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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51화 (52/141)

51화 - 왜 날 버려

저택에 들어온 에스티아는 곧바로 침대에 뻗었다. 수마가 덮치는 반면 에스티아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들으려던 건 아니었다. 인부들이 편히 일할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주다가 그곳에 있던 사람 중에서는 메르헨과 가장 가까이 있었을 뿐이었다.

‘시끄러워요!’

착각이 아니라면 그 목소리는 분명 메르헨의 목소리였다. ‘메르헨이 황제 레이븐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게 에스티아의 판단이었다.

그 이후 에스티아는 억지로 밝은 척 연기해야 했다. 입가가 경련을 일으키는 듯했지만 그렇다고 딱딱한 표정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에스티아는 인부들과 자신의 사용인들을 챙기는 것보다 메르헨 앞에서 웃는 게 더 곤욕스러웠다.

마찻길은 확실히 사람이 많이 더해지니 90%는 복구가 되었다. 아마 내일 오후쯤이면 길이 완전히 복구가 될 거라고 한다. 에스티아는 안도감이 들면서 기지개를 쭉 켰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막상 길이 뚫리니 대공이 아팠다. 아무리 오만가지 정 다 떨어졌다고 해서 무려 대공씩이나 하는 사람을 쫓아낼 수는 없었다. 에스티아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사실 레이븐과 함께 길로 향할 때만 해도 이럴 생각이었다. 메르헨이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을 테니 그녀도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그럼 소문도 걱정할 필요도 없고, 메르헨의 마음이 상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대공도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예상치 못한 음성이 발목을 잡았다. 에스티아는 애써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하려고 했지만 그 근방에 여자라고는 에스티아와 메르헨뿐이었다. 남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황제가 그런 목소리를 낼 리는 없으니까.

‘도대체 뭐야.’

에스티아는 주저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싸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모르는 게 생각보다 많을 거 같다는 생각. 어쩌면 자신은 누군가의 계략에 철저히 농락당하고 있는 거 같다는 생각.

에스티아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무래도 메르헨을 글레멘드 저택에 머물게 하는 건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듯싶었다. 에스티아는 침대 옆에 달린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곧 메리가 따뜻한 차와 쿠키를 쟁반에 올린 채 침실로 들어왔다.

“메리.”

“잘 쉬고 계셨어요, 아가씨?”

“응, 덕분에.”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한 에스티아는 침대 옆을 탁탁 쳤다.

“여기 잠깐 앉아 봐, 메리아나.”

“?”

메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채 에스티아 옆에 앉았다. 에스티아는 손을 들어 메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메리, 대공 전하는 어때?”

메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예전 같았으면 손뼉이라도 쳤을지도 모른다. 대공이 ‘적당히’ 아프면 좀 더 이 저택에 머물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에스티아가 좋아했을 테니까.

하지만 메리는 귀족 출신이지만 하녀로 일한 경력이 꽤 길었다. 그만큼 집안 자체가 허울뿐인 귀족이고 거의 가세가 기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리는 전 주인의 추천서를 받아 이 저택에 왔고 그렇게 에스티아와 만났다.

즉 눈치가 없진 않다는 소리였다. 메리는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에스티아가 더는 대공에게 미련이 없다는걸. 오히려 그를 멀리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지금 이 상황은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메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시긴 하셨는데 열이 있으세요. 의원이 진단해 보더니 많이 놀라신 거 같다고 했어요. 무슨 일이 있으셨냐고 여쭈었는데 대답하지 않으셨어요.”

“…….”

이 사람이 하다 하다 죄책감까지 유발하려고 하는 건가? 에스티아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고, 하셨어요.”

메리는 슬쩍 에스티아의 눈치를 보았다. 에스티아는 적잖이 착잡한 얼굴이었다.

“그럼…….”

에스티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대공을 내버려 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에스티아는 곧 고개를 저었다. 곧 에스티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가씨?”

메리도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어딜 가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차와 쿠키는 메리, 네가 먹어. 나는…….”

에스티아가 문을 열었다.

“잠시 그 남자 좀 만나고 올 테니까.”

* * *

그렇게 호기롭게 나섰던 에스티아는 조용히 방문만 노려보고 있었다. 대공하고 얘기를 나눴다 하면 열에 아홉은 싸우는데다가 하필 그런 얘기까지 하고 난 뒤여서 보기가 껄끄러웠다. 에스티아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에스티아는 똑똑 노크했다.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몇 번을 더 노크하던 에스티아는 결국 문고리를 아래로 내렸다. 그런 다음 그대로 문을 밀었다.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에스티아는 캄캄한 방 안으로 들어온 뒤 문을 닫았다. 큰 방 안에는 옷장과 책상, 그리고 커튼으로 둘러진 더블 사이즈 침대가 전부였다.

조용히 방 중앙으로 온 에스티아의 귓가에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에스티아는 침대로 다가가 커튼을 열었다. 그러자 그 위에 누워 있는 남자가 보였다.

에스티아는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방 근처에 머물고 있는 걸 보면 일부러 사용인들이 그녀의 방과 가까운 방으로 배치한 거 같았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에스티아는 픽 하고 웃었다. 모든 여건이 따라 줘도 마음이 없으면 되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 남자와 그녀가 완전히 어긋난 것처럼.

대공이 창백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에스티아의 머릿속에 한 기억이 떠올랐고, 곧 기억은 그의 현재 얼굴과 겹쳤다.

순간, 현기증이 돌면서 에스티아가 힘없이 침대 옆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상하게 기운이 쭉 빠졌다. 동시에 그녀의 귓가에 환청이 들렸다.

-티아. 티아.

어린 소년의 목소리.

-나의 티아. 다른 가문의 약혼 제안은 다 거절해야 해. 나랑 약속했어.

에스티아는 두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예전에는 꿈속에서만 들었던 목소리가 요즘에는 일상 속에서도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지금이야 드문드문 찾아오는데 빈도수가 높아지는 게 걱정이었다. 지금도 두통을 이기기 힘들 정도였으니까.

-왜 그랬어, 왜.

에스티아는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면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덜 들릴까 싶어서.

-도대체, 왜! 왜, 에스티아, 왜!

절규에 찬 목소리. 원만만큼이나 짙은 애정이 깃든 목소리.

“그만해, 그만해…….”

-왜…… 왜…… 날 버려?

에스티아.

“그만해.”

에스티아.

“그만하라고!”

“에스티아.”

그때 큰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손목을 휘감았다. 에스티아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환청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하…… 아…….”

에스티아는 그대로 침대에 엎드렸다. 온몸에 식은땀을 흘렸다. 또다, 또. 게다가 갈수록 더 심해지는 거 같다.

“에스…… 아니, 영애.”

대공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염려스러운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지만 에스티아는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대공이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게 느껴졌다. 숨을 고르던 그녀는 속에서 분노가 불쑥 튀어나오는 게 느껴졌다.

에스티아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이건 지금 자신의 감정이 아니었다. ‘진짜 에스티아’의 마음이었다. 그 마음은 점점 자신의 마음을 누르고 겉으로 드러나려고 하고 있었다.

‘다 이 사람 때문이야. 내가 괴로워한 이유도, 지금 네가 이렇게 힘든 이유도, 다 이 남자 때문이라고!’

에스티아는 이를 악물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대공의 손을 매섭게 쳐냈다. 대공의 손은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쉽게 물러갔다. 대공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 된다. 절대 ‘진짜’에 압도되어서는 안 되었다. 평소 ‘그녀’는 악몽이나 현기증으로 찾아왔었다. 그런데 바로 지금, 에스티아를 누르고 표면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복수해. 복수해. 날 버렸었으니까 복수하라고!

그녀는 그렇게 울부짖는 듯했다. 점점 정신이 몽롱해졌다.

“다…… 당신 때문이야.”

“…….”

“내가 왜 내 저택에서 눈치를 봐야 해? 내가 왜, 내 인생인데 당신한테 지배당해야 하냐고!”

“…….”

대공의 표정이 깊게 가라앉았다. 에스티아는 그를 개의치 않고 계속 소리 질렀다. 제어하고 싶은데 제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언제 당신을 버렸어. 당신이 날 먼저 짓밟았잖아. 날 비웃고 조롱했고 경멸했잖아.”

에스티아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역겨우니까, 제발 피해자인 척 그만해. 안 그러면 내가 당신 죽여 버릴 수도 있으니까.”

“해.”

“뭐?”

“해 보라고.”

대공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이번에도 비꼬는 건가 싶어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흔들리는 기세 없이 올곧았다. 에스티아는 도리어 자신과는 달리 이 남자는 평온하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이쯤 되니 이게 ‘진짜’ 그녀의 감정인지 자신의 감정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에스티아는 자신의 옷자락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대공의 시선이 자연스레 위로 향했다. 두 시선이 각자 다른 감정을 담은 채 서로를 향했다.

에스티아는 빠른 동작으로 침대 위로 올라갔다.

“윽…….”

그리고 그 상태로 대공의 상체에 올라타 두 손으로 두꺼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 * *

에스티아는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과거의 에스티아에게 통제되고 있다는걸. 그녀가 완전히 자신을 장악해 버렸다는걸.

머릿속으로는 빨리 이 목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컥…… 큭…….”

대공은 그녀의 손 아래에서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무리 작은 손일지라도 온몸에 힘을 싣고 누르고 있었다. 점점 의식이 아득해졌다.

그래도 그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어쩌면, 원래의 그녀가 돌아온 걸지도 몰랐다. 그녀를 붙잡아 둬야 했다. 대공은 양손으로 에스티아의 두 손목을 쥐었지만 세게 잡진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화가 풀릴 수 있도록 더 세게 잡아당겼다.

에스티아의 팔이 움찔했다.

‘왜, 왜.’

그녀의 눈빛이 당혹감으로 흔들렸다.

‘왜, 밀치지 않는 건데.’

날 밀치라고. 그럼 난 당신을 할퀴고 때리고 욕하고, 울 거란 말이야.

하지만 대공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거의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그는 겨우겨우 의식의 끝을 잡고 있었다. 이대로 의식을 잃으면 그녀를 놓쳐 버릴지도 몰랐다. 그렇게 그녀를 또 잃으면, 다시는 못 만나게 되면, 자신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랐다.

‘다시는 버리지 못하게 할 거야.’

그는 이를 악물었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를 이곳에 둬야 해서.

하지만 갈수록 의식은 흐려졌다. 에스티아의 모습도 희미해졌다.

‘안 돼…….’

“에…… 스…… 티아…….”

그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위아래 입술이 단 한 번도 맞닿지 않는 이름. 그래서 언제나 더 애가 탔던 이름.

언제나 수십 번이고 부르고 싶었던 이름.

외면할 때면 언제나 사무치고 그리웠던,

에스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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