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 사랑하지 않습니다 (2)
레이븐에게 답사는 성공적이었다. 에스티아 덕분에 스퀘일러 상단주는 그에게 매우 협조적이었다. 표본을 보여 준 것은 물론 여기저기 안내까지 해 줬다. 게다가 종종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러 오라고 하면서 몇몇 베테랑 상인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덕분에 레이븐은 무척 기분이 좋았다. 만약 황제로서 답사를 왔으면 엄청난 비용이 발생하는 것은 물론 귀족들의 엄청난 견제를 피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스퀘일러 상단주는 귀족이라고 해서 다 받아 주지 않았으니 이렇게 그와 빨리 만난 것도 만족스러웠다.
다만 걱정되는 건 얼이 빠진 채 서 있는 대공이었다. 에스티아는 여러 상인들과 끊임없이 얘기를 나누는 반면 에버하르트는 멀찍이 서서 멍만 때리고 있었다.
‘에휴.’
레이븐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버하르트는 잘 동요하지 않는 편이지만 한 번 동요하기 시작하면 너무 티가 났다. 어렸을 때도 아주 사랑 가지고 울고불고하더니 성인이 되어서도 하나도 변한 게 없다.
결국 레이븐은 스퀘일러에게 잠깐 양해를 구하고 대공에게 향했다.
“에버.”
“…….”
“에버!”
레이븐이 약간 목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대공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차인 건 알겠는데 티 좀 내지 말지?”
“…….”
일부러 발끈하라고 말한 건데 에버하르트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레이븐은 입을 떡 벌렸다.
‘이 정도면 2년 전…… 정도인데?’
레이븐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주 중증이었다. 2년 전보다 심한 건 아니지만 표정만 보면 그때와 맞먹었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에버, 잠깐만.”
이러다가는 정말 이상한 소문이라도 날까 싶어 레이븐은 대공을 데리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일단 이 표정을 가리려면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야 했다. 어차피 비도 별로 오지 않으니 감기 걸릴 걱정은 없으리라. 애초에 비를 신경 쓸 정신도 없는 거 같지만.
“에버하르트.”
레이븐은 에버하르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에버, 나 좀 봐봐.”
레이븐이 대공의 옆 목에 손을 갖다 댔다. 에버하르트의 눈이 레이븐을 향해 움직였다.
“무슨 일이야.”
“아…… 아…… 레이…… 윽…….”
겨우 목소리를 내던 에버하르트가 괴로운 듯 허리를 숙였다. 레이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냥 조금 아옹다옹한 정도이겠거니 했는데, 생각보다 더 심각한 듯했다.
그 ‘증상’이 나오려고 하고 있다. 그는 황급히 몸을 굽혀 에버하르트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았다.
“에버, 괜찮아. 숨, 숨, 쉬어.”
언제나 자신을 지켜 줄 거 같던 몸이 무너지고 있었다. 에버하르트는 숨을 헉헉 하고 내뱉고 있었다. 여기서 더 심해지면 쓰러진다.
‘제발.’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보니 후회가 밀려왔다. 비밀리에 온다는 사정상 호위는 에버하르트만 데리고 나온 게 잘못이었다. 도움을 청할 곳은 현재 에스티아밖에 없는데, 그가 이 모습을 절대 그녀한테 보이고 싶을 리가 없다.
레이븐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지금 이 순간 에버하르트가 듣고 싶은 말을 해야 했다. 그래야 이 증상이 진정될 수 있다.
“에스티아는, 안전해.”
“으…… 흐으…….”
에버하르트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레이븐은 에버하르트와 함께 한쪽 무릎을 꿇은 다음,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는 숨을 쉬기 괴로운 듯 한 손으로 레이븐의 팔을 붙잡았다.
“미안해, 에버.”
레이븐은 가슴이 저미는 것을 느꼈다. 그가 여전히 지옥 속에 사는 거 같아 괴로웠다.
“내가……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게. 어떻게든 할 테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이제 마음 그만 숨기고. 사랑하는 사람한테 비수 꽂는 것도 그만두고.”
“그, 그럼, 에스티아는…….”
“말했잖아.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겠다고.”
그러니까 제발 진정하라고.
레이븐은 에버하르트를 꼭 껴안았다.
에버하르트가 다시 무너지고 있었다.
* * *
에스티아는 레이븐에게 건네받은 쪽지를 읽고 동공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대공이 많이 아픕니다. 먼저 저택으로 가 있겠습니다. 상단주님한테는 대신 미안하다고 전해 주세요.
아니, 그 허우대 멀쩡한 남자가 갑자기 아프다고? 설마 아까 일 때문에?
에스티아는 어이가 없어 숨을 허 하고 뱉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타이밍이 너무 잘 맞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더군다나 본인이 이런 쪽지를 직접 남긴 게 아니라 레이븐이 남길 정도면…….
“에팅.”
에스티아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에팅을 불렀다.
“네, 아가씨.”
“혹시 대공 전하와 박사님께서 가시는 거 봤어?”
“음…….”
에팅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아뇨, 저도 못 봤습니다. 다만 못 보던 마차가 상단을 떠나는 걸 봤습니다. 만약 두 분이 맞으시다면, 꽤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에스티아는 이마를 짚었다. 이 남자는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에스티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눈을 질끈 감은 에스티아는 속으로 자신의 다짐을 되새겼다.
‘이제 그 사람이 무슨 마음인지 생각하지 않을 거야. 절대. 절대.’
미련이 남았든, 안 남았든. 괴로워하든, 말든.
그래서 에스티아는 상단에서 한참을 더 일하다가 저택으로 귀가했다. 자신이 그를 신경 쓰는 듯한 인상을 주고 싶지도 않았고, 설령 그런다고 해서 레이븐이 안 좋게 보지 않으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에스티아가 탄 마차가 입구 앞에 멈춰 섰다. 웬트워스가 우산을 들고 마차로 다가왔다.
“웬트.”
“아가씨.”
둘은 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짧은 사이에 눈빛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둘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안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에스티아가 사용인 하나를 붙잡고 상황을 물으려는데 계단에서 레이븐이 내려오는 게 보였다.
“박사님.”
“에스티아.”
레이븐의 표정은 온화하지만 지쳐 보였다.
“미안해요, 먼저 이렇게 와서.”
“아니에요. 전하는 괜찮으신가요?”
사실 묻고 싶지 않았지만 에스티아는 속내를 감추고 레이븐에게 물었다.
“예, 좀 피곤했던 거 같습니다. 지금은 자고 있어요.”
“다행이네요.”
하지만 경직되어 있는 건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에스티아는 힐끔 괘종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른 일정이 있으신가 보군요.”
“네…….”
에스티아는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대공을 너무 외면하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또 자신을 옭아매는 거 같아서 답답했다.
“에스티아.”
레이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괜찮아요.”
“네?”
예상치 못한 말에 에스티아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레이븐의 눈빛은 더없이 차분했다.
“난 대공과 영애의 사정은 자세히 모릅니다. 하지만…… 영애가 저 사람한테서 큰 상처를 받은 걸 알아요.”
“…….”
“그래서 내가 감히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달라, 부탁할 수가 없어요. 내가 영애의 상처를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폐하…….”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원래 호칭을 입에 담았다. 그녀는 사실 지금 굉장히 놀란 상태였다. 책에서는 이렇게까지 황제와 대공이 사이가 좋다고 묘사하지 않았다. 그저 어린 시절부터 알아 왔다고 써 놓았을 뿐.
하지만 레이븐은 진심으로 대공을 걱정하고 있었다. 마치 그의 가족처럼.
“그러니, 에스티아. 대공에게 용서받지 못할지라도 난…… 이거 영애에게 꼭 말해야겠어요.”
“폐하.”
에스티아는 듣고 싶지 않았다. 왠지 그가 할 말이 아까 자신이 잠시 떠올렸던 가정과 내용이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떠올리자마자 곧바로 부정했던 그 가정을.
에스티아는 레이븐의 말을 막고자 했다. 이제 지긋지긋했다. 대공과는 더 이상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레이븐도 그녀만큼이나 절박했다. 레이븐은 눈을 감았다.
“에버하르트는…….”
그러고는 에스티아가 듣고도 믿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 에스티아는 귀를 막고 싶었다. 눈을 감고 싶었다.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에버하르트는…… 메르헨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 * *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황을 보러 온 메리는 차갑게 가라앉은 로비의 분위기에 걸음을 멈췄다. 그래서는 안 되었지만 그녀는 몰래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에스티아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애.”
레이 박사가 에스티아를 부르는 게 들렸다. 에스티아는 아무 말이 없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거 압니다. 나 같아도 믿을 수 없을 거예요. 그저 그럴 수도 있다는 것만 알아줘요.”
레이의 말에 에스티아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근데 전 대공 전하한테 직접 들었는걸요. 아니, 직접 그녀를 사랑한다고는 말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약혼녀가 될 사람이라고 했어요.”
에스티아는 대공이 했던 말을 조용히 떠올렸다.
“전하께서는 제가 정말 과거와는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셰린포드 영애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증명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 그렇게 할 거예요.”
“…….”
메리는 왠지 지금이라도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에스티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전하가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실 수 있도록 메르헨과 힘을 합치기로 했어요. 지금 바로 메르헨을 만나러 가야 합니다.”
“메르헨을……?”
응? 레이 박사가 셰린포드 영애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인가? 아가씨는 또 언제 영애와 친해진 걸까.
메리의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떠다녔다. 인물관계도가 제대로 성립하지 않았다.
“영애, 혹시…… 저도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폐하께서요?”
‘뭐!? 폐하?’
메리는 계단 뒤에서 펄쩍 뛰었다. 레이 박사가 폐하라고? 하지만 황제 폐하는 금발이라고 알고 있는데.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다면 이 저택에 제국의 황제 폐하가 계신다는 거였다. 그것도 수십 개의 제후국을 다스리는 이 몬터레이 제국의 젊은 황제. 듣기로는 평소에는 온화하지만 왕국이나 제국 간의 문제에서는 철혈의 황제라고 들었다. 소문에 의하면 반기를 들면 살아남은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메리는 결국 여기서 더 들으면 위험할 거 같다는 생각에 자리를 피했다.
로비에 머물고 있는 공기는 여전히 서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