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47화 (48/141)

47화 - 바로잡기

황제의 걸음은 느리진 않았지만 여유로웠다. 대공의 걸음이 보폭이 크고 빠르다면, 황제는 보폭이 좁지만 빠르진 않았다. 지키는 자와 지킴을 받는 자의 차이인가 싶었다.

문득 메르헨이 왜 대공을 사랑하게 되었는지가 생각났다. 소설 속 묘사에 따르면 다정하면서도 강인한 모습, 세심하면서도 기사단장으로서의 책임감 있는 면모에 반했다고 나와 있다. 물론 그 다정함도 여주 한정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반면에 황제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로, 만인에게 두루두루 다정한 인물이었다. 서브 남주다운 성격이었다.

사실 내 애인은 나한테만 자상했으면 하는 게 여자의 심리인 것은 맞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신분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레이븐에게 더 정이 갔다. 이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 만큼.

그러니 지금은 어떻게 보면 ‘성덕’이 된 기분이었다.

“비가 닿지는 않습니까?”

황제가 그녀를 향해 다정히 물어왔다. 에스티아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 다행히 오늘은 많이 내리지 않네요. 물론, 산책하기 좋은 길은 아니지만.”

에스티아는 더러워진 레이븐의 바짓단을 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진흙이 엉겨 붙어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영애는요?”

“비가 오는 날씨에 약초를 캐러 다닌 적도 있는데요. 저는 레이가 괜찮으면 상관없어요.”

황제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이렇게 이름을 부르니 정말 친구가 된 거 같네요. 종종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폐하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

에스티아와 레이븐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런데 문득 레이븐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대공은 정말 기사긴 기사네요. 백 보 뒤에서 따라오라고 진짜 그렇게 하다니.”

그 말에 에스티아도 살짝 고개를 돌렸다가 혹시나 눈이 마주칠까 봐 바로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 거리라면 대공에 대해 이야기를 해도 모르겠는걸요.”

“그러고 보니 두 분은 오랜 시간 동안 친분을 쌓아 오셨죠?”

문득 에스티아의 머릿속에 두 사람의 관계가 떠올라 그에게 물었다.

로맨스 소설의 흔한 설정이었다. 군신 관계인 두 사람이 같은 여자를 사랑한다는. 원작에서는 자세히 묘사하진 않았지만 대공과 황제는 어렸을 때부터 애칭을 부를 만큼 친밀한 관계였다. 황제가 메르헨에게 다가가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원작에서도 황제 레이븐이 대공을 귀하게 여긴다는 묘사 정도는 나와 있었다.

소중한 신하의 애인, 두 사람을 뒤에서 묵묵히 응원하는 서브 남주.

에스티아와는 다른 행보를 걸은 서브 남주이기도 했다.

“그랬죠. 제가 6살 때였고, 대공이 5살 때였나. 그때는 볼살이 오동통해서 참 귀여웠는데. 그게 벌써 19년 전이네요.”

“우와, 그 정도면 거의 가족이네요.”

에스티아가 새삼 감탄하며 말했다. 레이븐의 눈이 추억에 잠긴 듯 더없이 부드러워졌다.

“가족이죠. 아니, 어쩌면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입니다. 선 황제 폐하나 황후 폐하도 절 애칭으로 부르진 않았거든요. 오직 에버…… 아니, 대공만 그렇게 불렀죠.”

으음, 이래서 에버하르트와 메르헨의 사이를 지지해 준 걸까? 자신의 마음은 썩어 가게 놔두면서?

“영애도, 그를 애칭으로 부르지 않았습니까?”

내가?

에스티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에스티아는 생소한 정보라 그런 표정을 지은 건데, 황제는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두 분이서 다정히 서로를 부르는 걸 아직도 기억하는걸요. 도저히 제가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조용히 뒤로 돌아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죠.”

세상에.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좀 끼어들어 주시지 그랬어요.’

에스티아는 레이븐 몰래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문득 그라면 에스티아와 대공의 사이가 왜 틀어졌는지 알 거 같았다.

매번 그에게 시비가 걸리는 게 짜증이 났던 에스티아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저…… 레이.”

“예.”

레이븐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에스티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제가 대공 전하와 멀어지게 된 계기도 알고 계세요?”

“…….”

레이븐의 눈빛이 사뭇 어두워졌다. 알고 있구나. 에스티아는 바로 그 사실을 눈치챘다.

“그럼 아시겠네요. 제가 큰 실수를 했다는걸.”

에스티아는 의도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레이븐이 걸려들 수 있도록. 레이븐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묵묵히 우산만 고쳐 쓸 뿐이었다.

“저는 그저 내 기사단장을 걱정할 뿐입니다. 친구이자, 가족이니까.”

조용히 다시 말을 꺼낸 레이븐은 확실히 소설 묘사대로 신중한 인물이었다. 쉽게 미끼에 걸려들지 않았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한 가지 사실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황제가 부정을 하진 않았다고.

문제는 에스티아가 대공에게 어떤 실수를 했느냐는 것이었다.

그걸 알면 조금 더 대공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을 거 같은데. 에스티아가 속으로 쓴맛을 다셨다.

“그래도 그건 압니다.”

“……?”

역시 알아내기는 틀렸다고 생각한 에스티아의 머리 위로 왠지 모르게 슬픈 음성이 떨어졌다.

“두 분께서 참 서로를 많이 아끼셨다는걸.”

에스티아는 걸음을 멈추었다. 레이븐도 그녀를 따라 멈춰 섰다.

에스티아는 이런 순간이 너무 싫었다. 자꾸 원래 에스티아의 마음이 느껴지는 거 같은 순간.

울컥 뭔가가 치솟고 눈물이 나올 거 같은 순간을.

* * *

대공의 눈앞에 나란히 걷는 두 남녀가 보였다. 아담한 에스티아는 레이븐의 가슴 정도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원래 남녀가 같이 걸으면 저렇게 어울리는 건가. 대공은 왠지 시원한 물을 들이켜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두 사람을 떼어놓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은 대공작이기도 했지만 기사이기도 했기 때문에 뱉은 말은 지켜야 했다. 대공은 황제가 명한 대로 백 보 뒤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걸었다.

에스티아는 참 많이 웃었다. 언제부터 저 미소를 이렇게 멀리서만 볼 수 있었나, 씁쓸해졌지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정말 그녀가 마음속의 큰 짐을 내려놓은 거 같아서.

하지만 동시에 대공은 그 짐이 자신 같아서 불안해졌다. 그녀가 다시는 그라는 짐을 짊어질 거 같지 않아서.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메르헨과 친하게 지내고 레이븐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게 전부 자신을 떠나려는 방법의 일환이라는걸. 자신이 했던 말이 다 빌어먹을 억지라는 것도.

‘그러니 끝까지, 당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해야 해.’

당신이 과거처럼 다른 여자를 질투해서 나한테 패악을 부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아직은 믿을 수 없다고.

“……레이.”

그때 대공의 귀가 바짝 섰다. 에스티아가 레이븐을 친근하게 부르는 소리였다.

허, 잘 못 부를 것처럼 그러더니. 아주 사교성이 뛰어나다.

대공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잇새로 짙은 감정이 배어 나왔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감정이 무척 유치하다는 것을. 그렇지만 저 입술에 다른 사람의 애칭을 담았다는 게 그의 마음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하아. 그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그 에팅인가 뭐시기도 진짜 이름이 아니라 애칭이던데. 원래 이름이 에티안이던가.

대공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루하루 속이 바짝 타들어 가는데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바로잡을 수 있을까.’

불안감이 마음속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후작이 생각났다.

대공은 고개를 저었다. 애써 기분 나쁜 얼굴을 머릿속에서 몰아냈다. 대신 좋은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러자 굴욕적이게도 아까 마차 안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대놓고 한 도발에 너무 쉽게 넘어갔었다. 그런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벌써 스스로 합리화를 시작했다.

도저히 그 입술을 눈앞에 두고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고. 더군다나 그 입술이 먼저 자신의 입술에 닿았다면.

아마 한동안 잊을 수 없을 거 같다. 붉은 입술, 청색 눈동자, 몸에 와 닿았던 따뜻한 체온. 어쩌면 당분간은 힘든 일이 있어도 그 기억 덕분에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에버!

앳된 목소리가 그의 기억 속에서 울렸다. 동시에 현재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레이.”

대공은 둘 중 하나를 하고 싶었다. 아예 자리를 떠 버리거나 둘을 떨어트려 놓거나.

그런데 그는 둘 중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불안하니 자리를 뜰 수 없었고, 떨어트려 놓자니 깊은 과거가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그래서 한동안 끓어오르는 속을 식히며 묵묵히 그들을 따라 걸었다.

에스티아가 걸음을 멈출 때까지.

* * *

다행히 에스티아는 금방 감정을 수습하고 레이븐과 같이 걷기 시작했다. 다만 방금처럼 대공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들을 따라 걸음을 멈췄던 대공은 그들을 따라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에스티아는 새삼 저렇게 우직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잘 비꼬는지 신기했다.

나란히 걷다 보니 어느새 가게 앞에 도착했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에팅이 버선발로 나와 그들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응?”

환하게 미소 짓던 에팅이 에스티아의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며 우뚝 멈춰 섰다.

“아, 인사해, 에팅. 이분은 얼마 전에 약초 공부하면서 알게 된 박사님이야. 몬터레이 국립 학교에서 근무하고 계신 레이 박사님이고. 레이, 이 친구는 상단에서 일하는 에팅이라고 해요.”

에스티아는 레이븐과 미리 맞춰 놓은 대사를 읊었다. 레이븐이 가볍게 목례를 했다.

“편하게 레이라고 불러 주세요.”

“네…….”

에팅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귀족은 아니어도 박사라고 하니 불편한 듯 보였다.

“자, 그럼 날씨도 이러니 들어오…… 응? 대공 전하 아니십니까?”

둘은 인도하려던 에팅이 그들의 뒤에서 대공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하기야 그렇게 거리를 두고 걷고 있으면 이상해 보일 법도 했다. 그럴 줄 알고 에스티아는 미리 생각해 놓은 말을 꺼냈다.

“약초에 대해 논의할 게 있어서 같이 왔어. 그런데 잠시 혼자 생각할 게 있다고 하셔서.”

에스티아는 가게 안으로 들어오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에팅은 “그렇군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긴 했다. 뭔가가 잔뜩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눈치였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