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 내가 무슨 짓을
에스티아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돌연 의식이 돌아온 탓이었다. 에스티아는 서서히 손의 힘을 뺐다.
그녀는 현재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뭔 짓을 한 거지? 의지와 상관없이 몸을 움직이더니 그에게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해 버렸다. 에스티아의 마음속에 죄책감이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대공의 안색도 나쁘긴 마찬가지였다. 입술이 움찔거리지 않았다면 거의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에스티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자신의 발이 아래로 꺼지는 줄도 모르고.
“……!”
차라리 그대로 넘어져 기절이라도 했으면 나았을 걸, 큰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잡아당겼다. 덕분에 에스티아는 그때 마차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의 품에 폭 안기고 말았다.
“……허…… 흐흑…….”
대공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막혀 있던 목이 겨우 트였으니 급히 산소를 들이마시고 있는 것이리라. 에스티아는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 아직도 얼떨떨했다. 대공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염려스러웠지만 지금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기에 걱정이 되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에스티아는 대공의 어깨를 밀었다. 이제 그만 놔 달라는 몸짓이었지만 대공은 도리어 그녀를 더 꽉 껴안았다. 그의 숨결이 목 옆에 닿았다.
“이제…… 하…… 알겠어.”
“…….”
“당신이 진심인 걸 이제 알겠다고.”
계속 그를 밀던 에스티아는 동작을 멈추었다. 그가 말하는 진심은 평소의 오해니 착각이니 얘기할 때의 그 진심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토록 그가 믿게 만들고 싶었던 그 진심이었다.
“정말 날 지긋지긋해하고 있구나, 당신.”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착각이 아닌지 그녀의 어깨로 슬픔이 똑 떨어졌다.
“이런 게 어디 있어……. 절대 포기 안 한다면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포기 못 할 거라면서.”
언성만 높이지 않았다 할 뿐이지 그는 거의 절규하고 있었다.
“사실이었네, 그 사람이 했던 말이.”
“그 사람?”
뻣뻣하게 굳어 있던 에스티아가 고개를 움직였다.
“그 사람이라뇨?”
대공은 대답 대신 에스티아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목에 닿자 온몸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에스티아는 다시 밀어낼까 잠깐 고민했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누군데요? 그 사람이.”
지금은 억지로 떼어 내려 하기보다는 놔두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어쩌면 대공의 솔직한 말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물론 방금 그의 목을 졸랐던 차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무척 이기적인 거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에스티아는 자신이 모르고 대공이 알고 있는 진실을 듣고 싶었다.
대공의 입술이 조금씩 벌어지면서 숨결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
“……오스카 후작이요.”
음, 어째 더 공손해진 거 같기도 하다. 잠깐, 누구?
“오스카 후작이요? 뭐라고 했는데요?”
“그건…….”
대공은 말을 잇지 못했다. 듣고 싶긴 했어도 정말로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도 안 한 에스티아는 새삼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렸다. 어째 그 후작님은 잊을 만하면 이름이 들려온다. 마치 의도적으로 그녀 곁에 맴돌고 있다는 걸 티라도 내는 것처럼.
‘아, 정말 마차 타고 가면서 봐도 수상할 거 같더라니.’
애초에 산 초입에서 펜던트를 흘렸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대공의 답을 들으려던 에스티아는 갑자기 막막해진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말이 맞아요.”
“……뭐가요?”
대공의 입술이 겨우 목에서 떨어졌다. 에스티아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오스카 후작을 조심하라고 했잖아요. 맞는 말 같다고요.”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했습니까?”
대공이 두 손으로 그녀를 떼어내더니 초조함이 깃든 눈빛으로 그녀에게 시선을 두었다. 에스티아는 한숨을 쉬며 대공과 똑바로 시야를 마주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야기해 줄 건가요?”
“하…….”
대공은 한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그 손을 바라보던 에스티아의 시야에 대공의 목이 보였다.
“일단, 목이나 봐봐요.”
에스티아는 조심스레 대공의 손을 치우고 몸을 숙였다.
가까이 본 목 상태는 더 안 좋았다. 이 정도로 부었다면 피멍이 들고도 남았다. 오히려 그 정도면 다행이었지. 에스티아는 조심스레 대공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그 촉감을 의식한 듯 대공의 몸이 잘게 떨렸다.
“아까 전하께서 저를 때려눕혔어도 할 말 없었어요. 아무리 제 마음속에 전하를 향한 증오가 숨겨져 있었다고 해도, 잘못된 행동이었습니다.”
에스티아가 생각해도 방금 자신의 행동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갑자기 현기증이 돈 것도 모자라 그런 행동까지 하다니. 다른 누군가가 그녀의 몸속에 있는 것처럼 몸을 통제를 할 수 없었다.
마음속에 공포심이 스며들었다. 정말 진짜 에스티아가 아직 마음속에 있는 거라면 어떡하지? 혹은 그녀의 후회와 미련이 이 속에 남아 있는 거라면?
에스티아의 손이 스르륵 내려갔다. 그 손을 대공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두려움이 짙게 물든 손짓이었다.
“방금…… 방금 일은…… 우리 둘 다 모르는 일입니다.”
“네?”
에스티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기사단장으로서 큰 책임감을 느껴 스스로 자학을 하다 생긴 상처인 겁니다. 그러니 누가 제 상처에 대해 묻거든 그냥 모른다고 하세요.”
“그게 말이 되는……!”
“에스티아.”
대공이 다시 두 손으로 에스티아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렇게 하는 걸로 해요. 그래서 일부러 당신의 손목도 세게 잡지 않은 거예요. 당신이 의심받으면 안 되니까.”
“…….”
에스티아는 ‘하’ 하고 숨을 내뱉었다.
“그 와중에 그런 것도 계획했어요? 아니, 지금.”
에스티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잠시 숨을 고르던 에스티아는 시선을 다시 위로 올렸다. 녹색 눈동자가 오로지 그녀만을 담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지금 저한테 화내셔야 해요. 나한테 왜 갑자기 이런 짓을 했냐고. 근데 지금 전하의 모습을 보면, 저도 이해하지 못하는 제 행동을, 다 이해하고 계신 것처럼 보여요. 대체…….”
에스티아는 침대 시트를 꽉 쥐었다.
“대체…… 저한테 뭘 숨기고 계신 거예요.”
“한 가지는 말해 줄 수 있죠.”
“뭔데요, 그게.”
대공의 손이 꿈틀 움직이더니 에스티아의 손을 향했다. 하지만 그 손은 차마 잡고 싶은 손에 닿지 못하고 애매하게 맴돌았다.
“당신이…….”
대공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에스티아는 그 손을 쳐내지 못했다. 대공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과거 기억이 없다는 거.”
쿵.
에스티아의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이었네요, 그 사람의 말이.”
“제가 과거의 기억이 없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라고요?”
알면서도 에스티아는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대공이 다시 한번 그 자신이 끔찍하게 여기는 이름을 입에 담았다.
“……오스카 후작이요.”
* * *
그때 직후 대공은 지쳤다고 우기며 그녀를 방에서 내쫓았다. 다음에 다시 얘기를 하자고.
에스티아는 자신의 상태 때문에 걱정 반, 대공의 상태 때문에 걱정 반 상태였다.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아침이 밝자마자 바로 대공의 방으로 갔는데, 대공은 이미 없었다.
카린한테 물어보니 마찻길이 복구되자마자 부리나케 저택을 떠났다고 한다. 에스티아는 목덜미를 잡았다. 이 인간은 꼭 피하고 싶을 때는 나타나고, 만나야 할 때는 피해 다녔다.
“카린, 대공 전하는 어때 보였어?”
“전하요?”
카린이 왜 그런 걸 묻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금방 회복하셨던데요. 다들 깜짝 놀랐어요.”
“그럴 리가…….”
“아가씨?”
에스티아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카린의 눈빛도 가라앉았다.
“그럴 리가 없어. 어디 아파 보이는 데 없었어?”
“아뇨……. 너무 멀쩡해 보이셨어요.”
“목에 뭘 두르고 있진 않았고?”
“네.”
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티아는 복도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가씨!”
카린이 화들짝 놀라며 에스티아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에스티아는 무릎을 끌어안고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새빨갛게 부어올랐던 대공의 목이 생각났다.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에스티아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래, 메르헨을 사랑하지 않는 건 둘째 문제라고 치자. 에스티아가 자신의 목을 졸랐다고 레이븐에게 한마디만 해도 에스티아의 위상은 다시 땅으로 처박혔을 것이다. 아니, 원래대로 처박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매장 당했을 것이다.
대공은 그녀를 경멸하고 증오했으니 그한테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기회인 셈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기회를 아주 대놓고 걷어차 버렸다. 그 정도도 아니라 애초에 자신에게 달려든 사람을 밀쳐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에스티아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순간 대공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이었네, 그 사람이 했던 말이.
-누군데요? 그 사람이.
-……오스카 후작이요.
오스카 후작. 에스티아는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아무래도, 빌어먹게도, 그 후작이 열쇠인 거 같았다.
에스티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사실 에스티아는 대공이 그녀를 만나 주지 않는다면 편지라도 보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편지지를 꺼내 글씨를 적어 내려가기 직전 메리가 새로운 소식을 들고 왔다.
“대공 전하께서 자해를 하셨다는 소문이 사교계에서 퍼져 나갔습니다. 자신이 아가씨의 말을 무시하고 제대로 대비하지 않아 자책감을 느끼셨다고요.”
맙소사. 그 소식을 듣자마자 에스티아는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이 대공 전하께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시기로 한 모양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더 알아내야 했다. 속으로 열심히 계획을 짠 에스티아는 곧바로 수행원 웬트워스를 데리고 오스카 후작저로 향했다.
에스티아는 드레스 차림이 아니라 검은색 면바지에 흰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이 시대에서 여자가 그렇게 입고 다닌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에스티아는 룰루랄라 드레스를 차려입을 기분이 아니었다.
로브조차 걸치지 않았다. 오스카 후작저에 가서 지난번의 일에 대해 물을 겸 다른 일을 추진할 생각이었다.
에스티아는 오스카에게 거래를 제안하러 가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