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 당신이 좀 더 솔직했어도
“…….”
대공의 팔이 움찔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가 안은 손으로 그녀의 겉옷을 움켜잡았다.
“전 상관없어요. 전하가 누굴 사랑하시든. 근데 제가 전하를 사랑하지 않아서 더는 전하와 엮이지 않게 머리 좀 쓰려고요.”
대공이 다시 여유를 잃는 게 눈에 보이자 에스티아는 통쾌했다.
“아직 제대로 대화 나눌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으니 생각 정리하고 계시겠어요? 시간 될 때 제가 전하를 불러서 제대로 캐물을 테니까. 아니면 지금 모든 걸 다 털어놓을 준비가 되셨나요?”
“그건…….”
대공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더니 말끝을 흐렸다. 에스티아는 확신했다. 이 남자는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이곳에 온 게 아니라 마음이 시키는 대로 충동적으로 움직인 거라는걸.
어쩌면 오늘은 그가 숨겨진 진실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유도만 하고,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는 게 나을 거 같았다. 그 정도로 대공은 다시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직 얘기할 준비가 안 되신 거 같은데 다음에 다시 만나죠. 조심히 가세요, 전하.”
그런 의미로 일단 오늘은 작별이었다. 에스티아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잠깐만요!”
그때 대공의 음성이 다급하게 에스티아를 붙잡았다. 에스티아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몸을 틀었다.
“오스카 후작이…….”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밑을 보니 주먹까지 꽉 쥐고 있었다.
“어느 날 바일 가로 찾아왔습니다. 찾아와서 대뜸 하는 말이 자신이 흑마법을 써서 시간을 되돌렸고 그 부작용으로 영애가 기억을 잃었을 거라고 했습니다.”
“예?”
시간을 되돌렸다고? 예상치 못한 말에 에스티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동시에 소문을 내어 그가 여기로 오게끔 한 목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제가 아직 영애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저를 도발하려고 한 말일 거라고요. 그래도 마음이 불안했죠. 그리고 그자는 제 마음을 알았는지 이걸 당신한테 얘기했다가는 안 좋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 미친 후작이 도대체 저 남자한테 무슨 소리를 지껄인 거지? 당혹감으로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냐고 계속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았습니다. 믿든 말든 제 자유라고요.”
충격적인 얘기였지만 에스티아의 마음은 반대로 점점 차분해졌다. 대공은 그 어느 때보다도 솔직한 상태였다.
“농락하는 거냐고 하니 그저 웃더군요. 단지, 한 가지 더 말해 줄 순 있는 건 영애가 기억을 잃어, 마음도 잃었을 거라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나를 모욕하면서 내 마음을 떠본 거였군요.”
“…….”
에스티아의 입술 사이로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전하께서 처음부터 솔직하게, 오스카 후작한테 이런 말을 들었는데 사실이냐고 물었어도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거예요.”
“…….”
“당신의 헛된 자존심 때문에 여기까지 와 버린 거예요. 당신은 오스카 후작을 미워했고 그의 말을 믿기 싫었겠죠. 동시에 내가 원망스러워서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 다가오기 싫었고.”
말하면서 왠지 모를 씁쓸함이 에스티아의 마음을 덮쳤다. 진짜 에스티아가 상처 입기라도 한 걸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가 당신한테 진짜 못된 짓 했나 봐요. 자, 그게 다예요? 오스카 후작하고 한 얘기는.”
“네, 그게 답니다.”
대공이 떨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한테 얼마나 나쁜 짓을 해서 당신이 나한테 그렇게 모욕적으로 굴었는지 물어야 하는데, 지금 그럴 힘이 없어요.”
에스티아의 눈빛이 공허했다. 그걸 본 대공이 허겁지겁 말을 덧붙였다.
“또 얘기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약초로 우리는 자주 만날 수밖에 없고, 그러니까…….”
대공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 갔다. 소중한 무언가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어린애처럼.
“나머지 얘기는 우리 나중에 또 해요.”
에스티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대공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여전히 듣고 싶은 얘기가 있다는걸.
* * *
다시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난번에는 충동적으로 어리석은 행동을 할 뻔했지만 이번에는 상단 소속 전문 산악인들에게 약초를 찾아 달라 부탁했다. 에스티아는 오스카 후작에게 후원받은 돈으로 상인들에게 고급 장비를 지원했다. 덕분에 인명 피해는 1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에스티아는 상인들이 올라간 산 근처에 의원들을 배치했다. 혹시라도 상인들이 다쳤을 때 바로 치료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덕분에 상인들의 사기도 자연스럽게 상승했다. 웬만큼 큰 상단도 쓰지 못하는 물품을 지급받은 데다가 자신들이 다칠 경우를 염려하여 투자자가 의료 지원까지 했다. 게다가 그 엄격한 스퀘일러 상단주가 아끼는 제자라지 않은가. 상인들은 이제 에스티아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수확이 꽤 괜찮습니다, 아가씨.”
에스티아가 있는 응접실로 찾아온 상인이 그녀에게 보고했다.
“비록 크기가 많이 작고 많이 상하긴 했지만 잘하면 다시 살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결과가 나오면 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네, 고생했어요, 제임스.”
“아닙니다, 아가씨. 푹 쉬십시오.”
제임스가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고 몸을 돌렸다. 그런 그를 에스티아가 붙잡았다.
“잠깐만요, 제임스! 이런 날씨에 고생했는데 간단하게라도 먹고 가요.”
“예?”
다시 몸을 튼 제임스가 눈을 크게 떴다.
“식당에 간단하게 식사를 차려 놓았어요. 다른 상인들 몫까지 챙겨 놓았으니까 갈 때는 마차와 함께 돌아가면 돼요.”
“아가씨…….”
그의 눈동자가 울듯이 촉촉했다. 에스티아는 대수롭지 않게 하는 거라도 그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까지 거래했던 어떤 귀족도 이런 호의를 베푼 적이 없었다.
바로 그게 상인들이 에스티아를 따르게 된 또 다른 이유였다. 그녀는 언제나 공손하고 예의 발랐으며, 상인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자주 호의를 베풀고는 했다. 게다가 상인으로서의 재능도 있으니 가히 믿을 만한 상사였다.
제임스는 사실 진작 생각을 바꿨다. 소문은 말했다. 사랑에 미쳐 패악질을 부리는 미친 악녀니 뭐니. 설령 그녀가 그랬다고는 해도 그는 이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진실만 믿기로 다짐했다.
그는 다시 한번 공손하게 에스티에게 인사했다. 에스티아가 환하게 인사를 하고 나서야 제임스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섰다. 응접실에는 다시 정작만 감돌았다.
에스티아는 왠지 모를 뿌듯함과 함께 초조함을 느꼈다. 요즘 악몽을 꾸는 빈도수가 잦아지고 있었다. 게다가 점점 에스티아에게 동화되고 있는지 시시때때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정말 큰 문제는 그 불안함을 느낄 때마다 그 싸가지 없는 대공 전하를 찾아가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에스티아는 그 사실이 못내 못마땅스러웠다.
에스티아는 깔끔하게 틀어 올린 머리를 쥐어뜯었다. 머리가 부스스해졌다.
이제야 겨우 외부 상황이 그녀의 뜻대로 굴러가는데 속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그를 놓을 수 없다고 외치는 것처럼. 밤마다 꾸는 꿈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즐겁게 웃으며 놀다가 끝에는 저주로 끝나는 꿈.
‘네가 끔찍해.’
꿈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 다섯 글자는 잊을 수 없으리라. 마치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옭아맸으니까.
그 사람한테도 그런 낙인이 있는 걸까? 그래서 그렇게 애매한 태도로 그녀를 계속 괴롭혔던 걸까?
에스티아는 대공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오스카 후작이 대공에게 그녀가 과거의 기억이 없다고 말했고, 대공은 그 말을 부정했다.
그러면서도 그 말이 사실인지 그녀를 시험하려고 했다. 경멸하고 조롱했다.
마음이 울렁거렸다. 아무래도 이렇게 되다가는 자신의 마음이 위험해질 거 같았다. 어차피 대공과 메르헨의 약혼을 지지하기로 한 터였다.
여론이 완전히 대공의 약혼녀로 ‘메르헨 셰린포드’를 꼽게 되는 것. 그런 의미로 아직 해야 할 게 남았다. 에스티아는 응접실에 달린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곧바로 메리가 들어왔다.
“네, 아가씨.”
“메리, 혹시 주변에 알고 있는 귀족 영애 있어?”
“귀족 영애요?”
메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생각에 잠긴 듯했다. 에스티아는 차분히 메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곳에서 사용인으로 일하고 있긴 하지만 원래 메리는 엄연히 귀족 영애 출신이었다. 그렇다면 아는 이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아!”
메리가 짝 손뼉을 쳤다.
“네, 하녀가 되기 전에 알게 된 영애가 몇 분 계십니다. 다행히 지금까지도 연락이 되고 있고요. 근데 그건 왜요, 아가씨?”
“메리아나.”
에스티아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메리가 에스티아를 따라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가씨.”
“도와줘야 할 게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