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 그가 원하는 것
아름답지만 스산하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에스티아는 오스카 저택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바로 앞에 장미 밭을 두고 있는데도 그 화사한 빛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거 같았다.
웬트워스는 염려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저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택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돌고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챈 듯했다. 에스티아는 잠시 웬트워스의 손을 잡아 주었다.
육중한 문이 조금씩 열리며 그 안에서 집사 안셀이 나왔다. 그는 두 사람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어서 오십시오, 에스티아 아가씨, 웬트워스 남작님.”
여전히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를 본 웬트워스는 잠시 얼굴을 찌푸리더니 애써 불쾌한 감정을 뒤로 감췄다. 안셀이 두 사람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후작님께 꼭 할 말이 있어서요.”
“괜찮습니다. 후작님께서 영애는 언제든 저택 안으로 뫼시라고 하셨거든요.”
안셀이 음높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톤으로 말했다. 언제든. 에스티아는 그 말이 처음으로 무섭게 느껴졌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후작님께 알리겠습니다.”
안셀은 다시 꾸벅 인사하더니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응접실을 나섰다. 그가 나가자마자 웬트워스가 에스티아의 옆으로 바싹 다가왔다.
“아가씨, 느낌이 이상합니다.”
“응, 알아. 나도 그래.”
애초에 이곳에서 사람이라고는 후작과 안셀 빼고는 보지 못했다. 하물며 보통 사람이 혼자 사는 집도 이렇게 조용하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거대한 저택이었는데 하녀나 시녀 한 명 없었다. 그 외에 사용인들도 보이지 않았다.
가장 꺼림칙했던 건, 후작은 그들이 어떻게 보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스티아는 웬트워스를 마주 보았다.
“웬트, 할 말만 하고 바로 돌아갈 거야.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으면 아까 말한 대로 부탁해.”
웬트워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 집사, 하나도 안 변했네요.”
“본 적 있지?”
웬트워스는 오스카 후작이 에스티아에게 청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집사하고도 당연히 한 번쯤은 마주쳤을 것이다.
“네, 2년 전 때 잠깐 봤었습니다. 정말 잠깐이었는데 제 얼굴을 기억하고 있네요.”
그는 그 사실이 못내 못마땅한 듯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은 아닙니다. 이런 말 저 집사한테는 미안하지만, 왠지……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져서요.”
에스티아는 조용히 속으로 공감했다. 말할 때 빼고는 얼굴 근육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 거 같았다.
“아가씨. 이런 말씀 기분 나쁘시겠지만 들어 주십시오. 원래 귀족 영애가 다른 가문의 가주나 영식의 청혼을 거절하면 더는 연을 맺지 않는 게 귀족 사회의 관례라는 건 아실 겁니다.”
“응.”
에스티아는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가문들 간의 결혼이란 거의 사업이었기 때문에 거절은 곧 가문 간의 절연을 의미했다. 만약 남자 쪽 가문이 권위가 있는 곳이라면 거절한 여자 쪽은 다시 청혼을 받기 힘들 정도로 경직된 사회였다.
그렇기에 웬트워스가 이렇게 충고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공작 가문보다 아래인 후작가라고 해도 엄연히 고위 귀족이었다.
“걱정하지 마, 웬트. 제대로 인지하고 있어. 이 이상은 하지 않아. 다만 너도 알다시피 지난번에 이상한 일이 있었잖아. 내가…… 모르는 일이 있는 거 같아.”
“…….”
지난번 일이란 후작이 꽃을 들고 글레멘드 가를 방문했던 날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걸 알아들은 웬트워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떤 무언가가 나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는데 수수방관할 순 없어. 난 알아내야겠어, 웬트.”
“아가씨.”
“그러니까.”
에스티아가 웬트워스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를 지켜요, 웬트워스 남작.”
에스티아가 단호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웬트워스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이렇게 에스티아가 제대로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던가. 그것도 주군으로서. 설령 있었다 한들 아주 오래전임이 분명했다. 에스티아의 인생은 요 몇 년간 폭풍 속에 있었으니.
게다가 대공에게 사랑을 거부당하면서 그녀는 점점 총기를 잃어 갔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녀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옆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원래 에스티아가 돌아왔다. 그의 주군이 돌아왔다.
웬트워스는 에스티아의 오른손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예,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그는 입을 맞춘 손을 꼭 잡았다.
에스티아도 에스티아대로 웬트워스의 반응에 놀랐다. 웬트워스 남작가는 글레멘드 가문의 가신이었다. 게다가 웬트워스는 그녀를 지키는 수행원이었다. 그녀로서는 마땅히 내릴 법한 명령이라서 내린 명령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까지 할지는 몰랐다. 에스티아는 이 상황이 어색하고 머쓱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와의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 왠지 그가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잘 부탁해, 웬트…… 아니, 이안.”
응접실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에스티아가 이안에게 말했다.
어렸을 때는 이안이라 불렀지만 그녀가 좀 자라고 나서는 성으로 불렀다고 했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이제 그를 다시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졌다.
이안이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는 방 안에 조악한 돌 수십 개를 갖다 놓는 것보다 금 하나를 놓는 게 더 빛나 보인다는 걸 안다. 아무리 아름다운 장식품을 갖다 놓는다고 해도 그것이 사람보다 더 아름다울까. 그가 ‘오랜만에’ 보는 에스티아는 딱 그런 느낌을 주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후작님.”
그의 눈에 경계심을 잔뜩 품고 있는 에스티아가 보였다. 그런 모습마저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영애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빅터가 싱긋 웃었다. 에스티아는 마음 같아서는 왜 자신은 언제나 환영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오늘은 관계를 틀어지게 하기 위해 온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앉았다. 에스티아는 다시금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왠지 이곳에서는 좀 더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거 같았다.
“왠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오신 거 같은데, 이유를 여쭈어도 될는지요?”
빅터가 수려한 동작으로 그녀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물었다.
에스티아의 목까지 어떤 질문이 차올랐다. 그녀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도대체 대공에게 무슨 말을 했기에 그가 그나마 그렇게까지 솔직해진 건지. 도대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싶은 건지.
하지만 에스티아는 불안전한 지름길 대신 안전한 우회로를 택했다. 지금은 그럴 때였다.
“후작님이 꽃을 찾으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한 숲에서 수상한 꽃을 보았고요. 저희 가문 소속의 마법사에게 돌려서 물어보니 마나가 불안정하게 흩어졌을 때 특정 물건에 봉인이 되기도 한다는군요. 후작님도 그런 경우 아닌가요?”
다만 우회로를 택했다고 해도 아예 뺑 돌 필요는 없었다. 안전하게만 거닐면 되는 거지.
“숲에서…… 꽃을 보셨다고요.”
빅터가 에스티아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혹시 무슨 색이었는지요?”
그의 눈이 생각에 잠긴 듯 아래로 향했다. 에스티아는 숲에서 본 꽃을 떠올려 보았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푸른색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푸른색…….”
빅터의 눈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번쩍였다. 에스티아는 그 빛을 놓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영애의 추측이 제대로 맞은 거 같네요. 아니, 맞습니다.”
“아…….”
에스티아는 떨떠름한 목소리를 흘렸다. 후작의 표정이 너무 여유로워 보여서 그랬을까.
“그 꽃은 전설의 꽃 ‘히아신스’고, 영애께서 본 꽃은 히아신스 중에서 ‘펄 브릴리안트’라고 하는 꽃일 겁니다. 유독 찾기 힘든 꽃이죠.”
역시. 에스티아는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꽃을 본 그날, 전문 산악인에게 부탁하여 그 꽃을 찾아 달라 했지만 찾지 못했던 차였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마력이 깃든 꽃이었다.
“전에 누군가의 공격을 받고…… 제 마력이 분산되었습니다. 고생 끝에 겨우 알아낸 결과, 제 마력이 어떤 꽃들에 봉인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그게 하필 전설의 꽃 히아신스였죠.”
“그랬군요.”
에스티아가 나지막하게 답했다.
“근데 그 꽃을 영애께서 보셨군요. 오늘은 그것 때문에 오셨고요.”
“네, 왠지 제가 본 꽃을 찾고 계실 거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거래를 하러 왔어요.”
“거래요?”
후작의 눈빛에서 호기심이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만약 그 꽃을 찾으신다면 제가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전설의 꽃이라고 하셨잖아요. 한 번이라도 더 본 사람이 찾아야 더 빨리 찾으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죠. 그럼 영애께서 원하시는 건 뭡니까?”
빅터가 무릎 위로 두 손을 맞잡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상단을 후원해 주세요. 그럼 말씀하시는 꽃들 다 찾아보겠습니다.”
“제국에 있는 숲이란 숲은 다 찾아봐야 할 텐데요.”
“어차피 제가 할 일은 그건데요, 뭐.”
에스티아가 담담히 답했다. 후작이 그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물론 비가 오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살릴 수 있는 버지니아 약초가 아직 숲에 남아 있을지도 몰라요. 어차피 여러 숲을 조사해 봐야 해요.”
“네, 좋습니다.”
응? 이렇게 쉽게?
도통 알기 힘든 사람이라서 여러 경우의 수를 예상해 놨는데 이리 쉽게 승낙하는 경우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당장 수표를 쓰죠.”
“더 생각해 보지 않으셔도 되나요?”
“그만큼 저한테는 그 꽃을 찾는 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전 길드에서 마법을 연구하느라 찾을 시간이 부족해요. 그렇다고 그걸 밑의 사람한테 맡기는 것도 주저되는 일입니다.”
음. 에스티아는 여전히 꺼림칙했으나 애초에 모든 의문을 시원하게 해소하려고 온 것도 아니었다. 그 발판이 될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빅터는 안셀에게 바로 수표 종이를 가져올 것을 지시했다. 안셀이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응접실을 나갔다.
에스티아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차를 마셨다. 사실 일석이조로 여기에 온 것이었다. 상단에는 많은 관리비가 필요했지만 함부로 후원이나 투자를 받을 수 없었다. 시시각각 약초를 노리는 가문들이 어떻게 물을 흐릴지 몰랐다. 거기에 글레멘드 가문의 가신들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후작도 믿기 어려운 건 매한가지였다. 다만 그가 원하는 게 약초가 아닐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거래를 제안할 수 있었다.
“자, 얼마가 필요하십니까.”
안셀이 수표 종이를 가져오자 후작이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에스티아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가 원하는 건 약초가 아니었다.
바로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