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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55화 (56/141)

55화 - 염문설

에스티아는 사실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점점 ‘그녀’와 동화되어 가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또 다른 마음을 저버리고 있는 거고 큰 감정 소모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제발 좀 이제 나를 내버려 두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당신의 인생에서 나 하나 사라지는 게 그렇게 큰 고통이냐고. 나는 당신만 없으면 될 거 같은데.

에스티아는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찌 되었든 큰 실수를 한 뒤 만나는 거니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글레멘드 영애.”

대공이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에스티아를 불렀다. 에스티아는 마음의 준비를 하듯 숨을 훅 내뱉었다.

“좋아요, 제가 답할 수 있는 건 답해 드릴게요. 안 그래도 저도 묻고 싶은 거 많으니까.”

이번에는 대공이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으로 신중히 질문을 고르고 있는 거 같았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전에…… 오스카 후작과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말한 적이 있었죠.”

에스티아는 기억한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카 후작은 제국의 마법사 길드에 속해 있는 마법사입니다. 실력이 출중해서 제국에서 상당히 아끼는 인재이죠.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대공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묘하게 절박한 구석이 있었다. 에스티아는 잠잠히 그의 얘기를 들었다.

“마법사들에게 버지니아 약초가 필요한 이유는 마력을 보호해 주고 마력 일부를 몸으로 흡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정 기간 동안 먹지 않으면 위험해져요. 마법사들에겐 마나가 생명력이니까.”

“그래서요?”

무미건조한 에스티아의 음성에 대공이 잠시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근데 몇몇 마법사들로부터 오스카 후작이 오랜 시간 약초를 먹지 않아도 아무런 이상이 없는 거 같다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그들과 얘기해 본 결과, 오스카 후작이…… 흑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일 수도 있겠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흑마법이라면 대가가 있는 건가요?”

원작에서는 ‘흑마법’이라는 소재가 등장하지 않았다. 에스티아의 마음속으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워낙 극소수인지라 저도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일반 사람의 생명력을 대가로 마력을 만들어 낸다고 들었어요.”

욱신.

에스티아는 갑자기 느껴지는 두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 에스티아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그녀는 애써 냉정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래서 전하께서는 오스카 후작이 흑마법사일 수도 있으니 그와 가까이 지내지 말고, 후원도 받지 말라는 건가요?”

“수상한 정황이 포착된 사람입니다. 멀리해서 나쁠 건 없죠.”

“왜요?”

“……뭐가 말입니까?”

에스티아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대공이 당황하며 물었다.

“왜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나요? 흑마법이 불법이라서요? 아니면 상단이 위험해져서요? 아니면 전하께서도 자주 찾으시는 상단이니 전하한테 더러운 물이 튈까 봐 걱정되시나요?”

“영애…….”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자 대공이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래서 그 사람이 수상한 사람이라서 자세히 조사를 하셨었나 보네요. 나라를 향한 충성심 때문이겠지요. 설마 다른 사적인 이유 때문이겠어요?”

“…….”

“자, 그럼 말씀해 주세요. 조사가 완료가 되었는지. 오스카 후작은 정말 흑마법사인가요? 사람의 생명력을 대가로 흑마법을 부리는? 증거는 확실히 있으시고요?”

“흑마법은 증거를 잡기가 어렵습니다.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조사하고 있어요.”

조급한 듯 대공의 말이 빨라졌다. 에스티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조사가 끝난 다음에 확실해지면 말씀해 주시죠. 전하께서는 왜 항상 확실하진 않은 심증만 가지고 저한테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하시는지요?”

“에스티아…….”

“제가 말했죠, 이름 부르지 말라고.”

에스티아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대공이 좌절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래요, 글레멘드 영애. 설령 아직 결정적인 물증이 없다고 해도 위험할 수도 있는 사람, 미리 피하는 게 뭐가 나쁩니까?”

“위험하다고 확신도 못 하시면서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데요? 그러다가 아니면요? 스퀘일러 상단은 후원을 못 받게 되는 겁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 후원!”

“저보고 또, 스캔들에 휘말리라고요?”

‘스캔들’이라는 말에 대공이 멈칫했다. 에스티아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매정한 소문들을 떠올렸다.

“제가 평생을 그 소문들 때문에 괴로워한 거 아시면 그런 말씀 못 하시죠. 설령 그게 사실에 기반을 둔 소문이고, 거기에 살만 덧붙여진 거라고 해도 소문은 소문이에요. 말은, 사람도 죽여요.”

당신도 그 소문들과 똑같아. 에스티아는 그 말을 담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그 눈빛에 한마디를 보탰다.

“잘 아시잖아요. 저한테 직접 하셨으면서.”

“……!”

대공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자, 그럼 마지막 질문의 답을 드릴게요. 왜 투자가 아니라 후원을 받았냐고 하셨죠? 후원은 기부와 비슷한 맥락이지만 투자를 하게 되면 상단의 지분이 생겨요. 전 그걸 염려했고 염치 불고하고 후원이 가능한지 여쭈었습니다.”

“그래서 오스카 후작이 승낙한 겁니까?”

“네.”

에스티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대공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기혼 귀족 남녀면 모르지만, 영애와 오스카 후작은 아직 미혼입니다. 미혼 귀족 남성이 미혼 여성을 위해 후원을 한다는 건 충분히 오해의 여지가 있어요.”

“증명을 외치시던 분이 말씀을 ‘오해’하게 하시네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대공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모든 기운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반면에 에스티아의 목소리는 점점 날카로워졌다.

“제가 염문설에 휩싸이면 오히려 전하한테 좋은 거 아닌가요?”

“그게 무슨!”

대공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한순간에 잠겨 있던 눈이 분노로 타올랐다.

“영애가 다른 남자와 염문설이 돌면 제가 좋아한다고요? 제가요?”

“예! 사랑하는 여자가 있으시잖아요. 저를 싫어하시고요!”

“아…….”

대공의 어깨가 눈에 띌 정도로 들썩거렸다. 상황이 절대적으로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걸 이제라도 인정을 한 모양이었다.

“좋아한 적 없습니다, 단 한 번도.”

이번에는 에스티아가 움찔했다. 목적어를 이야기하지 않으니 말이 중의적으로 다가왔다.

“당신이 위험할까 봐 싫습니다. 당신이 애꿎은 스캔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도 보기 싫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한테는 전하의 말이 더 상처였으니까.”

대공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이제 자신의 감정을 아예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제가 괜한 스캔들 때문에 상처받을까 염려된다고요? 괜히 제 핑계 대지 마세요, 대공 전하. 아니면, 혹시 후작님께서 저한테 청혼한 것 때문에 신경 쓰이시나요?”

“당신…….”

대공의 표정에 담긴 건 분명한 노기였다. 에스티아는 대공의 매서운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이제는 상처받지 않겠노라 각오까지 했다.

그런데 대공이 꺼낸 말은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 * *

그렇다고 답하든 아니라고 답하든 어찌되었든 도발하려고 한 말이었다. 사실 그렇게 말하면 그동안 그가 떠보고 한 것과 똑같이 하는 거였지만 생각보다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에스티아는 다음부터는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던 참이었다.

근데 대공의 반응이 이상했다. 표정이 풀리더니 안색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분노가 확 사그라드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건 뭐지? 에스티아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당신…….”

대공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끝을 흐렸다.

이상하다. 분명 표정이 안 좋았는데. 뭔데 안심한 것처럼 보이는 거지?

에스티아의 눈동자가 대차게 흔들렸다. 지금 이 순간만은 웬만한 공포 영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서스펜스 스릴러였다.

“당신.”

에스티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전과 달리 에스티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정말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군요.”

“…….”

사실 일부러 소문을 낸 것도 그걸 오스카 후작한테 언제 들었고 어떻게 듣게 되었는지 듣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 그건 대공의 눈빛이 갑자기 희망이 들어차기 시작한 게 보여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어쩌면 정말로, 당신은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군요.”

“그게 무슨…….”

“그래서…… 자신의 감정도 잊어버린 거고.”

대공이 서서히 원래 페이스를 되찾기 시작했다. 이제 은은한 미소까지 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라, 이게 아닌데.’

에스티아는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후작의 후원을 받은 건 후작과 의도적으로 가까워져 뭐라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그것이 소문이 나면 대공이 찾아올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근데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는!’

그때는 그 말을 하고는 자리를 피하기에 들키면 곤란한 질문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걸까?

에스티아의 머릿속이 혼돈으로 가득 차던 때, 그가 에스티아를 향해 몸을 숙였다.

“말해 봐요, 에스티아.”

평소와는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가득 걸어 놓고서.

‘그니까 이름 부르지 말라고!’

과거에는 서로 이름 부르던 사이였던 건 확실한데 지금은 그런 사이는 아니지 않나?

혼란스러운 에스티아가 눈을 부릅뜨고 대공을 노려보는데 대공이 더 얼굴을 바짝 내밀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막막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간단하더라고요. 기억이 없어졌다면 돌리면 되지 않나. 당신이 내 목을 졸랐던 그날 밤, 그렇게 하는 게 더 현명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에스티아는 당혹스러웠다. 질문하려고 불렀는데 도리어 그가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 오스카 후작이 어떻게 알았는지 아느냐, 당신은 그걸 왜 듣게 되었느냐, 하고 물으려면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만약 정말로 이 사람이 메르헨을 사랑하지 않고 에스티아에게 미련을 갖고 있다면, 또다시 이런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왜 대공은 메르헨과 연인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가.

문제는 설령 메르헨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해도 그게 곧 에스티아를 사랑한다는 말로 연결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태까지 그가 했던 매정한 말들을 생각해 본다면.

머리를 부여잡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대놓고 그러자니 대공의 얼굴이 너무 코앞에 있어서 그럴 수도 없었다.

일단 물러나야했다. 그게 맞았다. 에스티아는 결국 한발 물러서는 걸 택했다.

하지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던 에스티아의 등에 뭔가가 닿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뻗은 대공의 팔이 보았다. 대공이 한쪽 팔로 그녀의 어깨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에스티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왜 피하는 겁니까. 일부러 날 캐물으려고 더 소문낸 거면서.”

“으…….”

정곡을 찔린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흘렸다. 녹색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 소문이 퍼지면 내가 눈이 뒤집힐 거라는 걸 알고, 내가 찾아오게끔 하려고 그런 거잖아요. 그 말인즉슨, 그날 밤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다는 거고.”

“그, 그건.”

누가 남주 아니랄까 봐. 뒤집히는 와중에도 그걸 다 머릿속으로 정리했나 보다. 에스티아는 이를 으득 갈았다.

“그게 아니면 그냥 내가 보고 싶어서 그런 건가?”

“하.”

에스티아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쳤다.

“하늘에 대고 맹세하건데, 전 전하 안 보고 싶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과연 그럴까?”

대공의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초원을 담아 놓은 눈이 그녀를 가득 담고 있었고, 붉은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럼 말해 봐요. 기억을 잃지 않았는데 내가 보고 싶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기억을 잃어서 그걸 캐물으려고 그런 건지.”

이런 게 그 말로만 듣던 사면초가인 모양이다. 저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공을 너무 얕잡아 봤던 거 같다. 어찌 되었든 설정부터 대공작에다가 황실 기사단장인데, 소설에서의 위치도 무려 남주인공이었다.

더웠다. 습기 때문에 그런지 땀도 나는 거 같다.

머리가 잠시 오작동을 일으켰지만 에스티아는 애써 머리를 다시 굴려 보았다. 그러자 평소 레퍼토리를 응용하면 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둘 다 아닌 경우는 생각 안 해 보셨나 봅니다.”

에스티아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공이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제 입지를 다지고 싶었을 뿐입니다. 제 능력으로 귀족의 후원을 받았다고.”

“당신에게 청혼을 했던 사람에게 말입니까?”

대공의 눈빛이 다시 매서워졌다. 이놈의 펜던트 눈빛!

“네, 오스카 후작은 마법사 길드에 속해 있을뿐더러 오랫동안 사교계에서 저명했던 인물입니다. 그분의 후원을 받으면 그만큼 사람들이 알아줄 거고, 제 입지도 안정적으로 굳어지겠죠.”

“오히려 위태로워지지 않겠습니까?”

그녀를 안은 대공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그와 거리는 겨우 한 뼘 정도였다.

“위태로워질지, 더 높아질지는 두고 보시죠. 어차피 저는, 대공 전하한테서 벗어나기만 하면 되니까. 처음부터 그러려고 시작한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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