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 좋아하는 장소
상단에는 하루에 수십 건의 주문이 밀려들어 왔다. 에스티아는 스퀘일러 상단주 옆에서 업무를 도우며 열심히 상단 일을 배웠다. 오스카 후작이 방문해서 쓰러졌던 날조차 집에서 쉬지 않고 상단으로 출근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에스티아가 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사흘 동안 웬트워스를 시켜 오스카 후작의 소문을 조사하고 있었고, 오늘 오후에는 메르헨과 마찻길 복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였다.
사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메르헨도 꽤나 속이 상했을 터였다. 세간에서 그의 약혼녀로 꼽는 대표적인 두 인물이 그녀와 에스티아였으니. 자신이 메르헨이었어도 다른 여자 집에 머물고 있다는 걸 알면 속이 탔을 터였다.
‘오늘 꼭 만나서 안심시켜야겠어.’
에스티아는 두 손을 불끈 쥐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아가씨?”
에팅이 그녀가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자 에스티아가 멋쩍은 듯 손의 힘을 풀었다.
“아, 별건 아니고, 오늘 셰린포드 영애를 만나기로 했어.”
“셰린포드 아가씨를요?”
에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스티아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영애와 친해지려고. 내가 잘못한 게 많아서.”
“…….”
에팅의 표정이 묘하게 어두워졌다. 그 모습에 에스티아가 안심하라는 듯 두 손을 흔들었다.
“어휴, 걱정하지 마. 내가 원해서, 잘해 드리고 싶은 거야. 이왕이면 소문 좀 내줘. 내가 누구한테 털끝만치도 미련 없는 거 같다고.”
에스티아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제야 에팅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그런 소문이라면 언제든지 내 드리겠습니다. 저만 믿으세요, 아가씨. 제가 발이 꽤 넓거든요.”
“오, 그것 좀 든든한데.”
에스티아와 에팅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그 사이로 연륜 있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두 사람, 꽤 많이 친해진 거 같습니다.”
“상단주님!”
에스티아가 자리에서 번쩍 일어나 상단주의 품으로 안겼다.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에스티아를 토닥였다. 에팅은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글쎄, 당분간 쉬시라는 데 참 말 안 들으십니다.”
“괜찮아요! 제가 얼마나 튼튼한데요.”
에스티아가 스퀘일러의 손을 잡고 밝게 웃었다.
“아가씨가 튼튼하다라……. 지금은 어떠실지 몰라도 예전에는 전혀 아니었는걸요.”
“아? 그랬나요?”
에스티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스퀘일러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 안 나십니까. 툭 하면 아프셔서 주변에서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요. 자주 못 찾아뵙던 제가 소식을 알 정도였습니다.”
“아…….”
진짜 몸이 약하긴 했나 보다. 근데 원작에서는 왜 이런 내용이 안 나왔대?
“마님께서도…… 참 마음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스퀘일러가 조심스러운 투로 말했다.
‘마님?’
잠깐 마님이라면.
“제 어머니…… 말씀하시는 거죠?”
“예, 언제나 좋으신 분이었죠.”
에스티아의 눈이 반짝거렸다. 에스티아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아가씨.”
스퀘일러가 의자를 권했다. 에스티아는 후다닥 의자에 앉았다.
“상단주님,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 어머니 얘기 좀 하고 싶은데.”
“아가씨께서 갑자기 웬일이십니까. 평소에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 하시는 거 같더니.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으십니까?”
스퀘일러의 표정에 호기심이 감돌았다. 에스티아는 괜히 멋쩍어져서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단주님께서는 저희 어머니와 친하셨나요?”
“감히 친하다고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선대 공작 부인…… 그니까 마님께서 저희 상단을 신경 써 주신 것이죠. 가끔 혼자서 상단을 방문해 주셨습니다. 아가씨처럼 몸이 약하셨는데…….”
에스티아는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에스티아의 어머니는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건가.
“벌써 마님께서 돌아가신 지 2년이 되었네요.”
“2년이요!?”
에스티아의 눈이 커졌다. 스퀘일러가 그 반응이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렀나 해서요.”
“그렇네요, 벌써.”
스퀘일러의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의학이 좀 더 발전했으면 좋았을 겁니다. 정말로요. 그렇다면 마님께서 좀 더 아가씨 곁에 계실 수 있었을 겁니다. 아가씨는 그만큼 덜 우셨겠죠.”
에스티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왠지 울컥했다.
어쩌면 그의 말에서 알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레멘드 공작 부인이 그녀에게 무척 다정한 어머니였다는걸.
“이럴 때면, 아가씨께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각하가 참 원망스럽습니다.”
에스티아는 나지막이 숨을 뱉어 냈다. 이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 아버지 말씀하시는 거죠?”
“예, 아가씨. 그때 각하가 마님께 따뜻하고 아가씨께 자상했으면…….”
그가 목이 메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 에스티아는 그를 위로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뭔가가…… 조금은, 조금은 달랐을 겁니다.”
스퀘일러는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에스티아가 그의 옆으로 의자를 끌고 가 앉았다.
“스퀘일러.”
에스티아가 그의 주름진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나한테 많이 무심했죠?”
“……사실 사람들도 암암리에 알고 있었습니다. 공작께서 부인을 방치하시고, 아가씨를…… 학대하셨다고.”
“……!”
조용히 그의 말을 듣던 에스티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학대? 학대라고?’
에스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단순히 딸을 상품으로 생각하는 아버지인 줄 알았더니 그 이상이었다.
에스티아는 이를 으득 갈았다. 빙의한 직후부터 로셸 글레멘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해 왔다.
오늘로써 어떻게 대항할지 확실해진 거 같다. 맞서야 할 거 같다. 강경하게.
“아가씨.”
스퀘일러가 여전히 슬픈 눈을 한 채 에스티아를 불렀다.
“지난번에 각하가 저택을 비우셨다고 하셨죠.”
“네.”
“그러면 조심하십시오. 돌아와서 아가씨가 상단 일을 하신다는 걸 아신다면 어떤 조치를 취하실지 모릅니다.”
로셸 글레멘드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 * *
마차에 몸을 실은 에스티아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차마 아까는 그에게 그녀가 무슨 학대를 당했는지 물어볼 수 없었다. 애초에 당사자가 제삼자에게 묻는다는 게 어불성설이니까.
에스티아는 다리를 올려 두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얼마나 지독히 외로웠을지,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공감’할 수 있었다. 그녀가 전생에서 느꼈던 외로움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
에스티아는 고개를 팍 들었다. 이대로 기죽어 있을 수 없었다. 황제 레이븐과 메르헨, 여기서 더 나아가 에버하르트까지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즉 남주와 여주, 서브 남주까지 모두 포섭할 생각이었다.
에스티아는 다짐하듯 숨을 훅 내뱉었다.
마차는 어느새 예쁘게 모델링된 카페 앞에 멈추어 섰다. 간판에는 고풍스러운 필체로 ‘로지’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로지 카페는 귀족 영애들이 많이 방문하는 카페답게 하얀색과 핑크색이 적절하게 섞인 디자인을 갖고 있었다.
‘와, 예쁘다.’
에스티아는 속으로 내심 감탄했다.
정문으로 다가가자 안의 직원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에스티아는 가볍게 목례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다른 직원이 부드러운 동작으로 다가와 마부로부터 우산을 건네받았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셰린포드 아가씨께서 계시는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에스티아는 직원을 따라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카페 안에는 좌석마다 고급스러운 칸막이가 쳐져 있었다. 귀부인과 영애들이 애용할 만큼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흘렀다.
에스티아는 주변을 곰곰이 둘러보았다. 메리에게 카페 로지가 어떤 곳이냐고 물어봤다가 미친 사람 취급받게 만든 곳이기도 했다. 알고 보니 에스티아가 애용하던 곳이었다.
메르헨이 일부러 에스티아가 좋아하는 장소로 고른 듯했다. 에스티아는 그런 메르헨의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왠지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부정할 수가 없었다. 만약 진짜 에스티아라면,
메르헨과 이곳에서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에스티아는 곧 고개를 저었다. 순수하게 배려해서 한 행동을 괜히 비꼬아서 생각하는 거 같았기 때문이다.
에스티아는 미리 표정을 예열했다. 어쨌든 우리 여주인공을 만나는 자리이니까.
“이곳입니다, 아가씨. 그럼 두 분이서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직원은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에스티아는 커튼으로 된 칸막이를 옆으로 젖혔다.
“영애.”
에스티아가 보라색 긴 머리를 한 여인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뽀얀 얼굴이 서서히 옆모습을 드러냈다.
“글레멘드 영애! 어서 와요.”
메르헨이 해사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 어서 앉으세요, 영애.”
메르헨이 부산스러울 정도로 에스티아를 반겼다. 에스티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뭘 드시겠어요? 저는 홍차를 시켰는데, 영애께서는 뭘 드시겠어요?”
아직 차 종류를 잘 몰라 잠시 당황한 에스티아는 곧 노련하게 답했다.
“영애와 같은 걸로 할게요.”
“그러실래요?”
메르헨이 빙긋 웃었다. 그녀는 손짓으로 직원을 부르고는 그녀가 마시던 홍차를 주문했다.
“지금도 비가 많이 오나요?”
메르헨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물었다.
“오전보다는 많이 그쳤어요. 덕분에 오는데 그렇게 힘들지 않았고요. 아, 여기는 저 때문에 고르신 건가요?”
“예.”
메르헨이 여전히 웃은 채로 대답했다.
“영애께서 좋아하는 장소니까요.”
에스티아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알 수 없는 기시감이 그녀의 팔을 타고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