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 걱정과 질투
그날의 일에 대해 물어보려던 에스티아는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물어본다고 해도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묻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에스티아는 라 빅터 오스카가 아직 자신을 원한다는 걸 확신했다. 그의 청혼은 가문과 가문 간의 약조가 아닌 오로지 그의 독단적인 행위였을 가능성이 컸다. 에스티아가 오스카 후작가를 찾아간 날, 본능적으로 든 직감에 따르면 그랬다.
정리하자면 후작과 대공은 그녀가 과거의 기억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다만 에스티아가 걱정하는 건 대공 쪽은 아니었다. 그 남자를 믿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남자가 정말 그녀에게 미련이 있다면 기억이 없다는 걸 이용해 봤자 얻는 게 없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대공은 어떨까.’
에스티아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안 그래도 물을 게 많았는데 대공과 더욱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대공은 그녀를 피하듯 에이커를 데리고 자신의 자택으로 돌아갔고, 상단에는 거의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황궁이 누구네 개집도 아니고 아무 때나 들락날락할 수도 없었다.
덕분에 오스카 후작과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물을 기회가 없었다.
에스티아는 결국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상단 사람들한테 부탁해서 소문을 내달라고 한 것이다. 그녀가 오스카 후작에게 후원을 받았다는걸.
“아주 아주 널리 널리 퍼트려 주세요.”
에스티아는 눈을 찡긋하며 상인들에게 부탁했다. 상인들은 무려 공녀인 데다가 자신들의 상단주가 아끼는 제자이니 군말 없이 따랐다. 그들이 느끼기에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기도 했다. 그저 입에서 입으로 옮기면 되는 일이니.
상인들이 적잖이 애쓰긴 했는지 소문은 반나절 만에 수도 전체로 쭉 퍼져 나갔다. 에스티아는 새삼 소문의 위력을 실감했다. 그동안 에스티아가 그 소문 덕에 얼마나 고생했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안 좋아졌지만, 이제 그것을 이용할 때였다.
에스티아는 홀짝 차를 마셨다. 그런 에스티아를 이안이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에스티아는 이안이 머물고 있는 별관에 와 있던 차였다.
“아가씨, 정말 확실한 건가요?”
이안의 표정은 마치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거야’ 하고 묻는 거 같았다. 에스티아는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 내 손바닥 안이지. 모든 게 내 계획대로 될 거야.”
“그렇게 흑막인 것처럼 말씀하지 마시고요…….”
이안이 이마를 짚었다.
“지난번에 보니까 내가 여기에 오는 걸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
“네?”
이안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 그게 무슨…….”
“이안, 대공 전하가 무서워?”
“아뇨!”
이안이 펄쩍 뛰었다. 그의 눈이 바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신분 떼고, 검으로만 대결하는 거라면 겨뤄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됐네.”
“아니.”
이안이 다시 얼굴을 굳히고는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다른 게 아니라 아가씨의 생각을 알 수가 없어서 그런 겁니다. 왜 그런 소문을 퍼트리신 겁니까? 위험한 일은 안 하신다면서요.”
에스티아는 일부러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안의 잔소리가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청혼했던 분한테 투자를 받은 것도 모자라 일부러 소문을 퍼트리시다니요.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지금 소문이 계속 퍼지게 되면…….”
한동안 이안의 잔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에스티아는 그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차를 홀짝거렸다. 결국 보다 못한 이안이 에스티아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에스티아는 그의 몸이 창을 가리자 곧바로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아가씨.”
“흐응흥흥.”
에스티아는 안 듣는 걸 티 내는 것처럼 콧노래를 불렀다. 그럴수록 이안의 속은 더 까맣게 타들어 갔다.
하는 수 없이 이안이 다시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그때 밖에서 마차 소리가 들렸다. 에스티아는 씨익 미소 지었다. 이안이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못 보던 마차입니다. 누구죠?”
“누구겠어.”
에스티아가 비장한 얼굴로 찻잔을 꼭 쥐었다. 다시 염려가 가득한 눈빛을 하던 이안은 문으로 향했다. 그런 그를 에스티아가 붙잡았다.
“웬트, 잠깐만. 다시 옆에 앉아 봐.”
“?”
이안은 쭈뼛쭈뼛 소파로 다가와 에스티아의 옆에 앉았다.
“이대로 있어.”
“……?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가씨?”
에스티아는 대답 대신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별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스티아는 허겁지겁 몸을 돌려 정자세로 앉았다. 웬트워스도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그녀를 따라 테이블을 마주 보고 앉았다.
큰 보폭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들렸다. 결국 참다못한 이안이 에스티아를 힐끔 봤다. 그녀가 눈빛으로 괜찮다는 신호를 주자 이안은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대공 전하……?”
잠시 멍을 때리던 이안은 그제야 에스티아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옆을 보았다.
이 주군이 진짜!
“……글레멘드 영애.”
호로록. 차를 마시던 에스티아는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뒤를 바라보았다.
“아, 대공 전하. 오셨군요.”
오셨군요? 이안은 기가 막혔다. 요즘에는 또 잠잠하다 싶으시더니 이제 다시 또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고 있는 거 같았다. 거의 절대적인 확률로 대공이 그녀를 공격할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의 예상을 빗나갔다. 대공은 아무 말도 없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안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던 때 에스티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저와 얘기할 마음이 생기셨군요.”
에스티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굉장히 비장한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대공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기서 말고 밖에서 얘기하시죠.”
대공이 한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 * *
대공은 무척 수수한 차림새로 왔다. 마차도 주로 남작이나 자작 가문에서 많이 쓰는 작은 마차를 타고 왔고 옷도 검은색 바지에 흰색 와이셔츠, 그리고 위에는 얇은 검은색 겉옷만 걸친 상태였다. 소문이 날까 일부러 그렇게 하고 온 듯했다.
두 사람은 글레멘드 저택에 있는 산책길을 걸었다. 여전히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산책하기 좋은 날은 아니었지만 요즘으로 따지자면 나쁜 날씨는 아니었다.
에스티아도 편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통이 큰 드레스였기 때문에 집에서도 편하게 입는 드레스였다. 원래는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고 했지만 대공이 만류했다. 꽤 초조한 표정이었다.
“영애.”
역시 더 불안한 사람이 말을 꺼내는 법이다. 에스티아는 여전히 앞에 시선을 둔 채로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
먼저 말하라고 했더니 오히려 입을 꾹 다문다. 보통 때 같으면 바로 우다다다 쏘아붙이며 한껏 비꼴 사람이 조용하다.
“하…….”
그러더니 이제는 한숨까지 내쉰다.
에스티아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는 걸음 속도를 높였다. 그러자 대공의 손이 그녀의 소매를 잡아 왔다.
보통 귀족 남녀 간에는 함부로 손을 대면 큰 결례였다. 하지만 이쪽은 무려 목까지 조른 입장이라 화를 내기도 멋쩍었다. 애초에 예의는 서로 간에 집어던진 지도 오래인데.
그래서 에스티아는 아무런 말없이 대공을 지긋이 응시했다. 대공이 시선을 피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제가 소문을 퍼트려서 화났습니까?”
“……처음에는 화났는데, 나중에는 감사했어요. 어쨌든 제가 전하를 죽일 뻔한 건 맞으니까.”
“영애.”
그녀의 말을 부정하듯 대공이 그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못 들은 체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소문 좀 이용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먼저 그렇게 해 주시기로 한 거니까. 대신 약초 거래에 관해서는, 기사단에게 적극 협조할게요. 그렇게 하면 사과가 될까요?”
아무리 자신의 의도가 아니라 해도 에스티아의 마음속에는 죄책감이 짙게 남아 있었다. 이 몸이 진짜 에스티아의 몸이고, 그녀의 마음으로 한 짓이라고 해도 그때 기억이 너무 생생했다. 손바닥에 짙게 남았던 대공의 촉감마저도.
그럼에도 이 사람을 향한 미움과 화가 남아 있어서 에스티아는 그를 끊어 내기로 결정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냉정하게 행동해야 했다. 다만 아예 이용한다고 하기에는 뭐해서 적정한 선에서 그에게 내밀 수 있는 사과 선물을 얘기한 것이었다.
대공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의 얼굴에도 낙심한 끼가 다분했다.
“마음을 없애시더니 이제는 거리를 두려고 하시는군요. 증명은 끝났습니다. 더 이상 그러지 않으셔도……!”
“제가.”
“…….”
“전하를 못 믿겠어서 계속하고 싶다면요?”
이 사람을 어떻게 믿나. 그동안 수없이 그녀의 마음에 비수를 꽂아 댄 사람인데. 이러고서는 나중에 그녀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지 누가 알겠는가. 에스티아는 뒤로 물러서며 대공을 냉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제게 마음이 없다 증명하라는 것도 그런 거였잖아요. 제가 그래놓고 말 바꿀까 봐 불안하니 못 믿겠어서 증명해 보라고. 전하도 그러신데 제가 어떻게 전하를 믿나요? 설령 전하를 믿는데도 전하께 가까이 다가갈 이유도 없지만요.”
그날의 기억이 에스티아의 양심을 콕콕 찔렀지만 에스티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가 자신에게 상처를 줬던 만큼 그가 상처받길 바랐다.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제가 먼저 하나 묻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예상대로 그의 표정이 더 침울해졌다.
“네, 물어보세요.”
대공이 에스티아가 말하기가 무섭게 한 걸음 다가왔다. 워낙 보폭이 큰 남자로 한 걸음만 내디뎠을 뿐인데 그녀의 팔 너비 정도 거리로 좁혀졌다.
“소문을 들었습니다. 오스카 후작한테서 ‘후원’을 받았다고요. 왜 하필 투자도 아니고 후원입니까?”
도대체 왜.
대공의 눈빛이 한없이 짙어졌다.
그 안에 든 건 명백한 걱정과 질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