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 사랑하지 않습니다 (1)
에팅은 귀족들과 별로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눈앞에 있는 ‘레이’라는 박사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애초에 박사 정도까지 하려면 웬만한 경제적인 수준으로는 턱도 없다. 최소한 준남작 이상일 것이다.
에팅은 어색한 손동작으로 레이와 에스티아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왜 대공은 저렇게 먼발치에서 따라오고 있는 거지? 에팅의 머릿속에는 수십 개의 물음표가 떠올랐다.
“에팅, 다른 게 아니라 박사님께 창고를 보여드리고 싶어. 상단주님 사무실에 계실까?”
멍하니 대공 쪽을 보고 있는 에팅을 향해 에스티아가 물었다. 그제야 에팅은 정신을 차렸다.
“아, 예! 사무실에 계십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응, 부탁해.”
에스티아는 레이 쪽을 한 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에팅은 일단 에스티아와 레이와 함께 사무실로 향했다.
“상단주님, 에스티아 아가씨와 손님이 오셨습니다.”
에팅이 말하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스퀘일러가 에스티아와 레이를 반겼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손님도 함께 오셨군요.”
“네, 약초를 연구하시는 레이 박사님이세요. 상단주님께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그렇군요, 들어오…… 응?”
밝게 둘은 반기던 스퀘일러가 돌연 그들의 뒤를 바라보았다. 에스티아가 그 시선을 따라가자 멀찌감치 서 있는 대공이 눈에 들어왔다.
“어라, 대공 전하도 오셨군요. 세 분이서 오신 겁니까?”
“음, 셋이 온 건 맞는데요, 백 보 뒤니까, 들어오는 건 저와 박사님뿐이겠네요.”
에스티아는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속으로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평소와 같았으면 무려 대공작에게 이렇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다. 무려 황제께서 백 보 뒤에서 따라오라고 하지 않았나. 그녀로서는 아주 당당하다 이 말이다.
“음, 당최 무슨 말인지.”
연륜으로도 이해하기 힘든지 스퀘일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기야 앞뒤 사정을 듣지도 않고 이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면 그게 이상하다. 에스티아는 뭐라고 대답할까 속으로 즐겁게 고민했다.
“에스티아.”
레이븐이 허리를 숙여 에스티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요? 대공이 영 뻘쭘할 거 같은데.”
장난기가 다분한 말투였지만 이상하게 거부하기 힘든 목소리였다. 에스티아는 뒤를 힐끔거리고는 같이 속삭였다.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그 말인즉슨, 당신은 원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제가 아니라 전하가 원하시지 않을 거 같은데요.”
에스티아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레이븐은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였다.
“글쎄, 어떨까요…….”
“……?”
“두 분은 좀 더 제대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을 거 같군요.”
“네?”
에스티아가 그 말에 질색하며 뒤로 물러났다. 레이븐이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아무튼 괜찮다는 말씀으로 알겠습니다.”
레이븐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스퀘일러와 에팅이 그 광경을 진귀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전하, 안 들어오십니까?”
레이븐이 사무실 쪽으로 고갯짓했다. 대공이 그녀를 보는 게 느껴졌지만 에스이타는 모른 척 스퀘일러와 먼저 사무실에 들어갔다.
“안 오십니까, 전하?”
대공이 여전히 미동도 없자 레이븐이 다시 그를 불렀다. 대공은 자신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에팅과 스퀘일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를 등지고 있는 여린 등에 시선이 닿았다. 그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듯한, 무심한 등이었다.
“여러분께서 불편하지 않으시다면요.”
“네?”
“예?”
에팅과 스퀘일러가 차례대로 반응했다. 자기들이 지금 뭘 들은 거냐는 표정이었다.
“……라고 하시네요, 상단주님. 괜찮습니까?”
“네…… 뭐…….”
스퀘일러가 자신의 뒤를 힐끔거렸다. 자신의 의사를 묻는 게 아니라는 걸 기민하게 눈치챈 듯했다.
“전하.”
말이 좋아 전하이지 사실상 닥치고 들어오라는 명령이라는 걸 대공은 알아차렸다. 대공은 말없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스케일러는 에팅에게 눈짓했다. 도대체 이게 뭔 일이냐는 눈빛이었다. 에팅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결국 스퀘일러는 알아내기를 포기하고 에스티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자, 그래서 두 분…… 아니, 세 분이 여기에 오신 연유가?”
스퀘일러가 여유롭게 세 명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에스티아는 먼저 레이븐을 소개했다. 그런 다음 여기에 온 목적을 알려 주었다. 스퀘일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박사님께서 창고를 보시는 특별한 이유가 더 있으실까요? 가령, 하시는 연구에 더 도움이 될 거 같다든지.”
역시 연륜이 있는 상단주답게 그는 날카롭게 물어왔다. 레이븐이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비를 견딜 수 있는 버지니아 약초를 만들고 싶습니다. 스퀘일러 상단은 최근 들어서 ‘멀쩡한’ 버지니아 약초를 가진 유일한 상단이죠. 이 상단은 기존에도 이 약초를 좋은 환경에 재배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창고를 실제로 보고 괜찮으시다면 표본을 채취하고 싶습니다.”
에스티아는 마지막 말에 고개를 들어 레이븐을 쳐다보았다. 황명을 내렸으면 굳이 이렇게 번거롭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정체를 숨겨서 부탁을 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음…….”
스퀘일러가 고민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안 레이븐이 말을 조심스레 덧붙였다.
“원하신다면 지금 바로 몬터레이 국립 학교의 정식 협조문을 보여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건 나중에 받죠.”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레이븐과 에스티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퀘일러는 허허 하며 웃었다.
“모든 과정은 기록으로 남겨 둬야 하기 때문에 필요하긴 하지만 지금 당장 보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스퀘일러의 눈이 딱 에스티아로 향했다.
“에스티아 아가씨를 믿으니까요.”
‘아…….’
에스티아는 숨을 탁 내뱉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에스티아는 고개를 숙였다. 왠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비가 언제 또 많이 올지 모르니 지금 이동하되, 멀지 않은 거리이니 걸어가시죠. 마찻길이 복잡해서 걸어가는 게 더 빠를 겁니다.”
“좋습니다, 가면서 몇 가지 여쭙고 싶은데 가능하실까요?”
“좋죠. 에팅, 너는 여기 남아서 자료 좀 정리해주렴.”
“네.”
스퀘일러와 레이븐은 만난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두 사람 다 사람하고 잘 사귈 줄 아는 사람들이라 벌써 친해진 듯했다.
에스티아는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얼굴을 찌푸렸다. 에스티아는 속으로 흥 내뱉으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따라오든 말든 관심 없었다. 이미 조금씩 제대로 정을 떼고 있는 참이었으니까.
그래서 에스티아는 그가 어떻게 하고 있든 생각하지 않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왕이면 그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잠깐만요, 영애.”
에스티아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걸음만 멈추었다. 대공이 큰 보폭으로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긴 그림자가 그녀를 덮었다. 과거의 에스티아는 이 그림자를 그늘로 여겼겠지. 그저 짙은 어둠인지 모르고.
“말씀하세요.”
“그…….”
“죄송한데, 앞의 일행 분들이랑 떨어질 거 같은데 빨리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요지는 너랑 단둘이 있기 싫으니 빨리빨리 말해라, 였다. 대공도 이를 눈치챘는지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옆에…….”
“…….”
“옆에서 걸어도 되겠습니까?”
에스티아는 어이가 없어 그를 쳐다보지 않은 상태로 입을 벌렸다. 그렇게 자기 입맛대로 하던 사람이 이제 와 다정한 척이라니. 미련이 남은 척이라니. 에스티아는 숨을 가다듬고는 몸을 틀었다. 최대한 싸늘하고 무뚝뚝한 표정을 지은 채로.
“제가 말씀드렸죠. 그건 전하의 피앙세한테나 하시라고. 사랑하는 사람을 따로 두고 다른 여인한테 이러는 거, 그 사람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아, 혹시 설마.”
에스티아가 대놓고 헛웃음을 쳤다.
“마차에서 한 키스 때문에 새삼 마음이 흔들리기라도 하시나요?”
대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반면에 눈빛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순간, 에스티아의 머릿속에 한 가정이 스쳐 지나갔으나 그녀는 그걸 부정했다. 그 가정이 맞을 리가 없으니까.
“자, 그럼 대답할게요. 옆에서 걸어도 되냐고 하셨죠. 그 대답은 이미 하지 않았나요?”
에스티아는 대공이 황제의 잠행에 동행해도 되냐고 그녀에게 묻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자신이 했던 대답.
“싫습니다, 전하가 제 옆에 서는 건. 애초에 전하의 자리는 여기가 아니잖아요.”
“에스티아.”
“좀 이따 메르헨을 만나기로 했어요.”
“메르헨……?”
에스티아가 대공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대공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다만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말을 끊어서 화가 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둘이 언제부터 이름을 부르는 사이였습니까?”
대공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에스티아는 묻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눌러야 했다. 만약 물어 버리면 얘기가 길어질 테니까.
“메르헨에게 헌신함으로써 마음을 증명하라면서요, 전하. 제가 말만 잘하겠다고 하고 전하와 다른 영애한테 해코지할까 봐요.”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선을 넘는 말을 할까 싶어서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이윽고 차분한 톤으로 말을 이었다.
“전하가 못 믿으시겠다면, 다른 사람들이라도 믿게 해야죠. 그러려면 메르헨과 가까이 지내야 한다는 거요. 즉,”
에스티아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려 대공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제 전하가 믿건 믿지 않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예요. 이미, 다른 사람들이 믿고 있으니까. 게다가 전하도 이제 믿으시잖아요.”
“뭐를.”
이제는 지나가면서 들어도 알 정도였다. 대공이, 어쩌면 두려워하고 있다는걸. 순간 이대로 멈춰야 하나 생각했지만 에스티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또 휘둘리고 말 테니.
그래서 에스티아는 말했다. 어쩌면 그 마음에 비수가 될 수도 있는 말을.
“제가 전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요.”
“…….”
대공의 두 손이 떨렸다.
에스티아는 그걸 모른 체하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전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