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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45화 (46/141)

45화 - 나머지

에스티아는 대공의 눈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옅은 물감을 여러 번 덧댄 거 같다고. 그만큼 옅은 녹색 눈동자가 짙어 보였으니까.

문득 그의 눈에는 자신의 눈이 어떻게 보일까 궁금했다.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을지, 아니면 누가 감히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해 보일지.

에스티아는 후자로 보이길 간절히 바랐다. 그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다면 당연히 혼란스러운 자신의 마음 또한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와 그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마음을.

“그럼.”

대공이 여전히 에스티아를 짙게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약혼자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면 걱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약혼자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면 걱정을 왜 하나요?”

에스티아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제가 말했죠. 오해하게 하지 마시라고. 이런 걱정은 전하의 피앙세에게나 하세요.”

“에스…….”

“이름도.”

에스티아가 대공의 말을 잘랐다. 대공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부르지 마세요. 매번 조금이라도 배려해 주실 때면 오해하지 말라고 하시더니 자꾸 선을 넘으시네요.”

대공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이 상황이 답답하긴 한지 와이셔츠 맨 위 단추를 푸르기까지 했다.

“이렇게 되면 증명은 제가 아니라 전하께서 하셔야 될 거 같네요. 아, 그러면 제가 편해지긴 하겠네요.”

에스티아가 입가에 얕은 미소를 그렸다.

“저는 누군가 저를 걱정한다면, 전하가 아니라 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 받고 싶습니다.”

“뭐라고요?”

대공의 숨이 거칠어졌다. 에스티아도 점점 화가 났다. 그는 언제나 자기가 갑인 듯이 행동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그가 자신의 우위에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설령 과거에는 그랬을지라도 지금은 절대 용납 못할 수 없었다.

에스티아는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매서운 눈빛을 계속 마주했다.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그게 누구인지는 알고?”

“생기겠죠. 그게 전하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고요.”

“에스티아.”

대공이 그녀의 이름을 짓이기듯이 뱉었다. 분노가 깊이 어린 목소리였지만 에스티아는 이번에도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전하, 제 이름을…….”

“왜.”

대공이 몸을 일으키더니 에스티아 앞으로 상체를 숙였다. 넓은 마차인데도 그가 몸을 내미니 공간이 꽉 찬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해. 아직 증명이 끝난 것도 아닌데.”

“안 끝났다고요?”

“그래, 내가 못 믿겠다고.”

에스티아는 대공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믿을 수 없다면 그가 내뱉었던 말을 해낼 수 있음을 간단하게나마 증명하는 수밖에.

“전에 물으셨죠?”

“뭐를요.”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입 맞출 수 있냐고.”

“……!”

대공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간접적으로나마 증명할 수 있는데, 보여 드릴게요.”

에스티아는 그대로 대공의 셔츠 카라를 잡아당겼다. 세게 당기지도 않았는데 대공의 큰 상체가 바로 그녀를 향해 기울었다. 곧 두 입술이 진하게 맞물렸다.

대공의 눈빛이 충격으로 굳어지면서 요동치는 게 보였다.

에스티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공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제대로 보여 주고 싶었다. 감히 당신 따위가 나를 점유할 수 없다고. 대공이 그녀에게 했던 방식 그대로 대갚음해 주고 싶었다.

에스티아는 일부러 그를 깊게 자극하지 않고 그의 입술 위로 조금씩 움직였다. 윗입술을 살짝 건드리기도 하고 아랫입술을 밑에서부터 쓸어 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그녀의 입술은 붉은 두 선 위로 간질거리며 맴돌았다.

시험하고자 와 닿은 그녀의 농락은 초조한 누군가의 마음을 갖고 놀기 충분했다. 한 손은 마차의 벽을 짚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옆을 짚던 대공의 두 손이 조금씩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술 아래에서 농락당하던 대공은 결국 속으로 백기를 들었다. 이 움직임 아래에 있는데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이성의 끈이 툭 끊겼다.

대공의 오른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곧 왼손이 그녀의 뒷덜미를 잡아당기며 두 입술이 더 깊게 맞물렸다. 에스티아는 잠시나마 대공이 굴복하기를 바랐지만 막상 진짜 뜻대로 되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대공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한껏 머금으면서 에스티아는 점점 숨이 차기 시작했다. 대공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는 그녀의 혀를 휘감고 더 깊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하.”

대공의 달뜬 숨이 에스티아의 입술을 자극하고, 귀를 자극했다. 에스티아는 지고 싶지 않아 자신도 그의 목덜미를 잡고 당겼지만 대공은 이를 빌미 삼아 더욱 그녀를 잡아당겼다.

이내 그가 참지 못하고 그녀의 허리를 받쳐 자신의 다리 위로 올렸다. 순간 깜짝 놀란 에스티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대공의 눈과 마주쳤다.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고 타오르는 눈빛이었다.

에스티아는 본능적으로 대공의 어깨를 밀었지만 대공의 돌 같은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대공은 허리를 두른 팔에 더 힘을 줄 뿐이었다.

그만큼 대공은 정신이 아찔해 미칠 지경이었다. 아무리 그녀의 입술을 머금고 안을 헤집어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윗입술을 물고 아랫입술을 핥을수록 그는 더욱더 깊이 들어가고 싶었다.

“아…….”

한참 동안 그녀의 입술을 탐닉하던 대공이 에스티아의 목을 타고 내려왔다. 에스티아는 그제야 숨을 토해 냈다. 코로 숨 쉬어도 벅찰 만큼 진한 입맞춤이었다.

“잠깐만!”

대공의 입술이 더 아래로 내려오려고 하자 에스티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렸다.

대공의 숨결이 그녀의 목에 한참을 머물렀다. 이성을 찾은 듯 더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숨결에는 아쉬움이 듬뿍 남아 있었다.

대공이 고개를 들었다. 에스티아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려고 했지만 아직도 숨이 벅찼다. 에스티아는 한동안 대공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숨을 골랐다. 대공은 아직도 이 상황이 현실 같지가 않은지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이제…….”

에스티아가 여전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

“미련이 남은 건 누구죠?”

떨리는 대공의 눈빛과는 다르게 에스티아의 눈빛에는 여유가 넘쳤다. 생각보다 그가 빨리 넘어와서 잠시 당황스럽긴 했지만 결과는 꽤 만족스러웠다. 에스티아는 손을 들어 그의 턱 아래에 갖다 댔다. 곧 그의 고개가 그녀의 손길을 따라 위로 향했다.

에스티아는 픽 하고 웃으며 대공을 내려다보았다.

“나머지는 당신의 피앙세랑 하세요.”

“……당신.”

대공의 목소리에 분노가 넘실거렸다.

“이걸로 끝났다고 착각하지 마.”

“당신이야말로 억지 부리지 마.”

에스티아가 그를 노려보며 바로 맞받아쳤다.

“그래도 좋긴 하네요. 나중에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면 얼마나 설렐까.”

대공의 눈이 다시 초점을 잃기 시작했다. 에스티아는 빙긋 웃었다.

“자, 이래도 못 믿겠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걸?”

대공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더니 에스티아를 번쩍 안아 들어 의자에 눕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에스티아가 당황하는 것도 잠시, 가라앉은 대공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못 믿어. 못 믿는다고. 그러니까 계속 증명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나한테 설레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라고.”

대공의 숨결이 에스티아 얼굴에 가까이 닿았다.

에스티아는 지금만큼은 자신이 이겼다는 걸 깨달았다.

에스티아는 눈을 감았다. 그가 마음껏 무너질 수 있도록.

곧 대공의 입술이 방금 전처럼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 * *

마차가 한적한 길로 접어들었다. 방금과는 달리 에스티아는 대공으로부터 멀찍이 앉아 있었다. 대공 쪽으로는 아예 눈길도 주지 않았다. 반면에 옆얼굴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마차는 그 이후로도 더 깊이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파란 지붕을 한 작은 카페 앞에 멈추었다. 곧 제복을 갖춰 입은 기사가 문을 열었다. 그는 한 손으로 우산을 든 채로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대공 전하, 에스티아 영애.”

대공이 기사의 인사를 받으며 내렸다. 에스티아는 혹시라도 대공이 또 같이 우산을 쓰자고 할까 봐 바로 다른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았다. 대공이 그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폐하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기사는 그 말을 끝으로 묵묵히 에스티아를 인도했다. 대공과 에스티아는 낡은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이 카페는 황제가 마련해 놓은 비밀 장소였다. 베이지색 벽이 안을 둘러싸고 있었고, 나무 테이블 위로 하얀 실로 짠 컵 받침이 서로를 마주 본 채로 두 개씩 놓여 있었다.

에스티아는 눈을 반짝이며 안을 둘러보았다. 대공의 눈에도 그녀의 빛나는 눈빛이 잘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

그때 창가 쪽에서 미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스티아가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와.’

이번에는 입술을 떡 벌리는 건 참았지만 계속 쳐다보는 건 멈출 수 없었다.

궁에서와는 달리 이마 위로 머리를 내려 황제는 전에 봤을 때보다 더 편안한 인상이었다. 에스티아는 해사하게 웃으며 황제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국의 하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세요, 글레멘드 영애. 대공도 어서 앉으세요.”

밝게 웃으며 자리에 앉는 에스티아와는 달리 대공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와중에 인사를 하긴 했다.

“먼 길 오시느라 두 분 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황제의 금색 눈동자가 에스티아와 대공을 번갈아 보았다.

“두 분…… 오시면서 무슨 일 있었습니까? 분위기가 왠지 싸늘한데요.”

황제가 기민하게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눈치챘다. 에스티아는 살짝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폐하. 대공 전하와 제가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예, 그렇습니까…….”

황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공의 표정을 보았을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확실히 있었는데.

황제는 무척 궁금해졌지만 괜히 묻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급한 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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