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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43화 (44/141)

43화 - 그 수많은 것 중에

에스티아는 메리에게 종종 자신에 대해 물어봤다. 옛날 일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척 물으면 메리는 ‘어휴’ 하면서도 친절하게 알려 줬다.

카페 로지도 그중 하나였다. 메리는 에스티아가 새삼 그 카페에 묻는 걸 이상하게 생각했다. 에스티아가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자주 가던 곳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말한 적이 있었는데 다소 서글픈 말이었다.

-내 인생은 잿빛인데 그곳은 장밋빛이잖아. 그곳에 가면 나도 다른 사람처럼 보통 인생을 사는 거 같거든.

메리는 그 말이 너무 슬펐다고 한다. 차라리 에스티아가 못된 사람이었으면 바라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녀가 너무 좋은 사람이어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메리의 눈엔 에스티아가 꽃이 아닌 적이 없었다. 웬트워스도, 에스티아도 자신의 눈엔 너무 아름다운 꽃이었다고.

꽃이 단순히 외면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아름답다고 해 주는 거 같아 에스티아는 메리에게 고마웠다.

그녀가 원작 속에서 본 에스티아의 삶은 사실상 미련의 연속이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계속 사랑하는 삶. 비참의 지속이고 행복의 결말 같았던 에스티아의 삶이었다.

에스티아는 생각했다. 만약 원래 에스티아가 지금 여기서 메르헨을 보았다면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사랑하는 사람한테 버림받을 때마다 오던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을 때.

‘비참하겠지.’

어쩌면 기시감은 거기에서 오는 것일까. 순수한 의도가 아니라면 에스티아로서는 자신의 ‘장소’를 잃게 되는 거니까.

“정말 좋은 곳이에요. 카페 로지에 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메르헨이 새삼 카페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에스티아는 아름다운 선으로 이루어진 메르헨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네, 저도 정말 좋아하는 곳이에요.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왔던…… 아니, 왔었거든요.”

“어머, 그랬군요.”

두 손을 맞잡은 메르헨의 눈동자가 촉촉했다.

“영애가 힘들 때 도움이 되지 못했네요.”

메르헨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에스티아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우리는 서로에게 큰 상처였으니까요.”

“그렇죠.”

메르헨이 아래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많은 생각이 드는 듯했다.

“이제 그럴 일 없어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제 사랑보다 제가 더 소중해요. 그래서 이젠 대공 전하와 사적인 연은 끊으려고 해요.”

“사적인 연이라면…….”

“저는 전하와 약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

“결혼도 마찬가지이고요.”

메르헨의 시선이 다시 에스티아에게로 향했다. 진실인지 묻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마찻길을 하루라도 빨리 복구하고 싶은 거고요. 어차피 더는 숨길 필요가 없으니 말씀드리자면, 전 대공 전하가 저희 저택에 있는 게 불편합니다.”

“영애…….”

“영애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시잖아요, 그렇죠?”

메르헨은 에스티아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긍정이었다.

“저희 둘은 같은 마음인 거예요. 영애도, 저도 대공 전하가 글레멘드 저택에 있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메르헨은 찻잔을 두 손으로 쥐었다. 하얀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사이에 에스티아의 차가 나와 그녀도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우리 셋 모두 불편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이미 마을 사람들이, 여기에 바일 저택의 사람들까지 가세하고 있지만 여전히 힘든 상황이고요. 그래서 영애에게 도움을 청한 거예요.”

메르헨의 눈빛이 슬픔으로 일렁였다.

“……어쩌면 그 요청이 영애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니, 오히려 기뻤습니다.”

그 사람을 내 인생에서 도려낼 수 있으니까.

에스티아는 뒷말을 애써 삼켜 냈다. 대신 이렇게 얘기했다.

“영애께서 절 믿어 주시는 거 같아서요.”

“글레멘드 영애…….”

메르헨이 감동받은 듯한 눈빛으로 에스티아를 쳐다보았다.

“영애.”

“네?”

그런 메르헨이 갑자기 비장한 목소리로 에스티아를 불렀다. 에스티아는 왠지 긴장되는 마음으로 메르헨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곧 예상치 못한 말이 들려왔다.

“우리 이제 서로 이름 부를래요?”

“이름이요?”

에스티아는 동그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메르헨이 이렇게 훅 다가올 줄은 몰랐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생각해 보니 오히려 반길 만한 상황이었다. 에스티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메르헨.”

“고마워요, 에스티아.”

메르헨이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에스티아는 그 미소가 햇살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당장 내일부터 사람을 보내는 게 어떨까요? 물론 영애…… 아니, 에스티아만 괜찮다면요.”

“당연히 괜찮죠. 사람들을 보내는 게 아니라 제가 직접 할 수 있다면 오늘도 가능한걸요.”

“어머, 에스티아도 참.”

메르헨이 까르르 웃었다. 에스티아는 살짝 머쓱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에스티아와 메르헨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스티아는 메르헨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는 한편 왠지 모를 피로함을 느꼈다. 마치 바로 눈앞에 태양을 두고 얘기하는 거 같은 기분이었다. 밝지만 너무 오래 보고 있으면 눈이 아픈.

결국 에스티아의 얼굴에 피곤함이 자연스럽게 스며 나왔다.

“에스티아, 많이 피곤해 보여요.”

“아, 미안해요. 요 근래 몸이 안 좋았더니.”

에스티아는 눈가를 살짝 문질렀다. 메르헨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에스티아를 보더니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머, 점점 더 비가 많이 내리네요. 이제 슬슬 갈까요?”

에스티아는 살포시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걸 본 귀족 부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에스티아는 애써 무시했다. 카페의 직원이 두 사람을 배웅했다.

“마차 바퀴는 잘 고쳐졌나요? 지난번에 바퀴가 고장 났다고 들어서요.”

현관으로 향하는 길에 에스티아가 메르헨에게 물었다.

“네, 다행히 금방 고쳤답니다. 어차피 여분의 마차가 있긴 하지만요.”

메르헨이 싱긋 웃었다. 마주 웃으려 했던 에스티아는 곧 멈칫했다.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이었지만 아까 느꼈던 기시감이 에스티아의 마음속에서 튀어나왔다.

“근데…… 궁금하긴 해요. 멀쩡하던 마차가 왜 갑자기 망가졌을까요.”

메르헨이 중얼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마부의 말로는 누가 고의로 그런 거 같다는데, 누가 그런 걸까요? 에스티아는 누가 그랬다고 생각해요?”

잠깐 침묵 사이로 빗소리가 끼어들었다. 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 메르헨의 눈동자는 순수함으로 빛나는 듯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에스티아는 자신이 느낀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냈다. 오로지 순수로 가득한 눈동자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그 깨달음은 곧 무의식에서 어떤 의문을 꺼내 들었다. 의문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메르헨은 어떻게 이 카페를 알았을까? 에스티아가 마음이 찢어질 때마다 은밀히 오던 이곳을.

에스티아의 입술이 의문을 꺼내기 위해 벌어지려던 그때, 셰린포드의 사용인으로 보이는 시종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메르헨 위로 우산을 펼쳤다.

“에스티아, 먼저 가 볼게요. 날씨가 안 좋으니 조심히 가요.”

“아…… 메르헨도요.”

에스티아는 그런 속내를 감추며 인사를 건넸다. 그 문제에 대해선 좀 더 생각을 해 봐야 할 듯싶었다.

그렇게 시종과 걸음을 옮기는 거 같던 메르헨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메르헨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아 참, 에스티아.”

“……?”

에스티아가 의아하다는 듯이 메르헨을 바라보았다. 메르헨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요즘 영애 실종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요. 모쪼록, 몸조심해요.”

메르헨은 그 말과 함께 시종과 사라졌다.

에스티아는 그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비는 여전히 많이 내리고 있었다.

* * *

나름 이곳에서 꽤 지내서 그런가. 마차 멀미는 확실히 많이 나아졌다. 물론 멀미가 날 법하면 바로 잠이 들어 버리긴 하지만. 이번에도 마차가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눈을 뜨니 어느새 저택 앞에 도착해 있었다.

에스티아는 마중 나온 시종과 함께 나란히 우산을 쓴 채로 저택으로 이어진 길을 걸어갔다. 메르헨과 얘기할 때 신경을 많이 썼는지 꽤 피곤했다. 아무래도 잠시 눈을 붙여야 할 거 같았다.

‘……응?’

그렇게 피곤한 상태로 눈을 비비던 에스티아는 현관 앞에 서 있는 누군가의 인영을 보고 시선을 들었다. 기둥에 기댄 큰 인영을 보아하니…….

‘대공?’

에스티아는 계단을 올라 기둥 옆에 섰다. 인기척을 느낀 인영이 움직였다.

“오셨습니까.”

대공이 기사단 모자를 든 채로 기둥에서 등을 뗐다.

“왜 여기에 서 계세요?”

대공의 머리는 이번에도 조금 헝클어진 채였다. 요즘은 머리를 넘긴 것보다 이런 머리를 더 자주 보는 거 같았다. 자세히 보니 왠지 기분도 착 가라앉은 거 같았다.

“방에 있으면 엇갈릴까 봐요.”

음, 그럼 오히려 땡큐 아닌가.

에스티아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대공이 흰색의 편지 봉투를 건넸다.

“폐하께서 영애에게 서신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폐하께서요?”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그가 그녀에게 했던 부탁이 있었다. 아마 그거에 대한 것이리라.

“대공 전하께 주시던가요?”

에스티아는 대공에게서 작은 편지 봉투를 받았다. 건네는 대공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아마도 그게 안전하고 빠를 거라고 생각하신 거 같습니다.”

비 소리 사이로 대공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감사합니다. 근데 이렇게 기다리시지 말고 시종이나 하녀를 통해 전해 주셔도 괜찮았을 텐데요.”

“황제 폐하의 서신을 어떻게 그렇게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아.”

씁. 에스티아는 괜히 뻘쭘해져 손목을 긁적거렸다.

“계속 여기에 계실 건가요?”

대공이 들어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 그녀를 진득하게 쳐다보자 그걸 못 견딘 에스티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예, 이것만 묻고요.”

그럼, 그렇지. 에스티아가 물어볼 거면 빨리 물어보라는 기색으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

그런데 기회를 줬는데도 대공은 선뜻 그녀에게 묻지 못했다. 평소와는 달랐다. 자세히 보니 눈치를 보는 거 같기도 했다.

‘서신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궁금한 거 아닌가? 왜 말을 안 해.’

만약 그렇게 묻는다면 프라이버시 핑계로 알려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도 안 먹히면 쓴 사람한테 직접 물어보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왜 요지부동이란 말인가?

“전하?”

결국 참다 못한 에스티아가 다시 대공을 불렀다.

“고민 중입니다. 그 수많은 것 중에 뭘 물어야 할지.”

“네?”

대공의 영문 모를 소리에 에스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를 지긋이 쳐다보던 대공이 조금씩 입술을 벌렸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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