 뭐야! 에스티아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몸이 많이 찼는데요.”

“후…….”

에스티아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상전이었다, 상전.

“그러게, 성치 않은 몸으로 손님을 맞을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몸도 약한 사람이.”

참나 뭔 상관이래.

에스티아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가 몸이 약하든 말든 본인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히려 얼굴 보지 않아도 되니 좋지 않은가.

그 생각이 들자 에스티아는 대공 앞으로 몸을 쑥 내밀었다.

“과거에는 어찌 되었든, 지금은 그런 편한 사이가 아니잖아요.”

탁. 대공이 신문을 뒤로 젖혔다.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왜요, 전처럼 행동하면 다시 나한테 미련을 가질까 봐 겁납니까?”

에스티아는 힘이 쭉 빠지는 걸 느꼈다. 그러자 그걸 본 대공이 일어서더니 에스티아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무슨 사람이 열이 났다가 찼다가 그럽니까. 당분간 어디 돌아다닐 생각 말아요.”

따뜻한 손이었다. 내심 느낌이 좋다고 생각했던 에스티아는 그런 스스로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러는 전하야말로 선을 지키세요. 지금 선을 넘고 있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전하 같습니다만.”

에스티아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안 그래도 책상 위에 놓인 편지가 눈에 들어온 참이었다.

웬트워스가 그녀를 돌보느라 편지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기에, 오늘은 꼭 답장해야 하는 편지였다.

“자리에서 비켜 주시죠. 편지에 답신을 해야 해서.”

“메르헨의 편지 말입니까?”

헙. 에스티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보셨어요!?”

“사용인이 편지 들고 오는 걸 우연히 봤을 뿐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전 영애의 ‘증명’을 진심으로 응원하거든요.”

대공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형형하게 빛났다. 에스티아는 흠칫 뒤로 물러섰다.

“그럼 쉬세요. 전 기사단으로 훈련을 지휘하러 가야 해서.”

대공은 부드러운 몸짓으로 에스티아를 스쳐 지나갔다.

문이 닫히는 동시에 에스티아는 대공이 보고 있던 신문을 집어 들었다.

신문 1면을 계속 보고 있었는지 앞면이 꾸깃꾸깃했다.

1면에는 귀족 영애들의 실종 기사가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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