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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57화 (58/141)

57화 - 넌 반드시

메르헨은 응접실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응접실에는 그녀 혼자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찻잔을 받침대에 내려놓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체스넛 백작 영애는 메르헨의 기분이 굉장히 언짢다는 걸 바로 눈치챘다.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만만한 사람 앞에 앉혀 놓는 건 메르헨의 습관이었다. 그녀는 이럴 때마다 억지로 메르헨의 기분을 달래려 하기보다는 가만히 있는 게 더 현명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게 뭔 일이야.’

체스넛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안 그래도 성정이 예민한 메르헨인데 해괴한 소문까지 돌아 버렸다. 무려 그 고고한 대공 전하께서 자해를 했다지 않은가. 사실 체스넛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딱히 오래 생각해 보지 않아도 대공은 프라이드가 높은 사람이었다. 수식어만 해도 몇 개인가. 바일 대공작, 황실 기사단장, 황제의 최측근. 그런 사람이 신관도 예측하지 못한 일 때문에 손해를 봤다고 그런 행동을 했다.

‘게다가 하필 이번 버지니아 약초 재배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에스티아 글레멘드.’

즉 대공은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던 약혼녀 후보를 무시하다가 그 꼴을 당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체스넛은 고개를 저었다.

체스넛도 어쨌든 백작 영애였으니 그녀의 아버지도 대공의 약혼녀로 자신의 딸을 밀고 싶어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에스티아가 체스넛을 찾아왔고 한판 싸움을 벌였었다.

하지만 체스넛의 가문보다 더 쟁쟁한 가문들이 존재했다. 체스넛은 곧 순위에서 밀려났고 그 이후로는 에스티아를 볼 기회가 없었다. 다행히 그녀는 예전 일을 마음에 담아 두는 편도 아니었고 곧 에스티아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반면에 메르헨은 달랐다. 체스넛과 메르헨은 어렸을 때부터 봐 온 ‘친우’였다. 사실은 거의 시녀 취급을 받고 있었지만.

그런 의미로 에스티아보다 메르헨이 체스넛을 더 불안하게 했다. 적어도 에스티아는 투명했으니까.

‘1년 후에는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지.’

그 일이 있은 후, 우연히 티 파티에서 만났을 때 에스티아는 잠시 멈춰 서서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체스넛이 채 대답하기도 전에 에스티아는 걸음을 옮겨 버렸지만 체스넛은 여전히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체스넛이 갖고 있는 에스티아에 대한 기억은 그리 나쁜 기억이 아니었다. 그녀는 ‘고맙다’는 말보다 ‘미안하다’는 말이 더 말하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시간이 꽤 흐르면 상대방도 잊었으려니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악녀라고 손가락질받는 에스티아는 늘 혼자였다. 어쭙잖은 동정심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들었던 사과 때문인지 체스넛은 마음이 안 좋았다. 그렇다고 에스티아에게 다다갈 수도 없었다. 메르헨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주변을 주시하고 있었으니까.

대신 영애들이 에스티아를 욕할 때 체스넛은 침묵을 지켰다. 그것이 자신이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이라고 생각했다.

“체스넛.”

그때 그녀의 상념을 깨고 메르헨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네, 메르헨.”

체스넛이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메르헨은 여전히 생각에 깊이 잠긴 채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스스로 목을 졸라 본 적 있어요?”

“…….”

역시 메르헨이었다. 그녀가 한참 생각하다가 하는 질문 중에는 평범한 질문이 없었다.

“아뇨, 없습니다.”

이럴 때는 역시 말을 아끼는 게 상책이다. 괜히 이런저런 말을 덧붙였다가 메르헨의 심기를 건드릴지도 몰랐다.

“그렇죠, 역시. 정상인이라면 자신의 목을 조르는 미친 짓은 하지 않죠.”

“…….”

사실상 체스넛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거의 혼잣말이었다. 체스넛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두 손을 무릎 위로 모았다.

“보통은 그렇게 안 하죠. 애초에 아무리 심적 고통이 심했다고 해서 목을 조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내 생각은 안 했을까? 당신이 다치면 내가 힘들 생각을 했었어야지.”

메르헨이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체스넛은 내심 그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가끔 지독한 불안감을 느끼게 되면 소중한 사람들도 생각이 안 날 때가 있다고. 하지만 그러다가는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테니 체스넛은 그 말을 삼켰다.

대신 이걸 물어야 하는 타이밍인 듯하여 천천히 말을 꺼냈다.

“대공 전하한테서 편지는 오지 않았나요?”

“오긴 왔죠. 상태가 심하진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요?”

“그게 다예요. 훈련 때문에 바쁘지만 곧 찾아가겠다고. 그 정도죠.”

찻잔을 쥔 메르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체스넛은 문득 저 찻잔이 자신에게 날아오지 않을까 염려됐다. 물론 한참 전의 일이지만 또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메르헨이 정도만 지나치지 않는다면 메르헨이 아예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평소에는 팔불출이다 할 정도로 메르헨을 자주 찾던 대공이 요새 발길이 뚝 끊겼다. 처음에는 정말 메르헨이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건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다른 이유가 있는 거 같다.

그 이유가 혹시…….

‘에이, 아니야, 그럴 리가.’

대공은 한 번 끊어 낸 사람은 다시 곁에 두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2년 넘게 싫어하던 사람을 갑자기 마음에 품을 리가.

‘근데 정말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일까?’

그러고 보니 2년 전만 해도 대공과 에스티아의 관계는…….

“아가씨!”

체스넛의 기억이 2년 전 과거로 향하려던 때 메르헨의 하녀 러스가 노크를 하고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말해, 러스. 다만 별거 아닌데 갑자기 들어온 거면, 알지?”

저렇게 말하는데 어쩜 그렇게 소문이 안 나는지.

러스의 표정은 역시나 울상이 되었다.

“그게, 어니스트 아가씨가 말하길 글레멘드 아가씨가 자신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다 메르헨 아가씨 덕분이라고 했대요. 힘들 때면 언제나 옆에 있어 주셨다고요.”

응?

체스넛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에스티아 글레멘드가?

어니스트라면 셰린포드 가신인 자작 가문이다. 헤일리 어니스트는 메르헨의 말이라면 뭐든지 하는 영애였다.

근데 어니스트가 그런 말을 전해 왔다고?

체스넛은 혼란스러웠다. 넘쳐나는 소문들이 누군가 짜놓은 큰 판인 거 같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문제는 그 누군가가 ‘한 사람’이 아닌 거 같다는 것이다.

* * *

“메리, 도와줘야 할 게 있어.”

그 말을 서두로 꺼낸 에스티아가 메리에게 한 부탁은 바로 영애들 사이에 소문을 내 달라는 것이었다. 그 소문의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았다.

에스티아는 메르헨을 괴롭게 했다. 이루지 못할 짝사랑으로 애꿎은 사람만 고통스럽게 했다. 하지만 메르헨은 언제나 에스티아에게 친절했고 그녀의 친절함이 자신의 마음을 녹였다. 결국 에스티아는 에버하르트 바일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그 이후로 에스티아는 메르헨에게 기대기 시작했고 메르헨은 에스티아의 모든 고민을 참고 들어주었다. 사실 에스티아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메르헨 덕분이다. 그녀가 너그러이 에스티아를 용서해 주고 그녀의 행보를 응원해 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크던 메리의 눈이 더 커졌다. 에스티아는 담담히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나는 이제 메르헨과 바일 대공 전하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축복한다고. 그렇게 영애들 사이에 소문 좀 내줘, 메리아나.”

“괜……찮으시겠어요?”

에스티아가 이미 대공을 향한 마음을 접었다고 해도 메리는 에스티아가 걱정됐다. 에스티아는 그런 메리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부드럽게 웃었다.

“괜찮아, 메리. 이제 정말 내 인생을 살고 싶어서 그래.”

메리는 에스티아의 눈빛을 보고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새삼 다시 체감했다. 메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귀족들이 제일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비밀’인데, 제일 안 지키는 것도 ‘비밀’이거든요.”

“그럼 부탁해, 메리.”

메리는 고개를 숙이고는 재빠르게 응접실을 나섰다. 에스티아는 후 하고 숨을 뱉었다. 그 바보 같은 대공이 또 애꿎은 착각은 하지 말아야 할 텐데 말이다.

에스티아는 가능하면 최대한 대공과 둘이 있는 순간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그가 정말로 자신을 놔두고 그렇게 다정히 이름을 부르던 피앙세랑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에스티아는 식은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조금이라도 더 일을 해야 했다. 그 사람한테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안 그래도 요즘 더 자주 꿈을 꾸고 있었다. 대개 그 남자가 나오는 꿈이었다. 이런 추억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소소한 추억들이 꿈을 통해 찾아왔다.

사실 꿈만이라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자주 찾아오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불안감, 그리고 머릿속을 울리는 환청들. 그것들은 열이면 열, 그 바보 같은 대공을 찾아가라는 외침이었다.

그 목소리는 때로는 그가 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고, 자신을 배신했으니 어서 가서 그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으라고 절규하기도 했다.

그러니 에스티아는 더욱 대공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진짜 에스티아의 마음에 끌려 그 남자와 다시 얽히고 또 괴로움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에스티아를 괴롭히던 그 가벼운 입들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간사한 혀는 언제든 소문에 민감한 편이니.

* * *

‘에스티아!’

‘에버하르트!’

그녀가 웃으면서 그에게로 뛰어왔다. 작은 몸이 그의 품 안에 꼭 안겼다. 그는 그녀를 꽈악 안아 주었다. 그녀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따뜻해질 수 있도록, 자신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도록.

이제 그에게는 그녀밖에 남지 않았다. 온전히 무너지고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가지 마, 에스티아.’

갑자기 불안해진 마음에 그녀에게 그렇게 말해버렸다.

‘내가 어딜 가.’

그녀가 까르르 웃으며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내 옆에만 있어. 그래야 해, 에스티아.’

‘그럴 거야, 앞으로도 영원히.’

약속했으니까.

에버하르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약속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의 옆에 있겠다고. 오직 한 사람만 마음속에 담겠노라고.

속은 불안하다는 듯 타오르는데 몸은 차갑게 식어갔다. 동시에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면서 속이 메스꺼워졌다. 불안할 때마다 튀어나오려는 증상이었다. 이제는 사라졌다고 생각한 이 증상은 최근 들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에버하르트는 두 손을 꼬옥 맞잡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약속은 기억해야 해.”

에스티아, 넌 반드시

그래야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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