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이름으로
황제가 에스티아에게 한 부탁은 이거였다. 황제로서 상단을 방문하면 거동에 너무 많은 비용이 발생하니 에스티아의 지인으로서 상단에 동행하게 해 달라는 거였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어서 에스티아는 바로 승낙했다.
“전 마법에 능숙하지 못해서 대공에게 변장을 부탁하려고 해요. 금발하고 금안은 너무 눈에 띄어서요.”
대대적으로 황가의 상징 중 하나가 금발과 금안 혹은 남색 머리와 눈동자였다. 그 상징이 마치 밤하늘의 달과 비슷하다고 하여 백성들은 애칭으로 그를 ‘달’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럼 전 오늘은 비가 별로 오지 않으니 잠시 바깥에서 산책을 하다 오겠습니다.”
마법으로 변장하는데 빤히 보고 있는 것도 그럴 거 같아 에스티아가 먼저 제안했다. 황제는 그 제안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밝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너무 빛나서 에스티아가 넋을 놓을 정도였다.
“역시 배려 깊으십니다.”
“아닙니다. 워낙 움직이는 걸 좋아해서요.”
“……? 영애가요?”
대공이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에스티아는 찌릿 대공을 째려보았다. 상관하지 말라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대공은 아랑곳하지 않고 비릿하게 웃었다.
“하긴, 걸핏하면 쓰러지시던 분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걸 꽤 좋아하긴 하셨죠.”
“그걸 다 기억하고 계시네요. 기억력도 좋으셔라.”
“이상하게 가는 곳마다 마주쳤으니까요. 어떻게 알았는지.”
하. 에스티아는 자칫하면 눈앞에 황제가 있다는 것도 있고 벌떡 일어설 뻔했다. 진짜 대공만 아니면 한 대 치는 건데.
“전 그럼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끝나시면 불러 주세요.”
더 있다가는 빙의 전처럼 대공의 멱살이라도 잡을 거 같아서 에스티아는 빠른 걸음으로 카페를 나섰다. 그녀가 나가자 곧 카페 안에 정적이 맴돌았다.
“왜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무엇을요?”
황제가 모르는 척 다리를 꼬았다. 에스티아가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던 대공이 다시 황제를 향해 몸을 틀었다.
“마법에 능숙하지 않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신 겁니까.”
“겸손은 황제의 미덕이죠.”
황제가 눈을 찡긋했다. 대공은 그걸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가 여유로운 몸짓으로 찻잔을 들었다.
“사실 그게 아니라 대공과 단둘이서 잠시 얘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변장을 안 하고 나왔죠. 대공한테 부탁하려고.”
“그렇군요. 무슨 얘기가 하고 싶으십니까?”
뭘 물을지 눈치챈 대공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황제는 잠시 찻잔 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꼭 특별한 이야기를 해야 하나 그냥 얘기나 하자고 그러는 거지. 보니까 같이 올 때도 글레멘드 양과 뭔 일이 있긴 있었나 본데.”
레이븐이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에버하르트의 표정이 난처한 기색을 띠었다.
“아니라니까, 요.”
에버하르트가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레이븐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뭐, 한 가지는 확실하네. 네가 영애한테 질질 끌려다니고 있는 거.”
“뭐라고요!?”
에버하르트가 펄쩍 튀어 올랐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 평생 그럴 일 없으니까요.”
“평생 그럴 일 없는 게 아니라 이미 그러고 있는데?”
“아, 정말…….”
속에서 울컥 뭔가가 치솟아 올랐다. 아무리 허울 없는 사이라 해도 황제는 황제여서 그는 애써 울컥한 마음을 억눌렀다.
“난 상관없어. 네가 용서하기로 했다면 그런 거지. 난 언제나 네 편이니까.”
“…….”
“그래도, 이건 너무 끌려다닌다.”
“폐하!”
자신의 상황을 들킨 에버하르트의 얼굴이 벌게졌다. 레이븐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아무튼 모르는 척해 주십시오.”
결국 에버하르트가 백기를 들고 나지막이 말했다. 아무리 막역한 사이라고는 하나 그녀를 구질구질하게 쫓아다니는 걸 들켜서 민망했다.
“아, 거참 그러면 전처럼 ‘레이’라고 불러 주지.”
“그건 나중에 황후 폐하가 생기시면 해 달라고 하십시오.”
괜히 민망해진 에버하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레이븐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그래. 나중에 아내가 생기면 부탁해 보지. 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부모님인 선 황제와 황후는 지극히 사무적인 사이였다. 오랜 시간 아이가 생기지 않다가 거의 마흔이 다 되어서 레이븐을 가질 만큼 건조한 관계였다. 레이븐은 자신의 부모가 한 번도 서로를 친근하게 부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나저나 요즘 몸은 어때. 요즘도 ‘증상’이 나오고 그래?”
뜨끔. 역시 그 눈치는 어디 가지 않는다. 에버하르트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아뇨.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음, 스퀘일러 상단주한테 물어봐야겠네. 요즘에는 에버하르트가 정신을 안정시켜 주는 약초를 달라고 하나 안 하나.”
레이븐이 노래를 하듯 그를 살살 약 올렸다.
“레이!”
결국 그의 계략에 에버하르트는 넘어갔다. 요즘 다들 왜 이렇게 사람 놀리는 데 능수능란해지는지 모를 일이다.
“……하. 이제 그만 놀리십시오. 명하신 대로 변장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왕이면 갈색으로 부탁해.”
그녀가 좋아하는 색이니까.
레이븐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 *
흰색 우산을 쓴 에스티아는 주변 산책길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자연에 집중하려고 애썼지만 대공과 황제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지 궁금했다. 아무래도 남주와 서브 남주이니 여주인공에 대해 얘기하고 있겠지?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어차피 이 세상에서는 사랑은 에스티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지들끼리 알아서 지지고 볶고 하겠지.
에스티아는 우산을 살짝 뒤로 젖혔다. 하늘은 짙은 구름에 갇혀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않았다. 문득 원래 자신이 살던 세상도 같은 하늘일지 궁금해졌다. 그곳의 그녀가 어떻게 되었을지도.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그때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스티아는 그 목소리에 아무 생각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황제의 머리색과 눈동자는 완전히 다른 색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태양이 스며든 거 같던 금발과 금안은 갈색 머리와 눈동자로 바뀌었다. 마법이 이런 건가 싶어 에스티아는 속으로 감탄했다.
“잘 어울리세요, 폐하.”
진짜 이 사람은 뭔 색이든 다 어울리는 사람인가 보다.
에스티아는 마음 같아서는 손뼉이라도 쳐 주고 싶었다.
“과찬이십니다, 영애. 근데…….”
황제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바깥에서는 편하게 불렀으면 합니다. 들킬 수도 있으니.”
“아…… 그렇죠.”
하기야 상단에서 황제라고 부를 수도 없으니.
“게다가 여기서 상단까지는 가까워서 걸어가고 싶거든요. 오늘 비도 별로 안 오고.”
오호. 꽤 순박한 황제인가 보다. 역시 우리 서브 남주.
에스티아는 괜히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았다.
“그럼 제가 뭐라고 불러 드리면 될까요?”
“음.”
황제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고민에 빠졌다. 그러더니 엄지와 검지를 딱 부딪치며 말했다.
“‘레이’라고 불러 주세요. 역시 그게 좋네요.”
“네?”
우산을 쥔 에스티아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자신이 공작 영애라고 할지라도 황제를 애칭으로 부르다니.
황제는 에스티아가 머뭇거리는 걸 눈치채더니 빙긋 웃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레이’라는 이름 자체는 흔한 편이니까요. 그 누가 황제의 이름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렇긴 한데…….”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리던 에스티아의 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정말 백 보인지는 모르겠으나 대공은 약속했던 것처럼 그들로부터 한참 뒤에 서 있었다. 전처럼 막 노려보거나 하진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생각이 많아 보이는 눈이었다.
에스티아는 순간 대공을 놀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그가 들리게끔 큰 소리로 말했다.
“네, 그러면 밖에 있을 동안에는 편하게 부를게요, 레이.”
황제의 눈에 의아한 빛이 감돌았다. 이렇게 빨리 부를지는 몰랐다는 눈치였다.
“그래요, 에스티아.”
하지만 곧 황제는 상황에 적응하며 에스티아를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저와 우산을 같이 쓰시겠습니까? 영애…… 아니, 에스티아만 불편하지 않다면요.”
“네, 괜찮아요.”
자신의 운명을 바꿀 이 중에는 황제 레이븐도 있었다. 그와 친하게 지내 봤자 나쁠 게 없었다. 에스티아는 자신의 우산을 접었다.
“그럼.”
레이븐이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에스티아의 옆에 섰다.
서브 여주와 서브 남주의 사이좋은 모습이라니.
소설에서 이런 장면을 봤더라면 무슨 음모인가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몰라도,
그녀는 전혀 음모를 꾸밀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