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 작전 (1)
그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옷을 입는 거나 책상을 청소하는 것 정도는 그가 알아서 했다. 그걸 가지고 행간에서는 대공이 자신의 사용인들이 감히 그의 귀한 물건에 손을 대는 걸 싫어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나중에는 납득했다. 세상 사람들을 그런 사람이겠거니 하고 인정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사실 그가 그렇게 예민한 건 그만큼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건강하셨을 적에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다.
-에버, 그 누구도 쉽게 믿어선 안 돼. 누가 어떻게 널 해칠지 몰라.
실제로 살면서 많은 암실 위험에 시달렸다. 그의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지시더니 열흘 만에 돌아가셨을뿐더러, 그의 사촌은 마차 전복 사고로 사망했다. 모두 그가 후계자로 정식으로 인정받았을 때였다.
그는 그게 자신에게 보내는 경고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가 황실 기사단장이 된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그 과정에도 수많은 소문이 따라붙었다. 그렇게 힘이 탁 풀려 주저앉노라면 그녀가 평소처럼 총총 다가오며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멋져, 에버하르트. 힘들 텐데 그렇게 맞서는 거 너무 멋있어. 그래도 항상 그렇게 고고하지 않아도 돼. 나는 너한테 멋진 모습만 바라는 게 아니니까.
세상에 이렇게 어여쁜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그녀는 타인의 불행을 안줏거리로 삼지 않았다. 누군가 비밀로 해 달라고 하면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에스티아는 사교계 유명 인사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가 그녀를 버려 정신을 놓기 전까지는.
너무 맑았던 사람이어서 그랬을까. 너무 맑아서 검은 잉크 한 방울도 그녀에게도 너무나 큰 고통이었던 걸까.
에버하르트는 책상 위로 두 손을 꽉 맞잡았다. 강해 보였기에 오히려 여린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 모든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까. 놓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지금 조급함으로 따지자면 그녀의 드레스 자락이라도 붙잡고 애걸복걸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만큼 다시 한번 그녀에게 닿고 싶었다. 혹시라도 다른 이가 그녀에게 닿을까 봐 매시간, 매 순간 속이 타들어 갔다.
손을 붙잡든 다리에 매달리든 그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다시 기억해 보라고. 그럼 나도 이 모든 계획을 어떻게든 없었던 걸로 만들 테니까. 2년 전처럼 나를,
버리지 말라고.
에버하르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가신 회의가 30분 후에 있을 예정이었지만 그는 죽을 만큼 참석하기 싫었다. 주제는 뻔했다. 분명 방금 들어온 소문을 듣고 메르헨 셰린포드와 약혼을 하라고 들들 볶기 위해 불렀을 터였다.
-걱정하지 마, 에버. 내가 어떻게든 당신이 나한테 장가오게 만들 테니까!
앳된 에스티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어제 에스티아의 말이 겹쳐 들렸다.
-전 상관없어요. 전하가 누굴 사랑하시든. 근데 제가 전하를 사랑하지 않아서 더는 전하와 엮이지 않게 머리 좀 쓰려고요.
에버하르트는 숨이 다시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가신 회의 30분 앞두고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제발, 제발 지금은 안 돼.’
아무래도 근래에 스퀘일러 상단에 가 봐야 할 거 같았다. 어차피 약이 거의 떨어지고 있던 참이었고 무엇보다 그곳이 아니면 에스티아와 마주칠 일이 없어 하루라도 더 자주 가야 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상단 일에 애착을 갖고 있으니 자주 방문할 것이다. 게다가 공적으로 마주칠 때는 언제든 환영이라고 했으니 그렇게라도 봐야 했다.
‘안 그러면 미칠 거 같아.’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가 어디론가 사라질 거 같았다.
“아니야, 넌 약속했어. 약속했어, 에스티아.”
그는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내달리는 소리였다.
* * *
가신 회의는 3시 정각이었다. 대공은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다. 1분이라도 늦으면 약속 시간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가신들은 그런 대공의 고지식함이 불편했지만 적어도 꼼꼼하고 세세한 일처리와 공정한 판단력을 가졌기에 딱히 이를 지적하진 않았다.
그런데 지금 벌써 3시 10분이었다. 가신들은 대공이 10분 늦었다고 그를 나무라는 게 아니었다. 그 군인같이 철두철미했던 사람이 거의 처음으로 시간을 어긴 것에 놀라고 있었다. 그는 무려 황실 기사단장이었고 시간 준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딱 한 번, 2년 전에 시간을 못 지킨 적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린지오 백작은 역시 하나의 가능성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대공이 가신 회의 이전에 자신에게 했던 명령, 그리고 그의 과거를 생각해 보면 원인은 딱 하나였다.
‘이런 거 보면 참 순정파신데.’
린지오 백작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분명 예기치 않게 관계가 어긋난 건데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대공에게 몇 번이나 조심스레 물어보았는데도 그는 작은 힌트조차 주지 않았다.
다만 린지오 백작은 하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원인은 에스티아 글레멘드에게 있으며 그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혼자서 끙끙 앓으시다가 더 병나실 텐데.’
대공은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한 번 마음에 들이는 사람에게는 모든 걸 퍼주었다. 그는 그걸 옆에서 바로 지켜보았고 대공이 차가운 만큼 자신의 사람에게는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 만약 그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다면.’
그는 잠시 2년 전을 떠올렸다. 아무리 저택으로 연락해도 답이 없던 대공이 6개월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백작,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쉽게 변할 수 있는 걸까?
그는 정확히 누구라고 얘기하진 않았지만 백작은 그 사람이 에스티아를 말하는 거라고 눈치챘다.
-혹시 글레멘드 공작 영애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린지…….
그가 울먹이며 백작의 어깨에 기댔다. 내려다보는 그의 어깨가 들썩였다.
-에스티아가 날 버렸어. 나도 버리고 싶은데 그게 안 돼. 에스티아가 위험해질까 봐 겁나고 무서워. 에스티아가 날 잊을까 봐 무서워.
-영애가 위험해진다니요. 누가 영애를 위협하고 있습니까?
대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이후 대공은 메르헨과 자주 만나기 시작했지만 딱 잘라 내진 못했다. 백작은 막연히 대공이 메르헨을 만나는 게 에스티아가 위험해지지 않고 그를 잊지 않게 만드는 방법인가, 하고 생각했다. 물론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근데 그 사람이 이제는 정말 자신을 저버리려고 한다면. 2년 전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한 게 아니다.
린지오 백작은 딱 10분만 더 기다려 보고 대공의 집무실로 가기로 결정했다. 마냥 탱자탱자 기다리다가는 무슨 사달이라도 날까 겁났다. 그 생각을 하니 10분이라는 시간도 길게 느껴졌다.
결국 린지오 백작이 일어서려던 그때 육중한 문이 열리고 대공이 안으로 들어왔다.
모든 가신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공에게 인사를 올렸다. 린지오 백작도 다른 가신들을 따라 인사를 하며 대공의 안색을 살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대공의 안색이 파리했다.
며칠 밤 새워 전쟁해도 안색 한 번 안 변하던 사람이 눈 밑에는 검은 그늘이 졌고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주 티를 내시는구먼.’
린지오 백작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이건 누가 그냥 지나가면서 봐도 알 거 같았다.
‘아이고, 대공 전하.’
저 상태로 보아서는 가신 회의를 할 게 아니라 의원을 불러와야 할 거 같은데.
“앉으시죠.”
대공의 담담한 목소리가 가신들에게 향했다. 린지오 백작은 가신들을 따라 착석했다.
‘앉기는 무슨. 저 정도면 누워야겠구먼.’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래 봬도 어렸을 적부터 대공을 따르던 가신이었다. 저 정도까지 안 좋아졌을 정도면 정신력이 흔들려도 아주 크게 흔들린 것이다.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하죠. 왜 저를 부르셨습니까?”
다행히 얼굴 상태와는 다르게 목소리는 지극히 냉정했다. 가신들은 힐끔힐끔 서로 눈치를 보았다. 한 번 말실수하면 봐주질 않는 사람이니 누가 먼저 총대 메주길 바라고 있으리라.
“제가 먼저 말씀 올리겠습니다, 대공 전하.”
버그 후작이었다. 대공이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살짝 들었다.
“전하께서 아시다시피 요 근래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에스티아 글레멘드 공작 영애가 진심으로 전하와 메르헨 셰린 포드 공작 영애의 약혼을 지지하고 있다고요.”
“그렇군요.”
대공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린지오 백작이 보기에는 저게 최선의 방어인 거 같았다. 버그 후작은 이를 긍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황실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하지만 어찌 되었든 글레멘드 공작 영애는 상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남작이나 자작 영애도 아니고 공작 영애가 상단에 몸을 담고 있다니요. 상단을 소유하고 있다면 모를까.”
가신 중에는 남작이나 자작도 많았지만 버그 후작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만약 그가 그렇게 세심한 사람이었으면 이 회의를 소집하지도 않았다.
“본인도 그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 줄 아니까 결국 전하와 셰린포드 영애를 지지하게 된 거겠죠. 이로써 강력한 후보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대공 전하.”
결국 요지는 에스티아 글레멘드가 후보에서 빠졌으니 조금이라도 빨리 메르헨 셰린포드와 약혼을 올리라는 말이었다. 하기야 대공의 혼기가 꽉 찼는데 아직까지도 대공비가 없으니 가신들이 애가 탈 만했다. 대가 끊겨 버리면 대공의 사촌에 팔촌까지 이 자리를 노릴 거고 그러면 아주 개판이 될 테니.
버그 후작이 빨리 대답하라는 듯 강렬한 눈빛으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대답 없이 린지오 백작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작전을 시작하라는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