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 원하지 않으니까요
“같이 있어도 됩니까?”
“……?”
에스티아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빡였다. 대공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언제 같이 있어도 되냐고 묻는 거지?
요즘 들어 대공이 전보다 알 수 없는 말을 많이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째 점점 더 심해지는 거 같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진의를 알 수가 없었다.
대공은 그런 에스티아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먼저 말을 꺼냈다.
“폐하는 무척 신중한 분이십니다. 웬만한 사안으로는 궁 밖으로 움직이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시켜 서신을 보내실 때는 대개 딱 한 가지 경우일 때입니다.”
“무슨 경우인데요?”
“잠행을 나갈 때죠.”
안 그래도 크던 에스티아의 눈이 더 커졌다. 사극 속에서 많이 듣던 잠행을 여기서 들을 줄은 몰랐다.
“그러니 전하의 말씀은 폐하가 저와 잠행을 나가기 위해 저한테 편지를 보내셨다는 말씀이네요?”
“그렇죠.”
대공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에스티아는 자신의 손에 들린 편지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얇은 편지지였지만 이상하게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럼 답신도 전하를 통해 전해 드리면 될까요?”
“예, 답신은 길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언제까지 드리면 될까요?”
“오늘 밤까지, 주세요.”
에스티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그 전에.”
“?”
대공이 걸음을 옮기려는 에스티아를 붙잡았다.
“아직 대답 안 하셨습니다.”
대답이라면…….
“같이 있어도 되냐는, 질문이요.”
에스티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부드러운 태도로 나오니 어색했다. 에스티아는 조금이라도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같이 있어도 되냐는 말씀은, 폐하와 제가 잠행을 할 때 함께 있어도 괜찮겠냐는 말씀이신가요?”
“……예.”
평소와는 달리 자신이 없는 목소리였다. 에스티아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오스카가 찾아왔던 날에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뻔뻔하더니.
“왜요?”
“예?”
그래서 에스티아는 곱게 넘어가기 싫었다. 마침 지금 이야기의 주도권은 대공이 아닌 그녀가 가지고 있으니 놓치기 아까운 기회였다. 에스티아는 다시 한번 물었다.
“왜요? 폐하께서 저와 잠행을 하시는 자리에, 왜 대공 전하가 있어야 하나요? 폐하가 부탁하시던가요? 전하께서는 기사단장이시니 호위는 아닐 거고요.”
에스티아는 한풀이를 하듯 다다다 쏟아 냈다. 대공의 낯빛에도 난감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제가 못 미더우신가요? 그런 거라면 이미 폐하가 절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셨을 텐데요. 왜 동행하고 싶으신 건가요?”
대공은 당황스러운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럼요? 제가 혹시 폐하한테 사심이라도 품을까 염려가 되시는 건가요?”
“그……!”
대공은 대답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에스티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대공을 쳐다보았다.
“그거라면 염려하지 마세요. 전 꽤 공과 사 구별을 잘하거든요.”
에스티아가 싱긋 웃었다.
“아무튼 같이 있어도 되냐고 물으셨죠. 대답 들려 드릴게요.”
대공의 표정이 긴장하듯 딱딱하게 굳었다. 에스티아는 숨을 훅 내뱉고 말했다.
“싫습니다.”
“…….”
에스티아가 상큼한 톤으로 대답했다.
“‘공적’으로 폐하와 단둘이 의논할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싫습니다. 왜 그 자리에 대공 전하가 계셔야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어차피 이유도 제대로 모르시는 듯하니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에스티아의 목소리는 잔망스럽다 할 정도로 밝았다. 대공은 착잡한 심정으로 잠자코 그 목소리를 들었다. 이윽고 에스티아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현관으로 들어갔다.
원래 같으면 어떤 억지를 써서라도 앞에 붙잡아 두었을 것이다. 평소처럼 비꼬고 시비를 걸어서라도 옆에 있고 싶다고 얘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 빌어먹을 후작의 말을 믿어야 한다는걸.
대공은 그렇게 빗소리를 들으며 한참 동안 현관 앞에 서 있었다.
* * *
에스티아는 그날 밤이 되자마자 사용인을 통해 대공에게 답신을 전달했다. 직접 전달하고 싶지도 않았고 어차피 같은 저택에서 믿을 만한 사용인을 통해 보냈으니 괜찮겠다 싶었다. 다행히 대공은 아무 말이 없었다.
오히려 꽤나 신속하게 전달했는지 다음 날 오전이 되자마자 다시 얇은 편지지를 들고 에스티아의 방문을 노크했다.
한창 약초 연구에 골몰하던 에스티아는 하녀가 아닌 대공이 바로 노크를 하자 짜증이 났다. 이제 좀 사람이 변하나 했더니 역시 날이 바뀌자마자 원래 뻔뻔하던 그 대공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에스티아는 한숨을 팍 쉬며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문을 열었다.
“네,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신가요.”
어차피 본인도 예의가 아닌 걸 알 테니 굳이 체면 차릴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공도 같은 생각인지 어제처럼 조용히 에스티아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내용은 모릅니다만, 왠지 오늘인 거 같군요.”
“아, 역시나 빠른 시일 내로 잡으셨군요.”
“사안이 사안이니까요.”
대공은 웬일로 비꼬는 기색 없이 담담한 음색으로 말했다. 에스티아는 바로 편지를 뜯어 편지지를 펼쳐 보았다.
‘글레멘드 영애에게.
빠른 답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번 편지에서 언제든 편한 날로 잡으라고 하셨죠.
영애의 배려에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오전 11시까지 글레멘드 저택으로 가겠습니다.
단출한 마차로 갈 테니 너무 놀라지 말아 주세요.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추신: 아, 그러고 보니 대공께서 동행하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시더군요. 너무 간절히 말하시기에 한 백 보 뒤에서 걷는 걸로 협의 보았습니다. 그럼 이만.’
꾸깃.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종이를 구겼다. 그러고는 대공을 찌릿 하고 째려보았다. 본인도 이상하다는 건 아는지 슬쩍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둘 중 하나네요. 제가 못 미더우시거나 아니면…… 저한테 미련 있으시거나.”
“하.”
그 말에 대공이 울컥한 듯 그녀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굳이 이유를 물으실 만큼 제 마음이 궁금하신가요?”
“아뇨, 진즉 안 궁금했습니다. 여기, 백 보 뒤에서 걷는 걸로 합의 보셨다고 하셨으니, 제대로 지켜 주셨으면 좋겠네요.”
에스티아가 싱긋 웃었다. 대공은 언뜻 보면 여유로워 보였지만 지금 이 상황이 퍽 마음에 안 드는 듯 아래턱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나저나 저택 안이 분주하던데 무슨 일 있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에스티아는 오늘 마차길 복구 현장에 사용인들을 보내기로 한 것을 떠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대공에게 당신을 돌려보내려고 메르헨과 힘을 합쳤다고 하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메르헨이 깜짝 선물로 해 주고 싶다고 말한 탓이었다.
“저희 저택의 일입니다.”
에스티아는 덤덤한 척 표정을 관리했다.
“전하께서는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렇군요……. 힘쓰는 사용인들은 죄다 차출된 거 같던데.”
어구, 눈썰미도 좋아라.
“네, 시킬 일이 있어서요.”
에스티아는 일부러 딱 그렇게만 말했다. 말을 많이 할수록 덜미만 잡힐 뿐이었다.
확실히 딱히 비꼴 만한 부분이 없으니 대공도 그에 대해서는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얘기했다.
“그렇습니까. 아침 아직 안 드셨죠? 같이 드시죠.”
“아뇨, 괜…….”
에스티아가 거절하기 위해 말을 꺼냈지만 대공은 듣지도 않고 뒤를 돌아 걸어가 버렸다.
에스티아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렇다고 차마 슬리퍼를 저 뒤통수에 날려 버릴 순 없어서 애써 참았다.
* * *
대공과 어색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에스티아와 대공은 곧바로 마차를 타고 어딘가로 출발했다. 에스티아가 대공에게 어디로 가냐고 물었지만 그는 그저 황제가 좋아하는 장소가 있다고만 대답했다.
에스티아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무렴 황제를 만나러 가는데 이상한 장소를 갈까 싶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니 문득 며칠 전 오스카 후작이 꽃을 들고 찾아왔던 것, 그리고 메르헨과 로지 카페에서 만났던 일이 생각났다.
에스티아는 힐끔 대공을 바라보았다. 대공은 시선을 아래에 내리깐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슨 생각을 저렇게 할까 궁금해하던 에스티아는 역시 그날의 일을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메르헨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 봤자 손해일 테니.
“전하.”
대공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고요한 눈이었다. 에스티아는 한 번 숨을 훅 내뱉었다.
“그날, 오스카 후작님이 찾아왔던 날.”
움찔. 대공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때…… 아직 많이 아팠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근데 사용인들에게 전해 듣기로는 문을 부수셨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 있었나요?”
대공은 대답하지 못했다. 급기야 시선을 피하기까지 했다. 이에 당황한 에스티아는 바로 따지고 싶었지만 일단 그의 답을 기다렸다.
머릿속으로 해야 할 말을 고르고 있는 듯했다. 하얀 미간이 고민을 하는 듯 찌푸려졌기 때문이다.
“마력을 느꼈습니다.”
잠시 창밖을 보던 에스티아의 눈동자가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대공 쪽으로 움직였다.
“마력이요.”
“네, 아주 강력한 마력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스카 후작을 응접실에서 본 뒤로 급격하게 몸이 안 좋아졌었던 거 같다.
“오죽하면 별관에 있던 남작까지 느끼고 달려올 정도였어요.”
그의 말에 에스티아는 웬트워스가 꽤 많은 양의 마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응접실을 노크해 보니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문은 잠겨 있었죠. 영애께서는…… 저 때문에 몸이 안 좋으신 상태였으니,”
“…….”
“……위험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쉈고요.”
대공의 목소리는 언뜻 들으면 떨리는 거 같기도 했다.
“후작께서는 어쩌고 있었나요?”
“꽤 당황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뭐라고 책망하니 마력이 잘 조절이 안 되었다고 하더군요. 요즘 들어 제어가 잘 안 된다고. 하지만 그 사정을 떠나서, 영애께서는 후작에게 제대로 잘잘못을 따져야 할 겁니다. 물론 사람을 통해서.”
“그건.”
에스티아의 눈빛이 냉정한 기색을 띠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영애.”
대공이 이를 으득 갈았다.
“아무리 실수였다고 해도 제대로 문책해야 합니다. 영애의 몸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었다고요.”
“그래서요?”
대공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에스티아는 태연하게 다시 물었다.
“제가 아픈 게 전하와 무슨 상관이 있죠? 약혼자도, 친구도 아닌데.”
에스티아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제 걱정은 하지 말아 주세요. 원하지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