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 작전 (2)
“셰린포드 가문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후작에서 공작 가문으로 지위가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나라를 수호한 가문이오, 그 가문의 영애인 메르헨 셰린포드 공작 영애 또한 성품이 선하기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버그 후작이 열변을 토했다. 누가 보면 셰린포드 가문의 돈이라도 받고 하는 거 같았다.
“반면에 에스티아 글레멘드 공작 영애는…… 전하도 아시다시피 행적이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소문도 안 좋고요. 전하를 연모해서 다른 귀족 영애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것도 물론 지금은 천한 일까지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래 고민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건 모든 가신들이 동의하는 말입니까?”
린지오 백작이 버그 후작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린지오 백작.”
“말 그대로입니다. 글레멘드 영애의 과거 행적이 어찌 되었든 지금은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공작가의 차기 후계자입니다. 애초에 이렇게 우리끼리 왈가왈부하는 것도 웃기지만 마냥 소문만 믿고 판단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버그 후작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감히 너 따위가 내 말에 반박하느냐는 표정이었다.
“그게 그냥 소문입니까? 글레멘드 영애가 다른 영애에게 와인을 뿌리는 걸 내 두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애초에 그런 행적 때문이 아니더라도 상인 일을 하고 있는 귀족 영애를 대공비로 맞이하다니요. 린지오 백작은 귀족 사회를 모릅니까?”
버그 후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패거리들이 린지오 백작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무례하고 천박했다.
린지오 백작은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그가 침착하게 최근 에스티아의 공적을 얘기하자 미리 말을 맞춘 다른 가신들이 그를 거들었다. 양상은 자연스레 대공비로 에스티아를 지지하는 파와 메르헨을 지지하는 파로 나뉘었다.
대공은 그들이 얘기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버그 후작을 화나게 만든 건 저 어린 백작 놈보다도 이 상황을 수수방관하고 있는 대공이었다. 평소 메르헨이라면 발 벗고 나서던 대공이 오늘따라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결국 버그 후작은 마지막 패를 꺼내 들었다.
“제가 최근에 첩보원으로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로셸 글레멘드 공작이 자택을 비운 이유는 바로 글레멘드 영애 때문이라는군요.”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침착하던 린지오 백작이 그 말에 당황하며 물었다. 버그 후작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자세한 건 이 자리에서 말씀은 못 드리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글레멘드 공작이 차기 후계자를 바꿀 예정이라는 겁니다.”
후계자를 바꾼다고?
린지오 백작의 눈이 대차게 흔들렸다. 시선을 돌리니 대공의 눈썹이 꿈틀하는 게 보였다. 린지오 백작은 안 되겠다 싶어 버그 후작의 말을 더 끌어냈다.
“글레멘드 가문의 후계자라고는 에스티아 글레멘드 영애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후계자를 바꾼다는 말입니까?”
“백작은 참…….”
버그 후작은 대놓고 그를 비웃었다. 린지오 백작은 마음속의 깊은 분노를 느꼈다.
“주장을 확실히 하고 싶었으면 사전 조사 좀 하고 오시지 그랬습니까. 이래서야 원 굳이 이 자리에서 털어놓지 않아도 더 이야기할 가치가 없군요.”
저 늙은 여우가! 아무래도 준비해 온 증거물들을 꺼낼 차례가 된 거 같았다.
“아무튼 제 요지는 더는 에스티아 글레멘드 영애를 약혼녀 후보에 올려 둘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대공 전하.”
버그 후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린지오가 대공을 불렀다.
“뭡니까?”
“방금 버그 후작은 글레멘드 영애가 약혼녀 후보가 될 자격이 없다고 했죠. 하지만 소문이나 과거에 잠깐 했던 실수로 따진다면 셰린포드 가문도 뒤지지 않는다는걸요.”
“뭐요?”
여유를 부리던 버그 후작의 얼굴이 린지오 백작의 말에 와락 일그러졌다.
“백작이 지금 셰린포드 공작가를 음해하는 것이오?”
“음해라니요. 명백한 증거를 갖고 얘기하는 겁니다.”
린지오 백작이 침착하게 버그 후작에 말에 답했다. 대공의 표정이 묘하게 달라졌다.
“백작, 증거를 갖고 왔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린지오 백작의 시선이 대공에게로 향했다. 그는 내심 속으로 대공의 연기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여동생이 사교계의 영애들을 잘 알고 있지요. 물론 사교계에서 무시당하는 귀족 가문들까지 말입니다.”
“…….”
“익명으로 조사한 결과, 셰린포드 영애에게 폭언 및 폭행을 당했다는 영애들이 있더군요. 여기, 그 증언들을 모은 조사서입니다.”
린지오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를 대공에게 건넸다.
“그건 그냥 말 그대로 ‘증언’일 뿐이잖소! 그 영애들이 거짓말했을 수도…….”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린지오 백작이 여유롭게 반박했다.
버그 후작의 안색이 점점 안 좋아졌다. 상황이 묘하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참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후작께서 ‘글레멘드 영애가 다른 영애에게 와인을 쏟는 것을 보았다’라는 말씀도 반드시 믿을 필요는 없겠군요.”
“백작!”
버그 후작이 벌게진 얼굴로 책상을 내리쳤다. 린지오 백작이 그걸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대공 전하.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과거에 했던 실수’와 ‘진실인지 아닌지 믿을 수 없는 소문’으로 자격이 있냐 없냐를 판단하기엔 어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공은 가만히 백작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특히 후작께서 조사해 온 ‘후계자’ 문제 건은 엄연히 글레멘드 가를 모욕하는 일입니다. 제대로 알아 온 정보가 아니라면 취급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것도 그렇군요.”
백작이 술술 얘기하자 그 옆에 있던 라논 후작이 동의했다. 버그 후작은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서 후작 각하, 글레멘드 영애가 후계자에서 밀려난 게 맞는지, 그렇다면 누가 후계자가 될 건지도 알아 오셨습니까?”
“…….”
버그 후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즉, 후계자 얘기는 그저 여론 몰이하려고 꺼낸 얘기였다는 것이다.
“우리끼리 사사로이 모 영애가 이래서 부족하고, 저래서 부족하다 얘기하는 건 무척 몰상식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아, 물론 계급이 낮은 귀족 영애들에게 폭언과 폭력을 행사한 건 귀족 사회에서 제대로 조사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요.”
린지오 백작이 싱긋 웃었다. 버그 후작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 그럼 이 주제에 대해 더 얘기를 해야 합니까?”
대공이 후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후작은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못했고, 회의는 그대로 파했다. 린지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 바쁜 와중에 영애들의 증언은 어떻게 모은 걸까 린지오는 궁금해졌다.
아무튼 회의는 이 정도로 일단락되었다. 린지오 백작은 대공을 따라 그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대공 전하.”
“린지오.”
이거 완전 녹다운이네. 린지오 백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오랜 세월 가신으로서 그를 섬겼는데, 평소에는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친근하게 부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사적인 공간에 왔다고 해도 이름을 부른다는 건 정신력이 나가도 그냥 나가 버린 게 아니라는 소리였다.
집무실 의자에 앉아 있는 대공은 거의 죽은 사람 같았다.
“영애들의 증언은 어떻게 확보하신 겁니까? 영애들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얻어 내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해당 영애들과 그녀의 가족들을 확실히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하에 모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 제국에 없을 거예요. 내가 밖으로 빼내 주었으니까.”
“…….”
“가신들 입단속 철저히 시키세요. 후작의 귀에 들어가긴 할 테지만 이 정보는 어디까지나 바일 가문이 특별히 알아낸 정보로 남아야 하니까.”
“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린지오가 단호하게 답했다. 대공이 한숨을 후 하고 내뱉었다.
“요즘 잠을 못 자.”
“그런 거 같았습니다.”
린지오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약을…… 찾으러 가야겠어요.”
“이 시간에요?”
린지오는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 보았다. 벌써 저녁 6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저녁 드시지요. 상단에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내가 가는 게 좋아.”
린지오는 진심으로 그가 걱정스러웠다. 이 상태면 제대로 걸어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바깥 공기를 쐬고 싶기도 하고 우연에 기대고 싶기도 하고…….”
세상에. 겨우 나아지나 했더니 2년 전 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 날씨에 바깥 공기라니. 지금만 해도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가 귓가를 세게 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말리고 싶었지만 그러다가는 진짜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스러웠다.
결국 린지오는 자신의 집이 아닌데도 현관까지 배웅을 나갔다.
* * *
에스티아는 메리와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물이 들어왔을 때 노를 저으라고 에스티아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상단으로 출근했다.
저녁에는 비가 많이 오고 있었지만 에스티아는 비가 무섭지 않았다. 황제도 제 편으로 만들었겠다, 상단과 상인들의 신임도 얻었겠다 뭐가 무서우랴. 물론 로셸 글레멘드라는 그녀의 아버지가 남아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시간을 유야무야 흘려보낼 순 없었다.
그래서 저녁을 맛있게 먹은 에스티아는 메리와 함께 상단으로 향했다. 이안이 동행하겠다고 우겼지만 에스티아는 푹 쉬라며 기어코 그를 떼어 내고 마차를 탔다.
에스티아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가 많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평온하게 바라볼 만큼 마음이 편해진 상태였다.
잠시 그렇게 멍하니 창밖에 시선을 던지니 마차가 곧 상단에 도착했다. 구석에 작은 마차가 세워져 있었지만 에스티아는 신경 쓰지 않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어두웠다. 랜턴 몇 개가 프런트에 놓여 있었는데, 있으리라 예상했던 에팅이 자리에 없었다. 이름을 몇 번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겠어요, 아가씨? 제가 에팅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래.”
에스티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가 가게 안쪽으로 사라졌다. 에스티아는 그렇게 프런트 앞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다른 복도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아니었다면. 그 빛은 에팅이 라트 약초가 있다며 그녀에게 안내해 줬던 창고였다.
에버하르트 바일을 처음 만났던.
그때는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되어서 이렇게 그와의 사이가 어그러질지는 몰랐다.
사실 그를 그런 식으로 농락하는 게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전처럼 아픈 말을 들을까 봐 에스티아는 철갑투를 걸쳤다.
에스티아는 빛이 한줄기 흘러나온 복도로 걸어갔다. 살짝 열린 문을 활짝 열자 문 근처에 놓인 랜턴이 눈에 보였다. 도둑이 세심하게 랜턴을 가져왔을 리는 없으니 아무래도 관계자가 있는 거 같았다. 에스티아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창고 안은 어두웠지만 처음 봤을 때 모습 그대로였다. 불과 한 달 전쯤인데 아주 옛날을 떠올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감상에 젖어 계속 안으로 향하던 에스티아는 곧 마지막 줄에서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물론 그곳에도 랜턴이 놓여 있긴 했다. 그곳에 누가 앉아 있는지도 잘 보였고.
‘저 사람이 왜 여기에. 그것도 이 시간에?’
에스티아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미동도 없는 게 괜히 불안해져서 가까이 다가갔다.
평소와는 달리 하얀 눈꺼풀이 녹색 눈동자를 덮고 있었다.
하얀 눈밭 속 푸른 잔디를 숨겨 놓은.
겨울이지만 어쩌면 봄일 수도 있는 사람.
하지만 곧 저버려야 할 인연.
에스티아는 한동안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