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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50화 (51/141)

50화 - 시끄러워요.

메르헨은 사용인들이 세워 놓은 천막 아래에 서 있었다. 팔짱을 낀 그녀는 언뜻 보면 여유로워 보였지만 사실은 속이 타들어 갔다.

생각보다 에버하르트가 글레멘드 저택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메르헨은 동요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가슴이 계속 울렁거리는 걸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주 대놓고 흔들리고 있는 게 눈에 보였으니.

차라리 이제 믿을 거면 에스티아를 믿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요즘 에스티아의 행보를 보면 정말 미련이 없거나 최소한 미련을 없애려는 게 느껴졌으니까.

‘에버하르트…….’

메르헨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렇게 쉽게 흔들릴 거면 그동안 왜 그렇게 애썼는지 화가 날 정도였다.

사실 알고 있다. 어쩌면 지금 하고 있는 노력이 무의미할지 모른다는 거. 만약 그가 정말로 그녀를 경멸하고 혐오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같은 저택에서 같이 있는 게 그 무엇보다 끔찍할 테니.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걸 기회로 활용했다.

‘그러니 이유를 없애 줘야지.’

메르헨은 사용인들과 인부들이 마찻길의 잔해들을 치우는 걸 지켜보았다. 이제 슬슬 에스티아가 올 시간이었다.

메르헨은 입꼬리를 위로 끌어 올려 보았다. 평상시와는 달리 잘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따라 입가가 경직된 거 같았다.

‘큰일이네.’

요즘 부쩍 에스티아가 눈치가 빨라진 거 같은데. 혹시라도 에스티아가 이 표정을 보면 일이 틀어질 수도 있었다. 메르헨은 평소에 많이 하는 상상을 천천히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상처만 주는 사랑을 짓밟고 그녀 옆에 서는 상상을.

그 상상을 하니 미소가 자연스럽게 입가에 떠올랐다. 게다가 그 상상이 곧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니 더 기분이 좋아졌다. 눈을 감고 있던 메르헨은 조금씩 눈을 떴다. 마차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메르헨!”

마차에서 내린 에스티아가 밝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메르헨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서 와요, 에스…….”

그래도 참아야 했다. 상상이 현실이 되게 하려면.

그렇게 반갑게 에스티아를 부르려던 메르헨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녀의 뒤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결코 보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메르헨.”

천막으로 온 에스티아가 메르헨의 표정을 보더니 미소를 거두었다. 메르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메르헨……?”

고개를 갸우뚱하던 에스티아는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뒤를 향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에스티아는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황제에게 닿고 있다는걸.

“오랜만입니다, 셰린포드 영애.”

오호라, 그러고 보니. 여주인공과 서브 남주의 만남이었다. 에스티아는 살포시 옆으로 비켜섰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지난번에 대공에게 듣기로는 몸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레이븐이 메르헨 앞에 서며 물었다. 메르헨의 시선이 잠시 아래를 향했다가 위로 올라왔다.

“예, 걱정해 주신 덕분에 많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메르헨의 시선이 잠깐 에스티아에게 머물렀다. 그 눈빛이 언뜻 매서워 보여 에스티아는 살짝 움찔했다.

“어떻게 여기에 오셨는지요? 영애와 폐하께서 어찌 같이.”

에스티아는 메르헨의 어투가 묘하게 책망하는 듯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에스티아는 내심 당혹스러웠다. 원작을 열심히 읽어 본 바, 메르헨은 레이븐을 이성적으로 생각하진 않았지만 좋은 친우로 생각했다.

그는 메르헨에게 키다리 아저씨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물론 기껏해야 메르헨보다 다섯 살 더 많을 뿐이지만.

한마디로 전형적인 서브 남주 캐릭터였다. 뒤에서 묵묵히 그녀를 지지해 주면서, 그녀가 곤경에 처할 때면 귀신같이 나타나 구해 주는. 상투적인 캐릭터이지만 에스티아는 레이븐이라는 캐릭터를 좋아했다. 레이븐과 메르헨의 관계성도 좋아했고.

그런데 이 분위기는 뭐람. 에스티아의 시선이 바쁘게 움직였다. 둘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설레고 편안한 분위기가 아니라 저절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싸늘한 공기가.

메르헨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메르헨이 드물게 불쾌한 티를 내고 있었다. 대놓고 당신이 불편하다는 걸 온몸으로 드러냈다. 만약 자신이 황제였다면 자리를 피했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글레멘드 영애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한 게 있어서요. 같이 어딜 갔다가 오는 길입니다. 마침 영애를 만나러 간다기에 무례를 무릅쓰고 따라왔고요.”

“그랬군요, 그래서 일부러 변장까지 하신 겁니까?”

메르헨이 황제의 머리를 올려다보았다. 원래의 금발이 아닌 짙은 갈색 머리였다. 눈동자도 금안이 아닌 평범한 갈색 눈이었다. 물론 얼굴 생김새는 여전히 수려했지만.

레이븐은 민망한 듯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너무 눈에 띌 거 같아서요. 이상한가요?”

“아뇨, 잘 어울리십니다.”

이건 뭐, 초봄과 초겨울의 만남을 보는 거 같았다. 한쪽은 찬 바람이 쌩쌩 부는데 한쪽은 한없이 다정하고 친절했으니. 지금 황제의 표정은 정말 싱그럽다고 할 정도로 화사했다. 반면에 메르헨의 표정은 살얼음판 같으니 에스티아는 괜히 자신이 뻘쭘해졌다.

“영애께서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네요.”

어머어머. 에스티아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수줍어하는 황제, 아니 서브 남주의 모습이라니. 에스티아는 팬의 마음으로 돌아가 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영락없이 그녀를 좋아하는 게 티가 났다.

‘이럴 때는 자리를 피해 줘야지.’

에스티아는 살포시 뒤로 물러섰다.

“전 제 사용인들을 살펴보고 올게요. 두 분이서 대화 나누세요.”

두 사람의 시선이 에스티아에게로 향했다. 에스티아는 예를 갖춰 인사하고 총총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그러고는 복구 작업에 힘쓰고 있는 자신의 사용인에게 다가갔다.

레이븐은 잠시 에스티아를 주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 * *

메르헨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열었다가는 좋은 말이 나갈 거 같지 않았다. 누가 이런 그녀의 속마음을 알아차린다면 감히 황제에게 그럴 수 있냐며 뭐라 할 테지만 메르헨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그의 예상대로 반응하는 게 싫을 뿐이었다. 근데 그렇다고 평소처럼 미소를 지을 수도 없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안 보려면 오순도순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하는데 그들은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메르헨, 정말 몸은 괜찮은 거예요?”

레이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메르헨은 대답하지 않았다. 레이븐의 목소리도 아까보다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진짜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리라.

“괜찮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메르헨이 차갑게 내뱉었다. 레이븐이 씁쓸하게 웃었다.

“안색이 아직은 안 좋은 거 같아서.”

“…….”

“대공이 많이 걱정되어서 그렇습니까?”

황제의 목소리에 왠지 슬픈 기색이 감도는 듯했지만 메르헨은 외면했다. 그녀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저야 항상 전하를 걱정하죠. 혹시나 아프시진 않을까, 다치진 않을까.”

“그런데 왜 그런 겁니까?”

“뭐가요?”

거슬리는 말에 메르헨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씀이세요?”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여 메르헨은 반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공이 아프지 않고, 다치질 않길 바라면서 왜 그러시는 거냐고 묻는 겁니다.”

“하.”

메르헨이 헛웃음을 쳤다. 역시나 또 그 레퍼토리였다.

“이 정도면 지치지도 않으세요? 똑같은 소리 계속하는 거?”

메르헨은 싱긋 웃었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화기애애해 보일 수 있도록.

“아뇨, 소중한 두 사람을 위해서라면 이런 소리 평생 할 수도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곧 그 소리 안 하시게 될 테니까.”

“메르헨.”

레이븐이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위아래 입술이 붙고 잠시 떨어졌다가, 멀어지는 이름을.

“대공이 쓰러졌어요.”

“뭐라고요?”

메르헨의 눈이 커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녀의 눈빛은 노기를 띠고 있었다.

“그래서 그게 제 탓이라고요? 보나 마나 에스티아가 이상한 말을 했겠죠.”

역시 믿을 게 못 돼. 메르헨은 황제 앞에서 대놓고 혀를 찼다. 그런 그녀를 레이븐이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눈빛이 미치도록 싫었다.

“르헨, 대공이 무너졌다고요. 그 사람이, 에스티아 때문에 무너졌다고.”

“시끄러워요!”

메르헨은 소리를 빽 하고 질렀다. 그러고는 바로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질렀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메르헨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인부들은 멀리 있었고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은 거 같았다. 메르헨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이러는 것도 이제 지치지 않아요?”

“레이븐.”

계속 말을 이으려던 레이븐이 말을 멈췄다. 겨우 이름 한 번 불린 것뿐인데 마음속에서 꽃이 피어나는 듯했다.

“지치는 게 두려웠으면 내가 나서서 두 사람을 위해 버진 로드를 깔아 줬겠죠. 지금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

밝게 웃고 있었지만 메르헨의 말은 칼을 품고 있었다.

“이번에는 전과 달라요. 2년 전 상태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그럼 좋죠.”

메르헨이 아이처럼 까르르 웃었다.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섬뜩할 정도로 천진난만한 목소리였다.

“얼마나 날 의지하겠어요. 집에 들여놓으면 당분간 꼼짝도 못 하겠네요! 빨리 마찻길을 복구시켜야겠어요!”

메르헨은 손바닥을 짝 쳤다. 그 얼굴을 보니 가슴이 미치도록 저렸다.

“진짜 사랑하다면…… 대공이 2년 전처럼 무너질 수 있다고 할 때…….”

레이븐이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목이 메어 말을 술술 내뱉을 수가 없었다.

“에버하르트가 2년 전처럼 망가질 수 있다는데 어떻게 웃을 수가 있어요, 메르헨.”

“왜 웃음이 안 나와.”

메르헨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정신 차려요, 레이븐. 에버하르트는 저 여자 때문에 무너졌었어요. 당신 말대로! 바로 그 순간에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위로해 줬는데요.”

“껍데기만 안고 위로하는 게 진정한 사랑입니까?”

“아닐 건 또 뭐야.”

메르헨의 형형한 눈빛이 레이븐을 향했다. 그의 마음이 다시금 짙은 절망에 물들여졌다. 메르헨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가 버리는 거 같았다.

“당신이 사랑이 뭔지 어떻게 안다고……!”

“더는 당신이 사랑 때문에 무너질 거 같다고 해서, 대공에게 당신 옆에 있어 달라고 부탁하지 않을 겁니다. 대공도 그럼 한결 편하게 연기를 그만둘 수 있겠죠.”

메르헨이 말을 뚝 멈췄다.

이 미친 황제, 빌어먹을 황제.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요.”

메르헨은 등을 휙 돌리고 우산을 들고 서 있는 하녀에게로 향했다. 이렇게 피하는 게 인정이라는 걸 알았지만 도저히 떨리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에게로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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